움직이면 죽는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

영화감상평

움직이면 죽는다 「에너미 앳 더 게이트」

G ROCK 9 2568 0


최첨단 자동화 시스템이 자동으로 적을 탐지해내고, 버튼 하나 누르는 것으로 수십만의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전쟁시대. 현대의 전쟁은 적어도 근대 역사상 가장 커다란 전쟁이었다는 2차 세계대전의 양상과는 사뭇 차원이 다를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현대 전쟁 수준에 비하면) 후진성을 면치 못하는 2차 세계대전의 모습을 담은 영화를 보면서 전쟁이 인간에게 남기는 심각한 피해와 공포, 평화의 소중함을 찾아내려 애쓴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대표적인 예다. 캠코더를 들고 촬영장을 달리며 필름에 담았다는, 역사적인 초반 전투장면을 보면서 몸서리 치지 않은 사람이라면 대단한 강심장일 것이다. 총알이 몸을 꿰뚫고, 폭탄 파편으로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섬뜩한 리얼리즘은, 그러나 이미 반세기 전의 모습이다.

03.jpg장 자크 아노.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출연하는 배우로 영화를 고르고 나름대로 영화를 봤다고 거드름을 피우면서는 감독을 살폈다. 사실 그런 식의 영화 고르기가 얼마나 편협한 자기 척도를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지만, 삶을 모르고 필름만 알았던 시절에는, 시비 걸만한 꼬투리만 찾아내던 시절에는,… 그랬었다. 철저하게 감독을 따지고, 철학을 따지고, 테크놀러지와 독립성 여부를 따지면서. 그렇다고 아직 인생을 아는 것도 아니지만.
아무튼 뤽 베송이란 이름과 더불어 세계에서 제일 잘 팔리는 프랑스 영화감독이 독일에서 제작하는 2차 세계대전 영화를 만들었다고 하니, 일단 그 배경 자체가 재미있다. 거기에 주드 로나 에드 해리스, 미이라(mummy) 시리즈의 히로인 레이첼 와이즈 같은 정통 헐리웃 배우들이 주연이라니. 역시 영화산업도 다국적이 되었다는 말 자체가 시절을 위배하는 것일까? 결론적으로 지겹도록 봐왔던 「영웅 만들기」를 그나마 신선하고 긴장감 넘치게 끌고 갈 수 있었던 것은 그런 다국적 인물들의 면면이 한 몫 단단히 하지 않았나 싶다.
적어도 서른을 넘긴 사람이어야 쉽게 기억하는 「대탈주」, 「나바론의 요새」 같은 영화에서부터 같은 소재를 다룬 영화로 근래의「진주만」이나 「라이언 일병 구하기」등의 작품들은 2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재의 동일성과 더불어, 전승국측이 항상 주연이자 선한 쪽에 서있다는 또 하나의 동일성이 존재한다. 즐겁게 웃으며 돌아가라는 해피엔딩 이거나 주인공의 장렬한 죽음과 더불어 숭고한 정신이 남는 다는 투의 마무리 이거나, 어쨌든 주연은 미국이나 영국 같은 전승국측이었고 악역은 항상 패전국인 독일이나 일본이 도맡아 왔다. 적어도 반세기동안 만들어진 2차 대전 영화들의 거의 모든 배열이 그렇다 보니 자연히 우리는 질리고 만다.「진주만」을 도마에 올려놓고 지겨운 영웅 만들기라는 등 끊임없는 미국 우월주의 표상이라는 등 말들도 참 많았지만, 이런 식의 논란이 전쟁영화의 오래되고 뻔한 형식에 질린 관객들의 푸념이라고 생각한다면 「풀 메탈 자켓」이나 「씬 레드라인」처럼 전혀 색다른 전쟁 해석에 대해 평론가와 관객들이 열광하는 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적어도 무조건 죽이고 터뜨려버리는 원초적인 화면과 소리를 즐기는 것이 아니라면.

