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쉬리'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났을 때

영화감상평

'쉬리'가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만났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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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릴 적 유난히 겁이 많았던 종일사랑이 무서워했던 건 죽음, 귀신, 괴물 등등 다양했었는데, 그 중 비중이 꽤 컸고, 또 오랫동안 종일사랑을 두렵게 했던 것이 바로 ‘전쟁’이었습니다. 특공대가 조직되어 훈련을 받고 멋지게 임무를 완수하고, 주인공들은 피해가는 반면 독일군이나 북한군에게는 여지없이 적중하는 총알들, 폭탄을 던지는 족족 공중 회전을 하며 고꾸라지던 적군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던 반공영화나, <전투> <전우> 류의 전쟁영화들은 사실 오락영화였지, 전쟁고발영화는 아니었습니다.

종일사랑이 전쟁의 무서움을 몸소 느끼게 된 건 6월 25일이 인접한 어느 날 저녁 티브이에서 해준 ‘6.25 특집 다큐멘터리’ 때문이었습니다. 총격으로 머리가 떨어져 나간 사람도 있었다던 체험자의 증언이나, 엑스트라가 아닌 진짜 시체들이 줄줄이 누워 있는 기록 화면들은 전쟁오락영화에서 보여주었던 환타지와는 극도로 상반되는 리얼리즘 그 자체였고, 그 날 밤 종일사랑을 공포에 떨게 했습니다. 전전반측하며 어린 종일사랑이 내내 느꼈던 공포는 다름 아닌 ‘전쟁이 또 나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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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다지 행복할 일도 없건만, 전쟁 전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마냥 행복한지, ‘아이스께끼’를 먹으면서도 방긋방긋, 제사를 지내면서도 방긋방긋, 난데없이 야밤에 옷 입고 가족대항 물장구를 치면서도 방긋방긋 웃음이 떠날 날이 없던 우리의 진태와 진석, 두 형제에게 마침내 웃음이 떠날 날이 오고야 마니, 그것은 다름 아닌 6.25 전쟁 발발. 게다가 나이가 징집 연령에 해당된다는 이유로 집안의 기둥 진석이 징집되고, 그것을 막으려 했던 진태마저 징집열차에 태워져 전선으로 보내집니다. 진태와 진석은 훈련을 받을 시간도 없이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되고, 거기서 형제가 맞닥뜨린 전쟁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고 잔인한 것이었습니다. 진태는 무공훈장을 받아 진석을 제대시키기 위해 목숨을 걸게 되고, 점점 전쟁광이 되어 가는 형이 진석은 불안하기만 합니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점점 현실로 나타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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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방에서 보낸 군 시절, 훈련병이었을 때부터 불거졌던 전쟁가능성은 종일사랑이 자대에 배치 받고, 휴전선 이북에 막대한 병력이 전진 배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부터 더 커졌습니다. 어쩌면 제 2의 6.25가 터질 수도 있다는 조바심이 들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어릴 적만큼 크지 않았던 때라 잠을 못 이루거나 하진 않았습니다. 결국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고, 다시금 전쟁에 대한 공포가 되살아난 것은 야외상영회를 통해 보게 된, 스티븐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 때문이었습니다. 30분 분량의 단편영화로 내놓았어도 충분히 걸작이었을 초반부의 오하마 해변 상륙씬은 기록영화를 방불케 하는 사실감과 총알이 귓가를 스쳐가고 팔다리가 눈앞에서 떨어져나가는 듯한 현장감으로 마치 종일사랑이 야외상영회가 아닌, 전장에 있는 듯한 살 떨리는 공포를 몸서리쳐지도록 체험하게 했습니다.

