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이 주는 세 가지 슬픔 [스포일러 가득]

영화감상평

'역도산'이 주는 세 가지 슬픔 [스포일러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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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도산'이 주는 세 가지 슬픔
정성일의 영화세상

편집부 editor@digitalmal.com

한 남자가 있다. 이름은 김신락. 1924년 11월 4일 함경남도 홍원군 신풍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조선 씨름대회 장사가 되었으며, 그 동네의 일본 형사의 충고로 일본으로 가서 스모를 시작했다. 그러나 조선인 남자가 일본 스모의 신의 자리인 요코즈나에 오르는 것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는 곧 스모를 포기하였다.

한국전쟁이 벌어진 해인 1950년 11월 그는 일본 국적을 취득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서 레슬링을 배웠다. 1953년 3월 일본으로 돌아와 프로 레슬링 협회를 창설하고, 그런 다음 일본 최초의 프로 레슬링 태그매치 시합을 열었다. 전후 일본사회에서 프로 레슬링은 바닥에 떨어진 일본인의 자존심을 다시 불러일으키는 스포츠가 되었다. 천황을 무릎꿇게 만든 미국의 백인 선수들을 일본의 링으로 끌어들여 가라테 촙으로 그들을 넉아웃시키는 장면은 일본인들을 열광시켰고, 이 중계방송에 대한 들끓은 인기는 오늘날 일본 전자산업의 초석이 될 수 있는 텔레비전 붐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곧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그러나 프로 레슬링의 시대는 오래 지속되지 않았다. 프로 야구가 그 자리를 대신했고, 이 사내는 1963년 12월 8일 클럽에서 야쿠자의 칼에 맞았다. 그것이 우연인지, 아니면 계산된 습격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는 그로부터 일주일 후 수술 실패에 따른 복막염으로 죽었다. 그의 나이는 고작 39살이었다. 그의 일본 이름은 리키도잔(力道山). 바로 우리가 알고 있는 '역도산'이다.

날이면 날마다 오는 그런 '역도산'이 아니다!

이건 그냥<역도산>이 아니다. 당신이 관심 없더라도 던져진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제작비 90억 원, 그리고 여기에 아무리 적어도 25억 원 이상의 마케팅비가 별도로 추가된다. 이걸 다시 걷으려면 전국 관객 470만 명이 들어야 제로 섬 게임이 된다. 관객 천만 시대에 그런 시시한 고민을 하냐고? 문제는 그렇지 않다. <태극기 휘날리며> '이후' 마치 역폭풍이라도 맞듯이 거의 모든 영화들이 흥행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두고 그 사이에 점점 몸집을 불린 한국 영화산업에 걸맞지 않게 이제는 전국 관객 300만 명을 넘긴 영화를 만나기 어려워진 2004년의 갑작스런 냉랭한 분위기 속에서 (지난해에는 같은 기간에 다섯 편) 이제 이 영화의 제작자 차승재가 잘 되기를 바라건 혹은 적대적인 관계에 놓였건 상관없이, 여전히 한국영화는 투자자의 돈 밭이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서 성공을 빌어 주어야 할 판이 벌어진 상황에,<역도산>은 던져졌다. 지금의 전반적인산업적 침체 속에서도 거의승승장구하고 있는 영화제작사 싸이더스(<살인의 추억>, <말죽거리잔혹사>, <수퍼스타 감사용>, <내 머리 속의 지우개>)의 제작자 차승재가 자기 입으로 필생의 프로젝트 세 편중의하나(그 중 다른 하나는 <유령>, 그런데 나머지 하나는 아직 무언지 알 수가 없다)라고호언장담하던 영화, <파이란> '이후'. 그의 행보를 누구나 궁금해하던 감독 송해성이 오랜 장고 끝에 결정한 영화, 위로는 아오모리로 시작해서 아래로는 미야자끼에 이르는 일본 올 로케, 최상의 스탭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김형구 촬영과 이강산 조명, 그리고 누구보다도 설경구. 스모 선수에서 프로 레슬링 선수로 변신한 역도산을 해내기 위해 25킬로그램을 불려서 일 백 킬로가 넘는 거구를 이끌고 숨을 헐떡이면서 링 위에서 레슬링을 연기했다는 전설적인 소문. 그러니까 <역도산>은 한국영화의 위기론 속에 등장한 일종의 구원 타자이며, 혹은 한국 영화 인력의 총력전이다.

