락(樂)은 죽지 않아

영화감상평

<즐거운 인생> 락(樂)은 죽지 않아

1 ROCK 3 3186 7
F5463-03.jpg

1984년 늦여름 어느 날, 천금 같은 방학의 마지막 며칠을 고작 낮잠으로 때워야 했던 지루한 오후였다. 가만 누웠어도 흥건하게 땀방울이 맺히는 무더위의 위세에 완전히 전의 상실, 납작하게 엎드려 이리저리 라디오 채널을 돌리다가 다시 잠이 들려는데 모기처럼 웽웽거리던 라디오에서 예사롭지 않은 노래가 들리기 시작했다. 느린 마이너 코드의 전자기타 반주에 맞춰 천천히 노래하는 목소리는 남자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청아하고 높은 음색이었고, 소름이 확 돋을 정도로 신경을 자극하며 단번에 졸음을 날려버렸다. 그리고 이내 웅장한 전자기타 반주의 울림과 더불어 노래는 처절하게 폭발했다.
' Still loving you. Still loving you. Still loving you.'
쭈쭈바 한 개를 통째로 원샷한 충격이 앞이마를 관통해 척추를 타고 온몸에 흘러 괄약근을 휘몰아쳤다. 그 충격파는 처음으로 말초신경이 이성에 반응했을 때보다 더 강렬하고 짜릿한 추억으로 남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1984년 늦여름 어느 날, 팝스다이얼 김광한 아저씨의 친절한 소개로 스콜피언스의 'Still loving you'를 들으면서, 나는 락(Rock)을 만나게 되었다.

지나고 나면, 떠나고 나면 비로소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는지, 얼마나 소중한 시간이었는지, 당시에는 깨닫지 못하고 쉽게 지나쳤다가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것이 별 수 없는 사람이다. 하지만 후회가 아무리 빨라도 결국 되돌릴 수 없는 인생, 훗날 오늘을 후회하지 않으려면 만사에 감사하며 열심히 살아야하건만, 이 역시 쉽지 않은 것이 별 수 없는 사람인가보다.
20대를 지나 30대가 되었던 것이 바로 몇 시간 전 같은데, 어느덧 마흔 살이란 나이가 목전에 다가왔고, 나만 믿고 사는 가족들을 위해 죽기 살기로 뛰어야 하는 현실이다. 부끄러울 것도 없고 원망스럽지도 않지만, 아무 걱정 없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었던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 짠한 후회가 밀려들 때가 있다. 이런 후회는 순식간에 현실과의 괴리를 만들고, 한 동안 먼 산 바라보며 한숨만 쉬다가 기어이 퇴근길에 소주 한 병을 비우게 한다. 이런 향수병의 발동이 현실에 대한 태만에서 붉어진 일탈 욕구일지도 모른다. 다만, 500원짜리 커피 한잔이면 비틀즈와 레드 제플린, 핑크 플로이드와 지미 헨드릭스를 몇 시간이고 들을 수 있었던 음악다방의 낭만이 그리움의 실체는 아니다. 막연하게나마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음에도, 되고 싶었던 것이 있었음에도 제대로 힘 한 번 못써보고 쉽사리 포기했던 20여 년 전의 나를 탓하고 또 탓하는 것이다. 이제 와서 되돌릴 수 없기에, 이제라도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살겠다고 모든 현실을 집어던질 수 없기 때문에, 넘어가는 소주 한 잔은 무척이나 쓰다. 마흔 언저리의 가장치고 누군들 그렇지 않을까만.

이준익 감독의 신작 <즐거운 인생>은 일면식도 없는 내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만든 영화인 듯하다. 싸구려 선술집에서 얼큰하게 소주 몇 병 비우며 살아가는 얘기를 나눈 적도 없건만, 구구절절 오장육부를 헤집으며 답답하게 얹혀 있던 것들을 통쾌하게 뚫어준다. 나도, 우리들도, 한 번 쯤은 그렇게 속 시원하게 질러보고 싶었던 것이다. 문득 거울 앞에 서보니 날렵했던 청춘은 어느새 사라지고, 올챙이처럼 튀어나온 뱃살과 새로 난 흰 머리가 눈물겹게 서러울망정, 언젠가 한 번은 그렇게 미친 듯이 달려보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2시간의 일장춘몽이 끝나고 극장에 불이 들어오면 여전히 변함없는 현실이었지만, 극중 활화산 밴드의 따뜻하고 끈끈한 재기(再起)는 넘칠 만큼 충분한 대리만족을 선사했다. 락이면 어떻고 뽕짝이면 대수였을까. 귀에 대고 말하지 않고 사람 가슴에 말할 줄 아는 이준익 감독이라면, 락 밴드 대신 반짝이 의상을 입고 미러볼 돌아가는 무대에서 뽕짝을 불러댔어도 가슴에 남는 울림은 같았을 것이다.
‘이봐, 힘내라구. 우리 인생이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잖아!’