그 영화로 인해,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은 게 그 얼마나 다행인가,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지만, 영화 속의 장면들은 며칠 동안 잊혀지지 않고 파편화된 이미지로 종일사랑의 머릿속을 떠돌았습니다. 그리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대한 후유증이 진정될 즈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왜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가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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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강제규 감독은 <쉬리>로 일약 스타 감독에 오른 후 그는 한동안 고심했을 것입니다. 아무래도 흥행 면에서나 완성도 면에서 <쉬리>보다는 나은 영화를 만들어야 한다는 부담감도 컸을 것이고, 그의 차기작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도 <쉬리>보다 뛰어난 영화를 보여주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6년이라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그 고심의 흔적은 <태극기 휘날리며>를 통해 충분히 드러납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태극기 휘날리며>는 매우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입니다. 비교가 될 수밖에 없는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마찬가지로 영화는 노인이 된 주인공의 시점을 따라 시작되고, 그의 회상을 따라 과거로 거슬러올라갑니다. 그런 액자식 구성은 영화에 안정감과 신뢰감을 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내부 이야기의 서사가 강한 <타이타닉>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에 곧잘 사용되어왔고, 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에서 역시 효과적으로 이용되고 있습니다. 특히 회상과 현재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라스트신에서는 관객의 눈물을 이끌어내는 데에 한 몫 하고 있습니다.

영화 내에서 볼거리로는 가장 큰 부분을 담당하는 전투씬 역시 잘 찍었습니다. 낙동강 전투와 평양 시가지, 혜산진 전투, 그리고 가상의 두밀령 전투는 147억원이라는 순제작비를 두 배 더 불려도 믿을 만큼 실감나고, 완성도가 뛰어납니다. 과거 거의 ‘딱총놀이’에 불과했던, <남부군>을 찍으면서도 총이 없어 직접 나무를 깎아 만들었다는 눈물겨운 전설을 남기기도 했던, 우리나라 전쟁영화의 전투씬이 이 정도의 모양새로 만들어진 것은 분명 박수를 쳐줄 만한 성과입니다. 예컨대, 수류탄만 던졌다 하면 무조건 화염이 솟아올랐던 과거 전쟁영화들과는 달리, 수류탄이 폭발할 때 파편이 튀는 것으로 묘사하여 사실감을 부각시켰고,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서 쓰였던 특수촬영 대신 휴대폰의 진동 원리를 응용한 ‘이미지 쉐이킹’이라는 기법으로 전장의 긴박함을 표현한 점도 합니다. CG의 흔적이 거의 드러나지 않는 피란민의 행렬이나, 중공군의 인해전술을 부감으로 잡은 장면도 장관입니다.

게다가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라 불렸던 영화들이 간과해서 욕을 먹었던 드라마에서도 탄탄함을 자랑합니다. 영화는 행복했던 형제가 어떻게 전쟁으로 인해 망가져 가고, 도덕적으로 무감각해지는지를 긴 상영시간을 통해 비교적 설득력 있게 전달합니다. 눈물을 유도한 장면(종일사랑의 옆에 앉아 영화를 보시던 아주머니께서는 아예 손수건을 꺼내들고 훌쩍이더군요)에서는 눈물이 고이고, 웃음을 유도한 장면에서는 웃음이 나옵니다. 장동건과 원빈의 매끈한 얼굴을 상영시간 내내 볼 수 있다는 즐거움도 있습니다. <인정사정 볼것없다> 이후로 연기력의 상승곡선을 타고 있는 장동건과 <킬러들의 수다>로 영화계에 발을 디딘 원빈의 열연도 발성과 몇몇 부분에서 아쉬운 감이 있긴 하지만, 볼만합니다. <실미도>에서는 임원희가 담당했던 감초 역할을 하고 있는 공형진의 연기는 임원희보다 한층 더 자연스럽고, 툭툭 뱉는 대사들이 ‘전쟁의 무의미함’에 대한 이 영화의 입장을 쉽고 간결하게 표현합니다. 우정 출연하는 인민군 대좌 역의 최민식은 등장 시간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인상적입니다(<쉬리>에서 그의 역할이 떠오르는 재미있는 장면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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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그러나 왜였을까요? 이 모든 장점에도 불구하고, 종일사랑 개인적으로는 <태극기 휘날리며>가 그다지 마음에 와 닿지 않았습니다. 머리는 즐겁고, 실감나고, 가슴아픈데, 가슴은 즐겁고, 실감나고, 가슴아프질 않았습니다. 우선 앞서 소개한 영화 내용에 약간 비꼬아져 있듯 전쟁 전의 마냥 행복해 보이는 초반부가 후반부의 비극성을 극대화하기 위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면서도 필요 이상으로 그 행복함이 전형적이고, 과장되어 보였습니다. 특히 징집열차의 진석과 진태가 어머니와 영신과 이별하는 장면의 상투성은 과거 <별들의 고향>이 떠오를 정도였습니다. 전투 씬 역시 잘 만들어지긴 했지만, 멀찌감치에서 구경하는 기분이 들었지, 그 안에 들어가 전투를 직접 체험하는 듯한 느낌은 들지 않았습니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같은 영화에 이미 단련이 되어 감성이 무뎌진 것이었을까요. 또한 지나치게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의식한(혹은 <라이언 일병 구하기>와 유사한) 내용상의 구성이나 세세한 부분들도 못마땅한 부분입니다. 좀더 전반적으로 매끈한 CG 가운데 무에서 유를 CG로 창조했다는 폭격기 폭발 씬은 들어내는 게 괜찮았을 옥의 티입니다.

