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란티노의 데드 포인트

영화감상평

<데쓰 프루프> 타란티노의 데드 포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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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달리기를 하다보면 갑자기 호흡이 곤란해지면서 심한 피로와 근육통이 밀려와 더 이상 달릴 수 없을 것만 같은 순간이 있다. 일정 거리 이상을 달려야만 겪게 되는 이 데드 포인트(Dead point)는 더 먼 거리를 달리기 위한 한계점으로, 이 시기를 극복하면 고통과 피로가 사라지고 편안하게 달릴 수 있는 세컨드 윈드(Second wind) 상태에 이르게 된다. 오래 달리기 뿐만 아닌 모든 유산소 운동은 사점(Dead point)을 극복해야만 운동효과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데, 역시 날로 먹을 것이 하나도 없는 짜디짠 세상이다. 숨차고 괴로워도 참고 견뎌내란 이야기다. 데드 포인트.


관객에게 흥미를 줄 수 있다면 무슨 짓이라도 하겠다는 쿠엔틴 타란티노의 공언은 지금까지 충실히 지켜져 왔고, 신작 <데쓰 프루프>에서도 기성영화의 공식과 질서를 대놓고 조롱하는 흥미로운 시도들은 여전히 눈길을 사로잡는 힘이 있다. 틀을 깨는 발칙한 발상, 익숙하지만 전에 볼 수 없었던 캐릭터, 기괴하고 번득이는 재담들, 설정들, 명백하게 ‘타란티노표’ 영화로 의심할 여지가 없는 <데쓰 프루프>. 하지만 짝퉁으로 의심할 수 없는 이 진품 타란티노는 유쾌한 끝에다 묘한 뒷맛을 남겨둔다. 쉽게 알아낼 수 없는 뒷맛의 실체, 그것은 다름 아닌 ‘너무나 익숙한 타란티노’였다. 꽤 오래전부터 즐겨오던 그의 화법, 수법, 스타일, 타란티노 아니면 만들 수 없는 칵테일 한 잔에 나는 이미 몽롱하게 취해있었던 것이다. 변함없이 훌륭하지만 이미 너무 익숙한 맛, 아무래도 타란티노에게 데드 포인트가 닥친 모양이다.


70~80년대에 B급 영화 두 편을 동시 상영하던 극장을 의미하는 ‘그라인드하우스(Grindhouse) 프로젝트'로 다시 의기투합한 죽마고우 타란티노와 로드리게즈는 각각 <데쓰 프루프>와 <플래닛 테러>를 만들고 4편의 가짜 예고편을 끼워 넣어 3시간이 넘는 동시상영 영화 <그라인드하우스>를 완성했다. 이 괴짜들의 B급 영화 오마주는 굳이 전편을 보지 않더라도 먼저 개봉한 <데쓰 푸르프>만으로 철철 넘치도록 알 수 있다. 특히 70년대 판타지를 잊지 못하는 타란티노에겐 이런 프로젝트가 더없이 즐거운 작업이었을 것, <데쓰 프루프>는 일필휘지로 B급 영화 찬송을 유감없이 휘갈긴다. 그러나 이런 거침없는 타란티노의 만담은 이미 만들어진 ’타란티노표‘ 범주 안에 모두 들어있다. 70년대 B급 영화와 TV 드라마를 표방한 스타일, 캐릭터들의 신변잡기를 장황한 텍스트로 나열하고 풍자와 단서를 부여하는 해학, 폭력의 해프닝에서 승화된 카타르시스,’심각할 것 뭐 있어? 그냥 재밌으면 되지!‘ 라는 마지막 느낌표까지, 모두 다 예전 타란티노와 다를 것이 없다. 물론, 이런 익숙함이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기존정서를 통쾌하게 뒤집는 자유로움에서 시작한 타란티노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틀에 갇혀 있다는 느낌은 아이러니한 뒷맛을 남긴다. 더구나 스스로 만든 틀 속이라면, 친숙함이 식상함으로 쉽게 변질될 수도 있지 않을까?


쿠엔틴 타란티노는 이 시대의 가장 재능 있는 감독 중 한 사람이다. <저수지의 개들>때부터 <데쓰 프루프>까지 그는 비범한 재주를 아낌없이 발휘해왔고, 앞으로도 그래줄 것을 기대한다. 그러나, 현대 관객은 엄청난 속도의 학습 능력을 가졌다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비슷한 패턴과 스타일로는 갈수록 통하기 어려울 것이고 언젠가는 막다른 곳에 몰릴 수도 있을 것이다. 변화. 타란티노뿐만 아닌, 이 시대 모든 창작가들의 공통적인 골칫거리인 이 명제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타란티노이기에, 사활을 걸어야만 하는 데드 포인트 극복과정 마저도 흥미롭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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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1 뿡뿡이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추천 한방~
10 사라만두  
  락님의 글은 항상 읽는 맛이 있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1 Loud  
  절대 동감입니다. 타란티노감독...

소스가 말라가는 것 같아요. 재충전 해서 나온게 이거라면 정말 대 실망...

뭔가 예전의 활기찬 것이 없는 것 같져... 저수지의 개들과 같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