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의 살 길을 찍어준 고성능 네비게이션

영화감상평

<추격자> 한국영화의 살 길을 찍어준 고성능 네비게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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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뿌연 연기를 토해내며 괴롭게 타들어가는 국보 1호의 모습은 우리 사는 세상이 영화보다도 더 잔혹하고 비현실적이란 명백한 증거였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니까, 관객의 재미를 위해 만들어진 픽션에 불과하니까, 제 아무리 참담한 일이라도 얼마든지 가능할 수 있다. 어차피 스크롤 올라가고 극장에 불 켜지면 사라질 테니까.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현실은 영화를 능가하는, 그야말로 살벌한 엽기와 부조리가 휘몰아치는 허허벌판이다. 멀쩡해야할 한강다리와 백화점이 무너졌고 변변한 소방대비책도 없이 만든 지하철에서 셀 수 없는 무고한 시민들이 억울하게 죽었다. 돈 때문에 부모와 가족을 몰살한 존속살인자, 한 도시를 패닉에 몰아넣은 부녀자 연쇄살인범, 상습적으로 아이들을 성추행하거나 납치하는 파렴치한들이 태연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리고 ‘다시는’ ‘결코’ 따위의 사탕발림과 책임 떠넘기기의 마녀사냥만 되풀이될 뿐, 본질을 외면하는 위정자들의 한심한 작태와 쇳덩어리라도 녹을 듯이 끓어올랐다가 금세 차가워지고 마는 우리들의 무관심 또한 별 수 없는 현실의 일부분이다.


나홍진 감독의 영화 <추격자>는 이런 현실로부터 말문을 연다. 영화보다 더 비현실적이고 냉혹하며 추악하지만 분명히 현실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바로 그 ‘현실’.


시작부터 연쇄살인범의 실체를 확연히 드러내는 <추격자>는 범죄스릴러처럼 보이지만 현실풍자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범인을 밝혀내고 잡으려는 얼개가 아니라 뻔히 눈앞에 까발려 놓은 범인을 보고도 못 잡는 아이러니를 신랄하게 비웃고 있는 것. (영화 포스터의 카피처럼) 경찰도 검찰도 아닌 ‘쓰레기’ 3류 인생을 전면에 내세운 안티히어로 설정 역시 사회성의 농도가 짙다. 공권력이 영장과 여론 운운하며 우왕좌왕 할 때 속이 다 시원한 주먹질로 문제를 풀어가는 퇴출경찰 엄중호(김윤석 분)는 시종일관 영화를 이끄는 힘 있는 캐릭터지만, 일반 서민의 시선에는 약한 자의 피를 빠는 또 하나의 악인에 불과하다. 애당초 감독은 약자를 보호하고 악인을 잡겠다는 정의로운 감상 따위로 그려내기엔 이 사회의 표면온도가 너무 차갑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영화가 끝나도 쉽게 자리를 뜰 수 없게 만든 분노와 당혹함은 이런 서릿발 같은 냉소에 마음 한 구석을 제대로 베인 탓도 있을 것이고, 다시 돌아 가야할 현실이 악몽 같았던 영화 속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가득 찬 객석은 꽤 많은 스크롤이 올라갈 때까지 비워지지 않았고 흐르는 침묵 위로 공포가 엄습했다. 범죄스릴러라는 정과 망치로 냉혹한 현실의 정곡을 꿰뚫은 <추격자>는 완벽에 가까운 블랙코미디의 성찬을 이뤘다. 관객의 시선과 마음을 모두 빨아들여 영화가 끝날 때까지 숨이 턱에 차도록 몰아붙인 저력은 이 영화가 데뷔작이란 감독의 이력만큼이나 놀라운 수준이다. 전 국민이 기억하는 사건을 모티브로 썼기에 자칫 범죄스릴러라는 장르적 한계에 국한될 수 있었던 영화가 영리하게 업그레이드된 것은 치밀하게 조합된 캐릭터와 설정들 덕이기도 하지만, 관객의 마음을 움직인 진정한 힘은 차가운 영화의 이면에 숨겨진 끈끈한 사람냄새 덕이었다. 사람을 토막 내는 영화에 숨겨진 끈끈한 사람냄새, 비범무쌍한 <추격자>의 나홍진 감독이 이뤄낸 성과 중에 가장 값진 것으로 보인다.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을 연쇄살인범의 소굴에 가둬놓고 잔인하게 몰아세운다. 등장하는 어떤 캐릭터에게도 마음을 줄 수 없는 불편하고 무거운 시간이 이어진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또 하나의 악인 엄중호의 시선을 따라 자리를 박차고 어두운 골목을 달릴 수 있게 되더니, 그의 처절한 울부짖음이 허공을 가를 때에는 마음속에도 같은 톤의 간절한 울림이 전해졌다. 그 소리는 얼어붙은 현실 아래에 아직 따뜻한 사람의 마음이 살아있길 바라는 우리 모두의 소망이고, 철저하게 냉소로 가려진 영화가 실은 내내 품고 있었던 사람에 대한 정을 터뜨리는 소리기도 했다.