드라마 면에서도 아쉬운 점은 있습니다. 진태의 고뇌나, 진석의 갈등 역시 머리로만 느껴지지 가슴 깊이 공감이 가지는 않았으며, 편지 한 장으로 인해 진태에 대한 증오가 우애로 급전환되는 후반부도 무리하게 보였습니다. 또한 정신이 나간 진태와 진석이 엎치락뒤치락하는 클라이맥스에서는 어느 순간부터인가 두 사람이 무엇을 하든 간섭하지 않는, 주변에서 백병전을 하는 군인들의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달의 요정 세일러문’ 같은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이 변신할 때에는 공격하지 않고 기다려주는 악당처럼 말이죠. 무엇보다 영화 저변에 깔려 있는 우익 이데올로기가 종일사랑을 불편하게 했습니다. <쉬리>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도 인민군은 ‘나쁜 놈’으로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 영화의 관점이 노골적인 반공영화가 아니라, 그 모두가 전쟁의 피해자라고 규정을 하고 있는 이 영화의 뒤편에 은근히 깔려 있는 것이기에 더 위험하게 보입니다. 형제애로 모든 걸 다 덮어주기에 강제규 감독의 사상은 여전히 보수적입니다.

전반적으로 <태극기 휘날리며>는 두 시간 반이라는 상영시간 안에 너무 많은 걸 담아내려 과욕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편집은 부자연스럽고, 영화의 흐름이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습니다. 인물들의 감정도 너무 과잉되어 있어 차라리 <밴드 오브 브라더스>처럼 여유 있게 10부작 미니시리즈로 제작했다면 더 나았으리라는 아쉬움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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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종일사랑의 감상이야 어떻든 <태극기 휘날리며>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전무후무하게 잘 만들어진 전쟁영화입니다. 취향에 따라서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감동할 수도 있는 영화이며, 이 영화를 최고의 한국영화로 손꼽을 사람도 있겠습니다. 관객동원 면에서도 <실미도>가 세운 1천만은 충분히 넘어설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쨌든 이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 땅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한다는 진리만은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정면으로 6.25를 그려냈고, 전쟁을 체험한 세대나 전후세대 모두에게 이 땅에서 다시는 똑같은 전쟁이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금 불러일으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들어진 의의는 있는 영화 <태극기 휘날리며>였습니다.


