집시의 시간.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한 헌가..

영화감상평

집시의 시간.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한 헌가..

1 가륵왕검 1 2275 6
떠도는 영혼들. 정처없이 떠도는 민족 집시에 대한 영화 [집시의 시간]은 두 말할 나위
없는 걸작이다.

깐느 그랑프리를 수상하기도 했던 유고감독 에밀 쿠스트리챠감독이 만든 집시의 시간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드는 몽환적인 아름다움과 따스한 유머 그리고 가진 자와 아닌 자에 대한 담담한 관찰을 통하여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실제 전문 배우가 단 한 명도 나오지 않은 채 진짜 집시들로 찍었다는 집시의 시간을
겉모습은 무척 발랄해 보이는 영화지만 그 내면에는 집시들의 고단한 삶의 조각들이
고스란히 녹아 들어있고 죽으면서까지 버리지 못하는 아스라한 그리움이 담겨있다..

영화의 기본적인 틀은 주인공 페르카니의 이야기다.

부모가 없는 채 할머니와 삼촌,그리고 동생 다니라와 살고 있는 페르카니는 가벼운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능력으로 갑부 아메드의 아들을 고쳐주게 되고 이것을 인연으로 불구인 동생의 다리를 고치기 위해 이탈리아로 가게된다.

그러나 페르카니는 아메드에게 속아 구걸을 하게 되고 아메드에게 팔려온 사람들(장애인.난장이등) 역시 구걸을 하는 처지에 놓인다.

페르카니는 아메드의 신임을 얻어 이윽고 구걸집단의 우두머리가 되어 고향으로 가지만
할머니는 그를 반갑게 맞지 않고 페라카니의 집을 지어주겠다던 아매드의 말은 거짓임이 드러난다.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이를 아메드에게 따지지만 아메드는 페르카니를 배반하고, 다른 집시들을 데리고 어디론가 떠나버린다. 아내도 역시 아들을 낳고 곧 죽어버린다.

페르카니는 동생을 찾아 나서고 고생 끝에 만나지만 동생 역시 구걸하는 집시였고, 다리수술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페르카니는 동생 다니라와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아들을 고향으로 보내고, 그는 아메드 일파에게 복수하기 위해 아메드의 결혼식장으로 향하고, 결국, 초능력으로 복수를 하지만, 아메드 신부의 총에 맞아 죽고 만다.

고향집에서 시작할 때와 하나도 다름없는 그의 집에서 페르카니의 장례식이 시작되고, 아들과 삼촌 그리고 할머니와 동생은 그를 애도하면서 끝을 맺는다.

이런 틀에서 보면 영화의 구성은 무척 깔끔하다고 할 수 있다.

구걸하면서 생계를 꾸리는 집시들을 매개로 페르카니와 아메드를 설정하고, 그들의 권력관계와 주변인물의 일상을 보여주면서 사건발발과 그 인과관계를 깔끔한 구성으로 매끄럽게 이끌어가고 있는 것이다.

영화에는 여러 이미지가 나오는데 등장하는 거위는 백색의 깨끗한 이미지로 어둡고 더러운 상황에서 시각적인 순화를 이끌어내며 이는 페르카니의 슬픈 꿈에도 나타난다.

한 장면에서 페르카니가 잃어버린 동생 다니라를 절망적으로 찾아다니다 꿈을 꾸면서, 다리 및 하천에서 하얀 거위를 안고 쓰다듬는 장면이 있다.

이것을 볼 때 집시들의 전통적인 관념을 고려해본다면 집시들에게 있어 강 또는 하천은 악마들이 사는 곳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페르카니가 꿈 속에서 검은 하천에서 하얀거위를 안고 쓰다듬는 것은 스스로가 악마적인 요소들이 존재하는 이탈리아에서의 그의 삶과 삶의 영역에서 하얀 거위로 상징되는 다리나를 구해내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자세히 살펴보자면 그들의 일상에서는 이런 깨끗한 순백색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집시들이 가진 생활기구부터 옷이나 그들의 심성까지도.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함, 그리고 곧 사라질 것 같은 아스라함이 백색의 이미지 속에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백색은 영화속의 집시들에게 있어 그리움의 대상이다.