연쇄살인범을 쫓는 또 하나의 악인, 약한 자의 피를 빨고 사는 흡혈귀 같은 엄중호가 결국 따뜻한 피가 흐르는 사람임을 투영하는 과정은 엄중호와 연쇄살인범 지영민의 대결구도와 함께 영화의 가장 중요한 축을 이룬다. 동기를 부여함에 있어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을뿐더러, 대결구도의 팽팽한 긴장감을 방해하지 않는 교묘하고 적절한 타이밍을 맞추고 있다. 더구나 첫 주연으로 나선 배우 김윤석의 혼이 담긴 연기는 선과 악을 동시에 담고 있어야 할 엄중호의 얼굴을 입체적으로 완성하며 영화의 힘을 배가시켰다. 오기와 증오 가득한 눈빛 아래 풍파에 찌들고 지친 굴곡의 그림자는 살면서 한 번 쯤은 마주친 적이 있는 것 같은, 우리 주변에서 사는 엄중호 자체였다.


나홍진 감독과 스텝들, 배우 김윤석과 하정우를 비롯한 연기자들, 그리고 수많은 무명의 제작진들이 이뤄낸 <추격자>는 단순한 웰메이드 결과물이 아닌, 한국영화의 살 길을 찍어준 고성능 네비게이션이란 의미를 부여해야 할 것이다. 엉성한 이야기와 지겨운 우려먹기는 더 이상 값비싼 ‘얼굴’로 때워지지 않는다. 이미 오랫동안 관객들에 의해 입증되고 있건만, 개봉을 앞둔 영화리스트엔 기대감마저 들지 않는 제목들이 수두룩하다. 엄청난 돈을 들여도 손익분기 넘기기 힘들다는 푸념과 동시에 제작자들의 뇌리에 깊게 남아야 하는 고민일 것이다. 또한 한 때 한국영화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것으로 생각되던 몇몇 배우들이 연거푸 졸작에 체력을 소진하며 연기력의 예봉을 잃는 모습도 아쉬운 일이다. 출연하는 모든 작품이 최고의 걸작이 될 순 없겠지만, 몸값이 높아지면서 처녀작 시절에 보여줬던 에너지를 잃어가는 현상을 보면 ‘예술은 헝그리정신’이란 말이 그저 막연한 속설은 아닌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추격자>의 두 주연 김윤석과 하정우의 몸값이 너무 높아지지 않길 기대하는 것은 역시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일까.


40년 가까이 살아보니 살면 살수록 힘들고 무서운 것이 세상이다. 영화 한 편 봤다고 별로 달라질 것이 없는 무덤덤한 나이, 하지만 <추격자>의 뜨거운 울림은 오래도록 남아서 영화보다 더 잔혹한 현실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를 줄 것만 같다. 아니, 그렇게 되길 간절하게 바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용기는 다름 아닌 따뜻한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 엄중호처럼 죽기살기로 누군가를 위해 달리지는 못하더라도 전보다는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 영화 <추격자>가 내게 남긴 가장 고마운 선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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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Comments
1 강형윤  
아주 멋진 영화평이네요.  저도 이영화보고 상당한 시간동안 많은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 우리사회 헛점과 냉혹함 그리고 이기적이고 강자(?)만을 위한 사회
시스템이 이러한 악어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10 사라만두  
락님!! 정말 간만에 평 남기시네요.
요번 휴무에 보러 갈랬는데 이런 글 봤으니
더더욱 안 갈수가 없겠네요.
사그라들다 못해 꺼질 것만 같던 우리 영화계의 불씨가
요즘 들어 가끔 불꽃을 튀기고 있으니 기분이 좋네요^^
1 김대환  
평 정말 멋지네요.
자주 이런 평을 볼 수 있는 영화가 나왔으면 하네요
1 흰곰  
락님 글은 언제나 감동입니다...
영화도 좋지만 글은 더 좋네요....
1 낭열자  
좀 전에 보구 왔는데 정말 영화 잘 만들었더군요
두 배우의 나무랄데 없는 열연과 감독의 연출력은 정말 환상적이었읍니다
앞으로 추격자와 같은 정말 잘 만든 영활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