덧붙임 1. ‘진석’이라는, 원빈의 극중 이름은 개인적으로 종일사랑의 하나밖에 없는 친동생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그 이름이 영화상에서 자주 불리는데, 그게 영화에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 작용한 것 같기도 합니다. 물론, 그 때문에 ‘아~ 나는 동생을 얼마나 아끼는 형이었던가’ 성찰할 수 있었지만요.

2.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영화상에서 진석이 진태에서 ‘니가 죽였어!’ 소리치는 대사가 자꾸 과거 모 드라마에서 ‘얼마면 되니? 얼마면 돼!’라는 대사와 겹쳐졌던 게 바로 그것입니다.

※내맘대로 평점
○주목도: ★★★★★
○실감도: ★★★☆
○처참도: ★★★☆
○최루도: ★★★★
○완성도: ★★★☆
○공감도: ★★☆
○추천도: ★★★

beforetherain@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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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v.2 2 목련향  실버(2등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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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3 아무개  
  영화에 대해서 의견을 드리자면, 부족한 영화입니다. 영화의 빠른 전개를 보셔서 알겠지만 저는 그걸볼때 플스2게임 진삼국무쌍이 생각나더군요.조금 싸우다보면 동영상 이벤트를 보여주는 식의...전쟁을 완전히 담아내려고 욕심 부렸습니다.단지 한편의 영화일 뿐인데요.편집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급한 편집을 했다고 하더군요. 2월개봉을 목표로 관객을 놓치지 않기 위해 일단 만들어서 보이기만 하자는 식...왜 그랬는지...강제규도 작품의 완성도 보다는 돈이 좋은가 봅니다. 1000만 해보고 싶었나보죠.DVD나올때는 다듬을 거라고 하는데. 관객수 늘리려고 조기개봉하는 강제규라는 사람 믿음이 가지 않는 군요. 아무쪼록 DVD에서는 더 나은 모습을 보았으면 합니다.
1 박창수  
  아무개님..
돈 싫어하는 사람 있습니까? 태극기 휘날리며가 무슨 아주 소수층만을 위한 예술영화였나요? 강제규 감독이 사비로 100억 이상 쏟아부으면서 영화 만들었답니까? 전국민 다 합해봐야 4000만인 나라에서 전세계를 상대로 수많은 시행착오와 수많은 영화의 바다에서 아주 극히 적은 수로 걸러진 명화 혹은 대작이라는 부류와 "태극기 휘날리며"를 비교하며 봐야 진정 영화를 제대로 보는 겁니까?
발전적인 영화 비평은 좋습니다만은 대중 한국영화에서 발전과 가능성, 새로운 길을 열어온 감독에게 "돈만 밝힌다"는 식의 근거없는 인신공격적인 악의적인 비평은 정말 눈쌀을 찌푸려지게 만드는군요.
3 아무개  
  한국영화를 사랑하시나요?
저는 객관적인 평가입니다. 한국영화라서 대단하다는 평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헐리우드에서 명작이된 다른 전쟁영화들과 비교하자는 식도 아닙니다. 태극기 휘날리며는 이전까지는 시도된 적 없는 규모의 전쟁영화입니다. 그정도 돈을 쏟아부은 적도 없고 전쟁을 주제로 만들어진 적도 없습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 영화에 기대를 걸게 되죠. 한국영화로써의 큰 발전은 최고의 영화라고 자부하는 것은 너무 유치합니다. 작품의 완성도를 독립영화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분입니까? 영화에서 편집은 작품성과 직결합니다. 스토리가 아무리 좋아도 편집이 엉성하면 기반은 무너집니다. 감독 자신도 편집이 엉성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고 DVD에서는 다듬을 거라는 군요. 그런 기대를 감독에 대한 맹렬한 비난으로 들으신다면 더이상 할 말 없습니다. 이것만 기억하십시오.만약 감독과 영화사가 조금만 욕심을 덜 부렸다면 감독이 진정으로 생각하던 깔끔한 영화를 볼 수 있었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