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으로의 영화와 동시대의 혁명 -

영화감상평

구원으로의 영화와 동시대의 혁명 - <너무 이른 / 너무 늦은>

5 Cinephile 1 203 1
“현대 영화에 부족한 것은 나무에 부는 바람이다.”
- 말년의 D.W. 그리피스


“한 마리의 곤충의 운명은 혁명보다 덜 중요하지 않다.”
- 로자 룩센부르크


"사건들을 크고 작음을 구별하지 않고 이야기하는 연대기 기술자는 일찍이 일어난 그 어떤 것도 역사에서 상실되어서는 안 된다는 이 중대한 진리를 고려한다. 과거를 완전히 소유하는 것은 복구되고 구제받은 인류에게만 가능하다는 것이 사실이다. 오직 회복된 인류만이 자기 과거의 어느 순간이든 불러들일 수 있을 것이다." - 발터 벤야민


한 영화의 모든 것을 잊어버리게 만드는 이미지가 엄습한 적이 있는가? <젊은 링컨>의 모든 것을 압도하는, 강가에서의 나무의 이미지. 그 흔들리는 정갈한, 순흙의 나무를? <움베르토 D>의 되돌아갈 수 없는 순백의 하녀. 그녀가 전차의 창가에서 멀어지는 모습을? 하스미가 <아파치 요새>에서 , 필름적 현실이라 명명할 정도로 강렬했던 헨리 폰다의 최후도 이와 다르지 않은 경험이었을 테다. 이런 전체를 압도하는, 심지어는 능가하는 부분의 개념은 문학에서는 후기 구조주의에 와서야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지만 (데리다의 셰익스피어 독해) 영화에 있어선 뤼미에르(최초의 영화감독/빛)에서부터 자명한 것이었다. 뤼미에르의 초기작, <어린 소녀와 그녀의 고양이>(1899)에서 고양이에게 밥을 주는 사건을 잊게 만드는, 그 나무의 흔들림은 최초의 관객들을 매료시켰다. 이는 아무런 역사가의 역사서에도 기록되지 않을, 현실에서는 사소한 사건이지만, 영화에 있어선 그 무엇보다도 질적인 것이다.


벤야민은 유물론적 역사가의 역할을 말하며 무엇보다도 이러한 사소한 사건 전체를 회억하는 것의 중요성을 말했다. 그 모든 과거가 회억돼 현재로, 지금으로 초점화돼 잊혀졌던 망자들이 전부 구원받는 심판의 날을 기다리는, 그러한 메시아주의로의 마르크스주의. 그러한 신화적 마르크스주의. (스트로브는 '신이라는 단어를 들을 때 웃는 자들은, 결코 영화를 만들지 못할 거야.'라고 말했다) <너무 이른/너무 늦은>은 이러한 메시아주의의 마르크스주의를 실현시킬 장소로의 영화를, 그 가능성을 탐색하는 영화이다.


<너무 이른/너무 늦은>에서 낭독되는 (과거의) 텍스트는 일차적으로 <너무 이른/너무 늦은>의 이미지와 만나며 우선 마르크스주의의 패배 / '너무 늦음'의 의미를 형상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은 과거의 굶주리던 사람들, 세상의 아픔을 구원하지 못했다. 그 시대의 역사가는 다만 무수한 익명의 이들을 숫자만으로 기록할뿐이었다. 그 과거의 증언은 그들이 모두 죽은 이후에 공허히 울릴 뿐이다. 그러나 이러한 아픔을 간직한 대지는, 유구한 세월 동안 그랬던 것처럼, 그 자신 위에 뿌리내린 푸르른 나무와 풀들을 바람에 내맡기며, 그저 그들이 흔들리도록 내비두며, 아름다움의 광채를 뿜어낼 뿐이다. 이 모순을 어찌해야 하는가? 이 아름다움은 심판의 날 이후의 이들에게만 허락되는 것이지, 투쟁과 혁명이 지금 당장 요구되는 현실에선 '너무 이른' 아름다움이 아닌가? 현실의 이미지를 온전히 담아내는 카메라를 근으로 하는 영화는 이러한 모순을 그 태생부터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이러한 모순은 뤼미에르부터, 포드, 혹스, 고다르 등의 거장들의 영화에서 항상 불현듯이, 그러나 무엇보다도 강렬하게 현시되는 것이었다. (포드의 <나의 계곡은 푸르렀다>에서의 녹수, 혹스의 <몽키 비지니스>에서의 진저 로저스의 춤, 고다르의 <미치광이 삐에로>에서의, '삶은 슬플 수 있어도, 그것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런 사소한 숏들, 이미지들은 아무 비평가의 언어에도 기록되지 않은 것이지만, 소수의 시네필의 머릿속에는 영화 그 자체보다도 강렬히 각인된 것들이다. <너무 이른/너무 늦은>에서의 낭독되는 텍스트들은 이런 텍스트(문자)를 범람하는 이미지라는 관념을 드러낸다. 이집트에서 혁명을 말하는 마르크스주의자의 텍스트는 이집트라는 그 장소의 이미지(세상 자체)에 희미해진다. 로자 룩센부르크의 말을 빌려, 지저귀는 새소리, 찰랑거리는 물결, 흔들리는 나무를 노래하지 않는 혁명은 도대체 어떤 혁명이란 말인가?