'괄호' 안에 갖힌 역도산이 주는 슬픔

그러면 결과는? 그냥 20자 평으로 실망스럽다. 그건 할 수 없다. 지루하지는 않은데, 무언가 영화를 만들다 만 느낌이 먼저 직관적으로 든다. 시나리오도 균형감각을 갖추었고, 미술은 특히 훌륭하다. 몇 번인가 초점이 맞지 않지만, 과도한 필터 사용과 현상 과정에서 디지털 스캐닝으로 다소 '뭉개진' 디테일에도 불구하고 촬영이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시종일관 더 들어가야 하는데 어디선가 맴맴 거리면서 돌고 있다는 느낌이 들고, 혹은 더 아파야 하는데 그게 그저 그런 정도에서 멈춘다. 설경구는 시종일관 링에서 침까지 질질 흘려가면서 헐떡거리는데 거기서 보이는 건 "내가 39년을 살아오면서 깨달은 것은 인생이란 온 몸을 던지겠다는 각오와 투지 없이는 결코 얻을 게 없다는 것이다. 인생은 승부다"라는 인생의 좌우명을 내걸고 성공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던 인간 역도산이 아니라 그 역도산을 하여튼 해내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은 설경구의 연기이다.

도대체 왜 그런 느낌이 든 것일까? 왜 결국에는 역도산에 다가갈 수 없다는 그 어떤 망설임임이 여전히 남는 것일까? 아니, 차라리 역도산은 누구였을까? 첫 번째 대답. (차승재와) 송해성이 역도산이라는 인물에 매료된 이유는 (내 생각에) 간단하다. 그가 남자답다고 생각한 것이다. 여자들이 범접할 수 없는 세계, (스모와) 프로 레슬링의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안간힘을 쓰면서 그 모든 것을 걸었던 한 남자, 자기 몸 하나로 살아남아야 했던 그 사람의 삶이 마주한 그 절대적 한계 안의 비극성에 어떤 숭고함이 있다고 그들은 생각한 것이다. 또, 그런 인물이 우리 시대의 대중들에게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처럼 보이는)것이다.

"역사 속에는 수많은 영웅이 있었지만 매 순간 너 아니면 내가 죽어야 한다는 치열한 생각으로 살았던 인물은 역도산 밖에 없다.삶은 전쟁이다. <역도산>은 죽을 힘을 다해 이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당신을 위한영화이다"(<역도산> 영화 노트에서 송해성)

말하자면 역도산은 현실 속의 세상에 떨어져 타락할 수밖에 없었던 영웅 (남성) 신화의 이야기이다. 영웅으로 태어난 남자가 자기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사회적 한계로 인하여 부서져갈 때, 그래서 결국에는 죽어야만 끝나는 '진검승부'의 끝도 없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 몸부림 쳐야 할 때, 그것이 심금을 울린다고 생각한(것 같)다. 그런데 영화<역도산>에는 그 몸부림만 있다. 영화 속의 역도산은 괄호 쳐진 역도산이다.

타자로서의 영웅이 주는 슬픔

그러므로 두 번째 대답은 필연이 된다. 영화 속의 역도산은 신기하게도 (던져진 역사와의) 매개가 사라진 역도산이다. 왜 그것이 신기하냐면 역도산의 영웅 신화는 전후 일본신화가 만들어낸, 혹은 요구한 그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패전 일본 사회에는 영웅이 필요했고, 역도산은 제 시간에 도착한 '운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하필이면 조선인이었던 것은 '운이 나쁜' 비극이다.

말하자면 역도산은 타자로서의 영웅신화가 지닌 운명적 비극이다. 그러나 영화는 그 운명의 배경에 애써 눈길을 피하려고 한다. 영화에서는 '조선인' 김신락이 왜 일본에 왔는 지 끝내 알 수가 없다. (영화는 이미 일본에 와서 스모계에 입문한 다음부터 시작한다) 그러므로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는 지도 끝내 알 수가 없다. 여기에는 그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받았던 억울한 차별만이 있다. 그리고 그 차별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자기 부정의 한계 안으로 끌려 들어간다.