이준익 감독의 영화는 갈수록 소박해진다. 화려한 수식어도, 현란한 기교도 없는 차분한 톤으로 사람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오히려 반향은 갈수록 깊고 오래 남는다. 이런 발전은 이야기의 주체인 사람을 단지 보통사람으로 보는 시선에서 비롯된다.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굳이 멋지게 부풀리거나 짙은 화장을 덧칠하지 않더라도 보통사람들이 품은 이야기는 충분히 드라마틱하고 영화적이란 것을 이 영악한 감독은 간파하고 있는 것이다. 극중 활화산 멤버들의 통쾌한 일탈 과정이 다소의 상황적 이물감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꾸는 캐릭터라도 두 발은 땅을 딛고 있는, 엄연한 보통사람이란 것. 무척 쉽고 간단한 얘기지만 이런 융합을 자연스런 결과물로 연이어 만들어내는 감독은 흔치 않아 보인다.
또한 전작 <라디오 스타>에 비해 동선이 많아진 <즐거운 인생>을 산만하지 않게 얽어낸 솜씨와 탁월한 설정들, - 신예 장근석의 투입은 활화산 밴드나 영화 <즐거운 인생> 모두에게 최고의 선택이었고, ‘스마일 중고차’나 홍대 클럽 등 공간설정도 영화와 꼭 맞게 안정적이다. - 시기적절하게 쓰이는 훌륭한 영화음악들, 틀로 찍어낸 듯 캐릭터를 그려낸 실력파 배우들의 캐스팅까지, 칭찬할 것만 가득한 <즐거운 인생>이다.

락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Rock will never die)
40년 가까이 그룹 스콜피언스를 이끌어온 기타리스트 루돌프 쉥커의 동생이자, 플라잉 브이 기타의 명인으로 UFO와 MSG에서 주옥같은 명곡들을 남긴 마이클 쉥커가 만든 노래 제목이다. 영화 <즐거운 인생>을 보고나서 이 노래 제목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이전처럼 지난 시절을 자책하면서 소주잔만 기울일 것이 아니라 시간 나면 오랫동안 못 들었던 락도 좀 듣고, 소홀했던 플래시 애니메이션도 공부하고, 가끔이라도 저녁에 다시 인터넷 방송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했다. 당장에 다 때려치우고 하고 싶은 일만 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고 인생이다. 하지만 그나마 꿈도 꾸지 못하는 삶이라면 얼마나 고단할까. 죽으면 할 수 없는 일들, 하고 싶은 일과 생활을 위해서 억지로 해야만 하는 일도 다 포함해서 내 인생이고 내 삶이다. 살아있기에 즐거운 인생, 락(樂)은 절대 죽지 않을 것이다.

지친 가슴에 시원한 단비처럼, 오랜 친구처럼 다정하고 따뜻하게 충고해준 영화<즐거운 인생>에게 진심으로 고마운 박수를 보낸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3 Comments
10 사라만두  
  연극을 접고 사회 생활을 하던 친구 녀석이

왕의 남자를 보더니 다시 연극계로 발을 돌리는걸 보고

이준익 감독의 스토리 텔링엔 뭔가 힘이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들을 찾아보게 되더군요.

이번에 나오는 즐거운 인생도 타이틀부터 그의 모토와 맞아 떨어지는게

보기 전인데도 기대일발에 흥분을 감출수 없네요.

한창 락에 빠져사는 요즘인지라,

인생 선배님의 회고록을 보는 기분이라,

나도 언젠가 큰 무리없이 모험않고 저 길을 가겠지란 생각에

더 와닿고 처연해져 숙연한 기분이 듭니다.

마지막 말씀처럼 가족이란 테두리를 이끌어가기 위해

어쩔수 없이 하고 있는 일이라 할지라도

내 인생이란 범주 안에 포함된다는 것,

이 말 명심하며 주어진 하루하루 만족하며 살아가는

젊음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영화란.. 이래서 좋은게 아닐까요?
1 ROCK  
  그럼요. 영화 좋지요. ^^

꼭 즐거운 인생 되시길...^^
1 이은범  
  글이 정말 맛깔스럽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