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시대의 한 단면. 살인의 추억

영화감상평

우울한 시대의 한 단면. 살인의 추억

1 치우천황 2 1989 1
잭 더 리퍼라는 연쇄살인마가 판을 친 영국 화이트 채플이 그러하듯 어두운 시대와 맞물린 인간의 이상행동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지 모른다.

우리가 기억하는 80년대의 끄트머리에서 일어났던 화성연쇄 살인사건 역시 폭압적인 시대가 범죄를 키우고 법망을 빠져 나가게 했다는 점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무언가 어긋난 한 시대에 벌어진 사건을 담당한 형사들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무력감 그리고 깊은 바닥에서 끌어올려진 양심을 보여주는 수작이다.

처음 나체의 여인 시체가 발견된 후 형사 박두만은 현장조사는 할 생각은 하지 않은 채 마을 주변의 요주의 인물들 리스트를 만들어 족치기 시작한다.

이러한 방식은 박두만의 고유한 특성에 따른 것이 아니라 그러한 수사방식이 일반화 되었음에서 오는 한계적 상황으로 보여진다.

더우기 최초의 용의자로 지목되는 백광호를 거짓 족흔까지 꾸며 범인으로 몰아가는 장면은 우스우면서도 합리적 증거에 의해 조사를 해야하는 기초적인 것조차 안되는 단면을 보여준다.

이는 박종철 고문 치사 사건을 비롯해 당시의 우울한 아이콘들을 만들어낸 정권의 행태와 뚜렸한 연관을 가지고 있다.

의심쩍은 이를 잡아다 두들겨패고 거짓 자백을 받아 범인을 만드는 .. 민주화인사를 간단히 빨갱이로 만들었던 독소들이 시골의 평범한 형사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에 반하여 등장하는 서태윤 형사는 박두만와 뚜렷히 대비되는 성향을 가진 인물이다.

무언가 까다로운 듯 보이는 인상의 그는 박두만이 간과한 정보들에서 사건을 파헤쳐간다.

서울에서 온 엘리트답게 현장검증을 최우선으로 하고 논리적 타당성에서 추리한다.

하지만 차츰 드러날 것 같던 실마리는 체모 하나 남기지않는 범인에 의해 미궁에 빠지고 서태윤이나 박두만이나 아무런 진전을 얻지 못한다.

살인이 일어나던 날 라디오방송에 같은 곡을 신청하는 박원규라는 용의자를 잡지만 종국에 그역시 유전자 감식의 결과로 인해 풀려난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범인에 대한 뿌리깊은 증오.도덕관념이나 승부욕을 넘어서는 본질적인 증오뿐이다.

실제 사건을 소재로 했기에 영화의 결말은 여기서 멈춘다.

물론 박두만이 형사를 그만둔 뒤 사건 장소에 우연히 와보는 장면에 영화는 끝나지만 그때 일어났던 일은 거기서 끝을 맺었다.

지금에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최소한 루미놀반응 검사를 비롯해 많은 법의학적 조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형사 몇이서 맨땅에 헤딩하는 블랙 코미디를 연출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아니 적어도 죽은 이가 자신의 몸을 통해 어찌 죽었는지 온당히 말할 수 있는 기회라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의 사건은 비틀려진 시대가 악마를 키우고 억압과 폭력을 요구한 시대가 희생자들을 지워버렸다.

그것에서 오는 안타까움과 분노. 그것이 어쩌면 진정한 살인의 추억이 아닐까.

이리 저리 숨통이 막혀버린 어두운 시대에서 범인을 잡지못한 자의 추억과 그렇게 좋던 시절에 사람을 죽여본 살인마가 아직도 몰래 기억하는 추억말이다.

영화 살인의 추억은 이제껏 정형화 되버린 형사의 모습과 전혀 다른 모습을 제시한다.

기존의 형사들은 일정하게 완성되어진 조건에서 관객의 개입을 허락한다.

그렇기에 그들의 활약이 멋있다고는 여길지 모르나 순군 순간 느끼는 감정상태가 전이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살인의 추억은 다르다.

비록 천재적인 능력을 발휘해 범인을 잡는 것은 아니지만 감정의 꿈틀거리는 동선을 따라 호흡 하나 하나가 살아움직이는 사실감을 나타내고 있다.

그럼에 따라 관객들은 박두만과 서태윤의 감정선에 몸을 기대고 끝까지 함께 가게 되는 것이다.

관객들의 몰입도를 완벽하게 이끄는 연출과 연기의 절묘한 시너지 효과라는 생각이 든다.

영화가 주는 웃음은 80년대의 다양한 문화적 특성과 시대에 적응해버린 인간상들의 부딪힘을 통해 일어난다.

마치 수박을 잘라 한 부분을 정밀하게 들여다본 듯 영화에서 서로 더듬이를 내밀고 있는 이미지들은 너무나도 세밀하고 정교하게 얽혀져 있다.

아무튼 다시 또 언제 영화판에 이정도 잘 만들어진 스릴러가 나올지 모르지만 대단한 작품임에는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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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김판판  
  와우~ 너무 잘읽었습니다.  글솜씨가 부럽네요.
1 강도경  
  짝짝짝 좋은 글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