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밀양-송강호의 재발견[당연스포]

영화감상평

[펌] 밀양-송강호의 재발견[당연스포]

1 에레미야 0 4215 10
한 블로그에서 펀 글입니다...길지않은 간단한 문장들로 이뤄진
글솜씨가 좋은 분이군요.


이하[펌]-밀양-송강호의 재발견
전도연은 마치 가슴 속 숙변을 다 토해낼 것 같은
고통스런 연기를 잘 소화했다.
역시 내공이 보통이 아니다.
 
얼굴이나 몸매로 반짝 뜨는 배우들, 반성해야 한다.
 
전도연(신애)과 송강호(종찬)의 첫 만남.
이 만남은 두 사람도 알지 못하는 숙명적인 관계로 이어진다.

화장터에서 아들 준을 영원히 떠나보낸 뒤 넋이 나간 전도연.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한 전도연이 송강호에게
"당신도 섹스를 원해요?"라고 묻는다.
송강호에게 이보다 더 이상 치욕스런 말은 없다.
 
그러나 그녀를 향한 그의 마음은 한결 같다.
전도연은 송강호의 접근을 알면서도 몸을 뒤척이지 않는다.
 
그녀가 어떤 상황에 있을지라도 송강호는 그녀 편에 선다.
포스터에 "이런 사랑도 있다"는 부제를 붙인 것은
주로 송강호의 편에서 영화를 바라본 거다.

여자 따라 교회에 다니는 속물 송강호.
차량안내까지 한다.
왼쪽 뒤 전봇대 앞에 전도연이 서 있다.
 
송강호는 왜 송강호인지를
'밀양'에서 확실하게 보여준다.
 
그는 연기에 관한 한 일정한 경지에 올라섰다.
 
...
 
남들이 다 전도연(신애)을 얘기할 때
나는 짐짓, 모른 체 하고 송강호(종찬)를 보는 거다.

'밀양'에서 전도연이 연기를 못했다는 얘기가 아니다.
사실 나는 전도연의 팬이다.
접속, 내 마음의 풍금, 해피엔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피도 눈물도 없이, 스캔들, 너는 내 운명을 봤다.

가장 좋아하는 여배우가 누구냐고 물으면 전도연이라고 거침없이 하이킥을 날린다.

이 정도면 전도연의 팬이라는 게 객관적으로 입증될 게다.


'밀양'에서도 전도연의 연기는 압권이다.

특히 유괴범과 전화할 때 온 몸이 덜덜 떨리는 목소리,

이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친구'에서 아편쟁이 유오성이 한 여름 담요를 뒤집어 쓰고 벌벌 떠는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 이래 가장 실감나는 연기였다.

내공이 쌓이지 않으면 흉내조차 내기 힘든 연기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오로지 전도연만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인양 얘기되는 건 옳지 않다는 거다.

자기 감정을 다 드러내는 연기는 되레 싶다고 말하고 싶다.

가슴을 쥐어짜면서 울부짖으면 되니까.

 

송강호는 멀쩡한 정신에 전도연이 미쳐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한다.

남편을 잃고, 연달아 아들까지 잃는 상처를 받지도 않았다.

 

송강호는 다방에서 배달 커피를 시켜 마시는 카센터 사장으로,

배달 나온 아가씨의 아래 위 속옷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39살 노총각으로,

흔히 말하는 속물이다.  전도연의 남동생 말에 따르면 "누나 취향이 아니다."

 

뭐가 쓰운 걸까, 그는 전도연을 보는 순간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전도연이 뭐라 하건 상관 없다. 걍 그녀를 사랑한다. 순수한 사랑이다.

 

전도연이 아들을 잃고 교회 부흥회에서 대성통곡을 할 때도,

밀양역 광장에서 기타 치고 노래 부르며 선교를 할 때도,

유괴범을 용서하겠다며 교도소로 면회를 갈 때도

송강호는 그녀의 곁을 지킨다.

 

송강호가 전도연에게 딱 한번 화를 낸 적이 있다.

하나님한테 배신당한 기분에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전도연이

늦은 밤 송강호를 찾아와서 "섹스 하고 싶어요?"라고 물었을 때다.

그 때 송강호는 "정신 좀 차리소, 제발, " 불같이 화를 내며 집기를 집어던진다.

