킬러의 자기계발(서)와 중얼거림

영화감상평

킬러의 자기계발(서)와 중얼거림 <The Killer, 2023>

13 리시츠키 0 305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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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비드 핀처



표면으로 드러난 서사는, 킬러가 프랑스로 가 타겟의 암살에 실패하고, 오히려 자신이 제거될 위기에 처하자, 클라이언트를 찾아가 복수를 하려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단순한 서사를 거꾸로 읽으면, 사태는 정반대의 양상을 보여준다. 킬러의 암살은 실패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완벽하게 과잉의 암살을 수행한다.

인물들은 산 자-죽은 자로 크게 대별된다. 이들 모두는 고용-피고용 관계이다. 킬러만이 그 중간에 있을 뿐이다. 전자인 산 자는,

클라이막스에서의 클라이언트와 타겟인 프랑스 자본(혹은 정치가)인데, 둘은 고용자들이다. 후자인 죽은 자는, 구체적으로 언급되진 않더라도 모두 누군가에게

고용된 자들이다. 콜걸, 택시운전수, 변호사와 그 비서, 짐승과 여자 킬러. 자본에 의해 고용되는 성산업, 운송업, 법률업, 킬링업을 서비스하는 노동자들인 것이다.

킬러 역시 클라이언트에 의해 고용된 서비스업 노동자이다.

이 관계는 물론 자본주의적 생산관계이다. 클라이언트는 그 구조의 최상층에, 노동자는 최하층에 존재한다.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 사이, 킬러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킬러가 클라이언트를 죽이지 않고 (그는 최고층 빌딩의 최상층에서 티비화면의 주식중계 뉴스를 통해 재현되는 미 국제금유자본가로 표상된다.

따라서 그는 미국을 지배한다), 노동자를 죽이는 이유는 간단하다. 킬러의 사회적 위치, 즉 중간착취자로서 피착취자를 구조적으로 착취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것에 다름 아닌 것이다. 말하자면, 클라이언트의 암살 명령에 대한 실패로서 그 증거를 없애기 위해 킬러를 제거한다는 것이 아니라,

암살 명령에 대한 실패를 성공함으로써 다른 가짜 증거를 제시하고 킬러가 그 증거를 제거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킬러는 도미니카공화국,

뉴올리언스, 플로리다, 뉴욕, 전 미국을 옮겨다니며 킬링 서비스를 수행하는 것이다.


모든 임무를 마치고 그는 뇌까린다 "내겐 안전하다는 느낌이 필요하다... 유일한 인생의 길은 지나온 길뿐이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면,

그 소수에 속하는 사람이 아닐지 모른다" 그렇기에 그는 여타의 6070년대 보통의 암살, 음모, 정치 영화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그는 정치권력이나 자본권력에 대한 떤 일말의 의구심이나 도덕적 회의가 없다. 균열은 커녕, 체제를 더욱 공고히 하는데 봉사한다. 정치성이 제거된 채,

자기계발서의 떤 초월적 절제와 극단적인 성공주의를 겸비한, 동시에 쿨함과 건강까지 알뜰히도 챙기는 21세기형 킬러인 것이다. 에필로그에서 킬러는

충성의 댓가로 풍족한 돈과 평화롭고 아름다운 풍경을 맞이하며 새로운 미래를 보장 받겠지만, 그 평화는 그리 오래 가지 않을 것이다. 클라이막스에서,

킬러가 클라이언트를 살려준게 아니라, 클라이언트가 킬러를 '일단' 살려준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미니카 공화국은 미국의 앞바다이다.

영화는 핀처의 영화라고 또 상찬받겠지만, 지겨운 스타일의 우려먹기와 변명과 자기합리화만 있을뿐인 미국식 실용주의를 위한 졸작 오브 졸작이다 *LMDb -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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