이점은 페르카니와 다니라에게 있어서 더욱 적극적인 모습으로 드러나는데, 이것이 바로 하얀 면사포와 하얀새에 관한 이미지이다.

다니라의 경우 고향마을을 떠나오면서 차 지붕에서 휘날리는 하얀 면사포를 바라보는데, 그것은 곧 어머니의 모습에 투영되어 환상속에서 하얀 드레스를 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보게 된다.

다니라는 예측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어두운 공포감 속에서 그립고, 따뜻한 안식처로서의 어머니의 모습이 너무나 깨끗한 하얀 면사포에 투영되어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장면이 등장하는 시간적 배경 (어두운 밤)과 공간적 배경(물질문명으로 상징되는 고속도로)는 이런 측면을 염두해 두고 설정한 것이다.

페르카니의 경우 백색의 이미지는 죽어갈 때 보게되는 너무나도 하얀 새에서 상징되고 있다.

그에게 있어서 하얀새는 다니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사라질 듯, 날아가 버릴 듯한 그리움의 대상이고, 고단한 삶을 마친 그에게 제공되는 편안한 안식처를 상징하고 있다.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아내가 출산할 때, 결혼식 복장을 하고 있었는데, 아내는 자신의 자식이 아니라면서 괄대하는 페르카니를 떠나기 위해 벌판으로 뛰어간다.

하지만 아내의 하얀 면사포가 바람에 날려 페르카니에게 날아오고, 그는 이것을 주워 그녀에게 달려가지만, 이미 출산이 시작되었고, 아내는 죽었다. 그리고 페르카니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한다.

정리하자면 페르카니의 경우도 하얀색 면사포으로 상징되는 정겹고 편안하고, 어머니와 같은 따뜻한 세상을 바라고 있었고, 더러운 개천에서 하얀 거위를 구해내듯이 자신이 이런 순수함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런 따뜻했던 어머니, 너무나 이뻐하던 여동생 다니라, 착했던 아내와 함께, 그들이 가지고 있던 백색의 면사포와 함께하는 따스한 삶을 추구했고, 그것을 위해 죽어갔다.

그러나 면사포가 바람에 쉽게 날리고, 아스라히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것 처럼 페르카니의 하얗던 꿈도 하얀 새와 함께 사라져 갔다.

그 밖에 기타 집시들의 삶에서 흥미로운 점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희망의 메시지에 대한 것인데 주인공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나타나는 삶의 연속성과 꿈인것이다.

페르카니는 아메드 신부의 총에 맞아 죽었지만, 그의 아들은 똑같은 페르카니라는 이름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간다.

또한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저승길 노자돈과 저승길을 밝혀줄 금화를 몰래 숨기는 장난기 어린 모습을 보여주면서 이런 희망의 메시지를 읽을 수 있다.

곰곰히 생각해보면, 할머니의 남편도 없고, 페르카니의 부모도 없고, 페르카니 자신도, 그 부인도 모두 죽었다.

이 점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백색의 이미지, 그리움의 이미지가 새로운 삶을 살아갈 페르카니의 자식에게도 계속될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런 면에서 백색 그리움의 아스라한 이미지와 그것을 추구했던 페르카니의 삶도 그의 아들을 통해서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재미있었던 것은 남자들이 유난히 정식양복을 즐겨입는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별 문제가 되거나 상징적인 무엇이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그들의 내면상태에 비추어 흥미로운 것 중에 하나다.

영화속에 등장하는 성년의 남성은 정말 가리지 않고 양복을 즐겨입는다.

어디 행사에 가는 것도 아니고, 정식모임에 참석하는 것도 아닌데, 집에서나 침대에서나 심지어는 구걸하면서도 줄기차게 양복을 고집한다.

페르카니의 경우도 동생 다니라를 찾아다니면서 넥타이까지 맨 채로 몇 달을 보내는
데, 옷이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이는 아무 곳에도 정착할 곳이 없는 집시들의 자존심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

혹은 겉모습이라도 그럴싸하게 보여야 살아남는다는 의식의 발로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아메드에 대한 설정도 흥미로운데. 아메드와 그 일당들은 장애인이나 어린이, 여자 등을 이탈리아로 데리고 와서, 그들에게 구걸을 강요하고, 그 중 일부를 빼앗아 살아가는 집시들이다.