언제나 텍스트를 초월하는 이미지이기에, 역사를 초월하는 세상이기에, 역사가는 '너무 늦은'과 '너무 이른' 사이 어딘가 존재하는 '현재/세상' 그 자체를 발견하는, 그렇게해 과거의 잊혀진 자들을 회억해 부활시키는 과업을 수행해야 한다. 벤야민은 이 과업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유물론적 역사가는 (...) 역사적 연속성을 폭발시키고 거기서 하나의 특정한 시대를 끌어낸다. 그는 마찬가지로 시대의 연속성을 폭발시킴으로써 거기서 어떤 개인의 삶을 끌어낼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이 개인의 삶을 폭발시킴으로써 거기서 어떤 행적이나 작품을 끌어낼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유물론적 역사가는 어떻게 한 개인의 삶 전체가 그의 작품들 중 하나에, 그의 행적들 중 하나에 집약되어 있고, 어떻게 이 삶에 한 시대 전체가 집약되어 있으며, 어떻게 한 시대에 인간사 전체가 집약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는 데 성공할 것이다.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테제 17번 )

카메라는 언제나 자신이 마주하는 세상 그 자체를 담아내 현재로 응집시키기에, 이 과업을 수행하기에 적합한 매체이다. <너무 이른/너무 늦은>의 카메라에서 드러나는, 이 마주하는 현재/세상의 담아냄 이상의 그 세상과의 상호작용은 이 과업을 더욱 촉각적으로 분명하게 만든다. 카메라는 언제나 타자의 시선이다. 그 뒤에 감독의 존재 여부와 무관하게, 카메라가 찍어내는 이미지는 항상 미래의 관객들을 전제하기에, 카메라의 피사체들은 자신이 바라보아지고 있다는 점을 의식하게 된다. 공장에서 나오는 노동자들은 그렇기에 카메라를 바라보고, 길거리에 지나가던 한 아이는 카메라에게 "내 이름은 XX이다"라고 말을 건다. 그런데 이러한 카메라의(또한 우리의) 타자성은, 이집트를 침략했던 영국의 제국주의자들과 어떻게 다른 것인가?


이 점에 대한 답을 아래의 벤야민의 텍스트를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고인이 된 세대들과 우리 자신이 속하는 세대 사이에 신비한 약속이 있다. 우리는 지상에서 기다려졌던 사람들이다. 사실은 우리 이전의 모든 인간 무리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메시아적 힘의 조각이 주어져 있는 것이다. (벤야민,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 테제 2번)

카메라를 통해 보여지는 과거의 사람들, 그들과 우리 사이엔 (메시아적 힘의 조각의 근원이 되는) 인간적인 유대감 - 마르크스주의자라면 이를 세계주의의 가능성이라고 이해할 것이다 -이 존재한다. 카메라 앞에서 장난치는 아이들, 자신의 이름을 카메라에게 말해주는 그런 시도는 자신이 잊혀지지 않고 후대에 기억되기/부활하기를 원하는, 메시아주의에 대한 믿음을 전제한다. 그렇게 잊혀지지 않길 원하는 욕망과, 잊지 않으려 기억하는 카메라의 정치성에서, 카메라의 타자성은 타자들(이쯤에서는 우리들이라 불러야 마땅할 것이다)의 구원을 기도하는 혁명의 무기로 변모하게 된다.


<너무 이른/너무 늦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숏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하늘을 바라보는 패닝일 것이다. 이 아름다운 숏에서 앞서 말했던 모든 의미들이 변주되고 확장되는 텍스트(의미)의 다층성도 느껴지지만, 난 무엇보다도 나무를 올려다보는 그 행위의 숭고함. 그 엄숙함이 동시대적인 혁명을 얘기하는 데 있어 필수적인 태도라고 생각한다. 벤야민의 말처럼 마르크스주의는 결국 유물론적인 메시아주의이다. 그 혁명을, 그 구원을 숭고히 여기고, 진심으로 믿는 태도를 간직하지 않고는, (스트로브의 말을 다시 인용해) 결코 영화를 만들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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