02.jpg「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선택은 여러 가지로 다채롭고 흥미를 유발한다. 전승국이긴 하지만 주체적으로 그려져 왔던 미/영측을 벗어나 소련이 주체라는 것, 억지로 무겁고 버거운 전쟁에 대한 철학을 들이대기 보다는 전쟁 중 벌어진 실화를 바탕으로 저격수의 자존심을 건 대결을 내세우고 있다는 것. 특히 후자의 선택은 자칫 어설프고 우스꽝스러운 또 하나의 전쟁영웅을 탄생시키는 것을 상당부분 억제하고 마지막까지 진지한 시선들을 스크린으로 유도하는데 큰 기여를 했다는 느낌이다. 후반부에 행정장교 다닐로프가 저격수 바실리에게 중얼거리던, 말도 안되게 어설픈 이데올로기성 대사들이 허탈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것 말고는 무난하게 재미있고 박진감 넘친다. 어차피 승리한 편에 서서 대단한 영웅을 만들어 내거나, 이긴 자도 진 자도 없는 허탈한 전쟁의 폐허를 그려내는 인권주의적 시각이 아니라면 차라리「에너미 엣 더 게이트」의 코드가 더 효과적이 아닐까?
거대한 빌딩이나 아파트를 지으려면 먼저 토목공사를 시작해야 한다. 굴삭기와 로우더로 땅을 파내고 거대한 말뚝을 박는다. 반세기전의 전쟁도 이와 비슷한 형태였다. 도시 외곽에서 대포를 쏴대고 하늘에서는 융단폭격이 계속된다. 그리고 탱크와 장갑차가 밀어닥친다. 튕기는 총알보다 값어치 없는 젊은 남자들의 주검이 널린 스탈린그라드. 처참하고 소란스러운 폐허 사이로 번득이는 눈 빛과 총알 한 발. 오래 참는 자가 살아 남고 먼저 움직이는 자가 죽는다. 시골 마을 양치기 출신의 소련군 저격수 바실리와 차갑게 푸른 눈을 가진 독일군 저격장교 코니크의 대결 구도는 국가와 이념이 대결하는 전쟁이 아닌, 마카로니 웨스턴이나 사무라이 식의 대결이었고 비겁하거나 비열하지 않은 정정당당한 결투로 비춰진다. 당연히 악역이어야 할 독일 장교(애드 해리스분)는 차갑고 깊은 푸른 눈 속에 따뜻한 인간미를 뿜어내고, 엉겁결에 소련군의 희망이 되어버린 바실리(주드 로분)는 냉철한 저격수의 이미지를 느끼기 힘들 정도로 인간적이다. 역사상 가장 지루한 소모전과 살상이 이어졌다지만 「에너미 엣 더 게이트」는 교묘히 무거운 전쟁에서 벗어나 마지막까지 결투에 대한 결말을 궁금하게 만들면서 시선을 이끈다. 심지어 영화를 다 보고 난 후에 "이 영화가 정말 전쟁영화야?" 라는 의구심이 들 정도로.

01.jpg새로운 방법으로 전쟁을 다루고, 다국적인 인물 코드가 새롭고, 무난하게 재미있고 박진감 넘치는 영화였지만, 시간이 흐르면 흥미로운「결투」만이 남고 말 것 같은 서운한 마음이다. 의미 없는 죽음이 널 부러진 살벌한 전쟁터와 묘하게 어울리는 섬세한 풍광을 담은 필름은 「티벳에서의 7년」, 「베어」같은 감독의 전작처럼 여전히 훌륭하고, 마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연상시키는 초반 전투장면은 맹목적인 이데올로기에 몰려 죽음 앞에선 젊은 군상들의 모습을 제대로 잡아내기도 했지만 애드 해리스 말고는 제대로 기억되지 못할 주인공들의 스케치는 드라마에 약하다는 감독의 영원한 아킬레스건이 아닐지. 모두가 환영하고 모두가 열광하는「절대영화」란 없겠지만…