사실 이탈리아의 경우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시에 대해서는 대단히 관대했다. 그들을 정착시키기 위한 정부의 노력이 많았던 것이다.

그러나 동유럽이 몰락하고, 동유럽의 집시들이 몰려들자, 이탈리아 정부는 집시에 대한 강경책을 발표했다.

현재는 이 영화에서 간접적으로 표현하고 있듯이, 정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그들의 국민이 아니기 때문에 처벌이 불가능하고, 정식으로 비자받고 입국한 것도 아니라서 단속이나 그 어떤 공식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다.

이 영화에서는 아메드 일당이 구걸자들을 등쳐먹는 행위를 상세히 보여주고 있다. 사실 영화 속에서 형성된 갈등도 이 행위에 기반하고 있다.

이런 아메드의 행위는 집시들의 일상생활, 관습등과 함께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면 씁쓸함을 느끼게 된다.

페르카니의 죽음도 죽음이지만, 아메드와 같은 또 영화 속의 구걸하는 집시들의 피폐한 삶을 간접적으로 보게되어서 느끼는 일종의 무력감과 그들에 대한 측은감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이 영화는 발랄한 듯 하지만, 그 심연에 흐르는 주제는 짐짓 무겁고 어두우면서, 그 끝은 비극으로 맺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주목할 점은 할머니와 페르카니의 주술성에 대한 것이다.

영화에서는 할머니의 주술적 치료가 이를 상징적으로 나타내주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몇가지 새로운 사실을 읽어낼 수 있다.

집시여인들은 일반적으로 점치는 일이나 가무등을 잘한다고 알려져 있다.

중세시대에는 위와 같은 이유로 마녀사냥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물론 마녀사냥에는 다른 이유들도 많을 것이다)

그 기원을 잠깐 살펴보자면, 이동생활을 주로하는 집시들의 경우 근대사회까지는 거의 의료혜택이 없었다.

집시의 시간 속에서 볼 수 있듯이 집시촌에까지 도달할 의료혜택이 없는 것을 보면 쉽게 추측할 수 있으리라.

결국 이들은 몸에 병이 있을 경우, 그것은 그들이 할 수 있는 능력 밖의 일이 될 수밖에 없고, 그 병이 특정사람이나, 특정약초에 의해 낫는다면, 그 특정인과 약초는 그들의 능력밖에 위치한 신적인, 주술적인 마법의 힘이라고 생각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에게서나, 다른 문화권에서나 치료법은 주술과 상당한 연관관계가 있음을 어렵지 않게 발견하게 된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할머니 역시 위와 같은 치료법을 가진, 주술적인 존재이다.

이런 주술성은 유전(?)에 의해 페르카니에게 전해지고, 페르카니는 가벼운 물건을 손으로 힘을 가하지 않고도 움직일 수 있는 주술성을 획득하게 된다.

이것 역시도 어떤 거대한 주술의 능력이라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물론 영화에서는 복수를 할 수 있는 능력으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이런 부류의 능력은 눈요기거리나 우리나라 식으로 치자면 '약장수의 공연'과 격이 비슷하다고 볼 수 있는데, 이 점은 그 주체가 집시라는 점에서 또하나 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즉, 그들은 끊임없는 방랑생활을 해왔고, 이런 방랑생활에서 그들의 생존은 순전히 주위사람들의 이목이나, 관심을 끌어 장사나 도움을 얻는 것에 달려있다.

마법적인 아니면 마법이라고 우길 수 있는 이런 능력은 그들의 생존을 위한 수단에 적극적으로 이용될 수 있는 실용적인 것이고, 가끔은 이를 매개로한 과장이나 왜곡, 허풍이 그들의 생존을 위한 수단이라고 해도 무리한 억측은 아니라고 본다.

그래서 할머니의 주술성은 일반 집시들의 인식권밖에 있는 우리식으로 하자면 민간요법에서 나오는 주술성이라고 할 수 있고, 페르카니의 주술성은 그들의 생존을 위한 주술성, 아니면 주술성이라고 우길 수 있는 능력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집시의 시간]은 집시들의 삶에 대해 관조적인 입장을 유지하면서도 그들의
비극을 은유적이면서 현실과 환상이 교차하는 몽환적 시각으로 그린 걸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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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1 JKc  
  글쓴이 직업이 궁금하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