그러나 전도연이 놀라 가버지자 곧 후회하고 다시 그녀 곁을 지키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다.

 

사실, 송강호는 화를 낼 자격이 있다.

그 날은 송강호의 생일이다. 저녁에 근사한 저녁을 먹기로 한 약속을 깬 건 전도연이다.

중국집 요리사 친구한테 비아냥을 받아가며 바람을 맞고는 집에 돌아와 혼자 찌개로 배를 채운 그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약속을 어겨 미안하다고 무릎 꿇고 빌어야 할 사람은 전도연이다.

 

남의 진지한 사랑을 모욕해도 분수가 있지,

미안하다는 말은커녕 "너도 섹스하고 싶지? 너라고 별 수 있냐?"는 투로 비꼬듯이 말하는 건 사람의 도리가 아니다.

그러나 남편과 아들을 잃은 전도연의 아픔을 알기 때문에 송강호는 꾹 눌러참는다.

 

송강호는 드러난 연기보다 드러내지 않은 연기의 달인이다.

집사람과 같이 영화를 보면서, 나는 서너번이나 "송강호 연기 잘 하지?"라고 되풀이 묻곤 했다.

왜 사람들이 송강호, 송강호 하는지를 알고 싶다면 '밀양'을 보라.

 

*    *    *

 

가슴 속 응어리를 하나님의 은혜로 풀었다고 생각한 전도연은 열심한 신도가 된다.

급기야 그녀는 아들을 죽인 살인 유괴범을 용서하겠다고 교도소를 찾는다.

면회 시간.  용서해주리라, 잔뜩 마음을 먹은 전도연의 앞에 유괴범이 나타난다.

 

뜻밖에 얼굴이 너무 밝고 평화롭게 보인다.

"건강해 보시이네요."

당신을 용서해주러 왔어요,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의 평화를 얻었어요...

 

유괴범의 대답이 재미있다.

저 역시 하나님을 알게 됐습니다. 마음의 평화를 얻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았습니다.

 

용서를 받다니? 내가 용서를 안 했는데 누가 누구를 용서했다는 말인가.

전도연은 속이 뒤집힌다. 용서나마나 게임 끝이 아닌가.

하나님은 벌써 유괴범을 용서했다지 않은가.

 

이제 전도연은 슬슬 미쳐가기 시작한다.

이럴 수가 있는가.  바로 자기 아들을 죽인 유괴범의 얼굴에 어떻게 저런 평화가...

용서는 오직 엄마인 나만이 할  자격이 있지 않은가.

 

하나님으로부터 배신감을 느낀 전도연은 유혹의 악마가 된다.

앞집 약국의 장로를 유혹하고,

야외 연합예배장에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를 크게 틀어놓는다.

헛 것을 보기도 하고,  급기야 과일을 깎다가 손목을 긋는다.

 

정신병원에서 퇴원하던 날, 송강호는 전도연에게 꽃을 건넨다.

전도연은 머리부터 손질하고 싶다고 말한다.

송강호가 데려간 미장원에는 유괴범의 망나니 딸이 있다.

하필이면 그 얘가 전도연의 머리를 손질하게 된다.

참지 못하고 뛰쳐나오는 전도연. 집에서 혼자 거울을 세워놓고 머리카락을 자른다.

이때 마침 집으로 들어선 송강호, 거울을 들고 서 있는다.

전도연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카메라는 머리카락이 날아간 지저분한 마당 구석을 오래 비춘다.

영화의 끝이다.

 

*    *    *

 

 송강호야말로 전도연이 그처럼 찾아해메던 '구원'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구원... 하나님도 주지 못한 구원을 송강호가 준다.

 

원래 전도연은 "보이는 것도 믿지 못하는 데 보이지 않는 걸 어떻게 믿어요?"라고

의문을 보였던 사람이다.

아들이 죽은 뒤 교회에서 얻은 것처럼 보였던 마음의 평화는 겉껍데기에 불과했다.

한이 풀린 게 아니라 걍 보이지 않게 덮어두고 있었을 뿐이다.

하나님이 자기 몫의 용서를 가로챈 순간, 한은 분노로 폭발한다.

그녀는 때때로 하늘을 올라다보면서 식식거린다.

