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라 설국열차
더러운 3등칸, 아니 무등칸. 무존재. 비존재. 아니 그 이하들의 칸, 꼬리칸.
꼬리칸에서 시작된 영화 설국열차.
사실 시작은 좀 아쉽다.
사람들이 왜 설국열차를 타야만했는지 설명해주는 부분이 있었더라면
영화를 받아들이는 데 좀더 많은 도움이 있었을텐데 말이다.
그렇더라도 꼬리칸의 사연이 중간에라도 좀 나와줬다면 했는데
결국 대사로 넘어가버린 데다 그것마저도 충분치 못했다.
꼬리칸으로 달려드는 비존재, 천한 것(?)들의 절규가 영화의 시작이었다면 어땠을까.
아무튼 달린다, 설국열차.
합성프로틴에 질리고 무장한 병력들 틈에서 노란 가운같은 걸 걸치고 나타난 여인에게
생떼같은 아이들이 납치되는 지옥을 겪는 것도 죽음만큼 고통스러운 그들 틈에서
강력한 반기의 기운이 감돈다.
열차 제국 리더 윌포드는 누구에게나 제 자리란 게 있는 건데
그걸 이탈하면 무질서가 초래되고 그 무질서는 그걸 초래한 사람들에게
죽음과 불행이라는 결과로 돌아갈뿐이라고 역설하며 제 자리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윌포드에 반기를 든 꼬리칸 피플들에게 그 말은 전의를 자극하는 '로고스'일뿐이다.
모두 다 죽이자, 엎어버리자, 우리도 인간이다!!
한때 혁명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때가 있었다.
기존 질서와 체계로는 도저히 현실이 요구하는 솔루션을 만들어낼 수 없으니
현실을 리셋,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게 필요한 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동의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혁명은 리셋의 성공을 보장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는
역설적으로 좀더 현실에 충실하게 됐다.
사람의 정신이 미완성이면 리셋은 성공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거다.
혁명의 혁명을 해도, 수십만 아니 수백만명이 죽어도
사람의 정신이 미완성, 혁명을 이루지 못하면 현실의 혁명은 성공할지라도
리셋은 실패할 거란 걸 알아버린 탓이다.
탐욕,
인간 내면에 끈덕지게 붙어있는 본성,
그 탐욕이라는 본성을 이성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게 될 때까지
이 현실에서 더 끈덕지게 떼어내지 못한다면
혁명은 피만 먹고 자신은 아무 것도 내놓지 않으려 할 것이 자명하다.
진짜 문제는 차별, 압박, 강요된 고통이 아니라
사람들의 정신세계 속에 이미 있다는 걸 빨리 깨달을 수록
현실은 더 빠르게 달라질 거고 그럴 때 혁명은 필요한 솔루션,
리셋은 가능한 동작이 될 거다.
열차의 중단이
열차밖에도 살아있는 생물이 있다는 걸 가르쳐준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