태권브이, 황금날개, 이소룡부터 시작했으니 이십년 하고도 몇 해가 지났다.
영화를 이루고 있는 것들에서 벗어나 영화를 만나고 싶어 발버둥친지도 꽤 되는 것 같다. 나무를 보는 시각이 아니라 숲을 보는 시각으로, 물을 보는 시각이 아니라 강과 바다를 보는 시각으로. 진지하게 몰입하면서 영화를 보고 싶다.
하지만 여전히 쉽게 빠져들지 못하고 머뭇거리거나 때로는 자막이 올라갈 때까지 제대로 다가가지 못하는 이 서성거림이란. 아직도 마음에 자리잡은 편견의 척도를 하루바삐 버리고, 보기로 마음먹은 영화는 시간지체 하지 말고 봐야겠다고 혼자 투덜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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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Comments
1 김기평  
전쟁의 참상에서 벗어난 두 주인공의 대결.
 대작이라지만 뭔가가 빠진듯한 영화.
 값싼 자국의 애국심을 자극하지만 그래도 전쟁이란 수많은 젊은이들을
 소모품처럼 사용한다는 것을 새삼 일깨워준 라이언 일병 구하기가
 차라리 나을듯.^^
1 김미진  
라이언 일병보다 에너미 엣더 게이트가 더 나은것 같은데.저랑 생각이 틀리군요...
 
 
1 정영화  
김기평님의 의견을 에너미 엣 더 게이트에서두 느낄수 있었습니다 .. 총도 쥐어지지 않은 상황에서 앞으로 돌격해야 하는 .. 이데올로기에 희생되는 수많은 러시아의 젊은이들... 무엇이 낫다기보단 .. 두 작품 다 좋은거 같아요 ..
G 루카센  
이영화는 한마디루 압축됍니다 ...거대한 실패작....한국영화루 치면 "무사" 꼴 난영화
1 현호  
거대한 실패작이라기 보단 숨겨진 대작이라고 보는 것이 나은것 같은 데..
 영화보는 내내 긴장감을 늦출수 없는 작품...
1 홍보현  
신문광고보고 무작정 극장가서본영화..친구는2시간내내 지루하다고하지만..저에겐 2시간동안 최고의긴장감이었습니다..
1 류병삼  
이 영화가 개봉되기전 러시아에서 반발이 심했다고 합니다 러시아군을 멍청하게 그려 놓았다는 이유죠 사실 독일을 막은 것은 러시아군입니다 미국의 뒤에서 잔머리로
 이익을 챙겼죠 초반전투씬에서 한명에게 라이플을 다른 한명에게 실탄을 주는 장면이 가장 기억에 남는군요 기억에 오래 남는 영화입니다
G 이창섭  
소련이 미국을 위해서 싸운건 아니죠. 지면 소련은 완전 아작. 특히, 나치즘과 공산주의는 상극. 머, 이해 관계상 영국, 미국 애덜이 소련 지원하느라고 바다로 선단 띠웠다가, 유보트등 때문에 초반에 엄창 깨짐니다. 그래서 요 영화에서처럼 보급 부족으로 한동안 엄청 밀립니다. 이 영화 재미나게 봤슴돠~. 팽팽한 듀얼.. 특히나 우수에 찬 강적. 영웅문에 서독 같다고 할까요. 기존 질서에 반감을 갖고 있지만 예절맨이었던 서도크... 커피와 담배와 음악을 사랑하는 그래서 전쟁을 혐오할 것 같지만 최고의 킬러인 독일 장교. 오빠 노무 멋지샤~ ㅡ,.ㅡ;; (요즘 인터넷 방송을 너무 마니 듣는다는...)
1 이규철  
방금 이 영화를 봤는데요...두시간동안 저에게 긴장감을 주면서 마음놓고 보지않게 만든 영화 더군요....숨막히는 두 스나이퍼들의 대결속에서 두 나라의 운명이 그려진게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고...아무튼 재밌게 봤습니다....마지막에 바실리의 총이 스탈린 그라드 박물관에 있다는데...전쟁이 그려낸 영웅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