 

전도연이 어떤 처지에 놓여 있건 변함없이 사랑을 베푸는 건 속물 송강호다.

그는 뼛속 깊이 전도연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보이지 않는 것으로부터 얻은 평화와 달리, 그는 바로 옆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한다.

 

종교적 구원에 대한 비아냥은 이창동 감독의 특기 중 하나다.

'박하사탕'에서 운전 학원 선생과 바람이 난 설경구의 아내가

틈난 나면 통성 기도를 하던 장면을 기억하는가.

어느 날이던가, 설경구는 밥상머리에 앉아 식전 기도를 하던 아내의 허위를 참지 못하고

밥상을 뒤집어 엎고 만다.

 

종교적 구원에 대한 이창동의 비아냥은 본질적으로 인간의 문제에 닿아 있다.

딱히 종교적 구원만을 비꼬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차라리 인간의 위선이라든가 이중성이라고 말하는 게 더 정확할 듯 하다.

종교는 단지 인간의 위선, 이중성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일 뿐이다.

 

'오아시스'에는 장애인 여동생을 혼자 살도록 남겨둔 채

가끔 들르는 것만으로 장애인 복지비용을 수령하는 오빠가 나온다.

이에 비하면 비록 건달이라도 장애인의 섹스 욕망을 채워주려는 설경구가 더 인간적이다.

그러나 설경구는 말 못하고 힘 없는 여자, 그것도 몸이 비비 꼬이는 장애인을 겁탈한  희대의 색골이 된다.

이게 이창동 감독이 고발하는 인간의 허위이고 이중성이다.

옳고 그름을 과연 누가 감히 가른단 말인가.

 

남편의 고향  밀양을 처음 찾은 전도연이 송강호에게 묻는다.

"밀양은 어떤 곳이예요?"

"밀양이요? 글쎄 뭐랄까, 사람 사는 곳 다 그렇지요, 뭐."

 

이창동은 절대로 발을 땅에서 떼지 않는다.

그에게 중요한 건 보이지 않는 미래의 세계, 하늘이 아니라

바로 여기,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현실, 땅이다.

 

*  *    *

 

'밀양'에서 내가 크게 잘못 짚은 부분이 있다.

나는 정신병원에서 나온 전도연이 미장원에서 유괴범의 딸을 만났을 때,

그리고 그 딸이 전도연의 머리카락을 자르기 시작했을 때,

여기가 끝 장면이라고 생각했다.

 

유괴범의 딸도 상처가 많은 아이다.

"미용기술 언제 배웠냐?"는 전도연의 물음에 그 아이는 "교도소에서 배웠다"고 말한다.

학교는 벌써 때려치운 지 오래다.

전도연의 머리카락을 자르는 아이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다.

전도연의 머리카락이 바닥에 떨어진다.

 

내가 이 장면을 끝이라고 여긴 게 잘못이란 말인가?

웬만한 감독 같으면 여기서 손을 털었을 게다.

그렇게 하면 관객도 좋다.

글잖아도 바싹 긴장하고 2시간 넘게 영화를 본 관객들한테는 마지막 서비스가 될 수도 있다.

마지막 '화해' 장면을 통해 그나마 발걸음이 가볍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웬걸,

이창동 감독은 전도연에게 머리를 손질하다말고 뛰쳐나갈 것을 주문한다.

그리고는 집에서 혼자 머리카락을 자르게 한다.

다시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고,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마당 한 구석에 머리카락이 쌓인다.

그 지저분한 구석을 카메라는 꽤 오래 비쳐준다. 그리고 자막이 오른다.

 

마지막 장면은 매우 상징적이다.

왜냐하면 영화는 전도연이 차 안에서 내다본 파란 하늘을

꽤 오랬동안 비추는 걸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늘에서 시작해서 땅에서 끝난다.

화해는 없다.

 

나는 이걸 이창동의 한계, 또는 고집으로 본다.

추측컨대 고집이 올바른 표현일 거다.

이로써 이창동은 마지막 장면에서 구원을 노래한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괴테의 '파우스트'를 무색하게 한다.

 

초록물고기, 박하사탕, 오아시스로 이어지는 이창동의 작품 세계를 

내가 그 누구보다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편으로 늘 마음이 무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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