그는 운명 안에서 의지와 싸웠던 인간이다. 그런데 1941년에 시작해서 1963년에 끝나는 이 영화 안에 역도산의 운명이 되었던 그 역사는 거의 희미하게 보인다. 그러므로 그 의지는 맹목적인 것이 된다. 북송선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친구가 왜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느냐고 (영화 속의) 역도산에게 물어보자 대답한다. "나는 조선이고 일본이고 그런 거 몰라, 나는 세계인이고 역도산이야"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이상한 영웅 신화의 역설이다. 역도산은 계속해서 일본에 머물면서 조선인이라는 자기 한계 때문에 국민적 영웅의 자리를 박탈당하는 그 비극성과 마주한다는 것이 이 영화의 요점이다.

그런데 역도산 자신은 "조선이건 일본이건" 문제삼지 않겠다고 대답한다. 그러므로 왜 자기에게 한계를 부여하는 일본에 머물면서 그 어떤 노력을 기울여도 부정할 수 없는 조선인이라는 한계를 부여안고 파멸의 길로 빠져드는 지 알 수 없는 기괴한 결론에 이른다. (영화 속의) 역도산은 영웅의 자리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각오가 되어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에게 세상이 포기하기를 요구하는 단 하나의 요구는 영웅의 자리이다. 서로의 모순에 빠질 수밖에 없는 두 개의 요구 사이에서 영화가 일관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역도산을 점점 미쳐버리게 만드는 도리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역도산의 그 모순된 발판을 다룰 생각이 없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역도산이 살아온 삶 곁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한반도의 전쟁에 대해서 역도산(과 이 영화)는 전혀 관심이 없다. 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 정권이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었던 역도산을 초대하여 서울을 방문한 다음에 그가 보여준 역설적인 모습은 북한의 김일성에게 벤츠를 선물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어디에도 역도산과 한반도의 끈은 거의 없다. 다만 그가 고향의 어머니를 한국말로 불러보는 짧은 대사가 전부이다. (이 영화는 95퍼센트가 일본어 대사에 한글자막으로 진행된다) 영화는 점점 역도산이 젊은 시절의 순수함을 잃어가고, 오직 불가능한 성공에만 매달리는 일종의 강박증에 사로잡힌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사실상 역도산은 이미 모든 것을 얻은 다음이다. 그는 일본의 국민적 영웅이 되었고, 조선인이어서가 아니라 육체적으로도 프로 레슬링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가 많았다.

그를 뒤에서 돌본 칸노 회장은 후계자에게 영웅을 물려주는 게임을 단 한 번만 해주면(말 그대로 '져주면'!) 프로 레슬링에 관한 모든 주식을 넘겨주겠다고 약속한다. 여기에는 어떤 음모도 없다. 그것은 비즈니스 세계일 뿐이다. 그러나 역도산은 결국 거절한다. 그가 거절하는 이유는 "영웅에게 은퇴란 없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 말하자면 김신락은 역도산에게 희생당한 것이다.

그는 만들어진 영웅의 자리에 가서 나오지 않기 위해 버티는 중이다. 김신락은 (자기에게 주어진) 주인 역도산에게 붙들린 채 계속해서 그렇게 살기를 희망한다. (그에게 역도산이라는 이름을 준 사람은 칸노 회장이다) 만일 그 자리를 포기하고 김신락으로 돌아가느니 그는 차라리 역도산으로 죽기를 희망한다. 그것은 주체 안의 타자, 혹은 타자의 대상이 된 주체의 비극이다. 문제는 영웅이 주체가 아니라 타자라는 데 있다.

레드 콤플렉스가 영화와 만났을 때의 슬픔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역도산>에서 왜 그렇게 역도산과 한반도의 동시대 역사의 체험을 떼어놓기 위해 그렇게 안간힘을 쓰다시피 무관심 하려고 노력했는가 이다. 여기에는 신기하게도 이런 종류의 영화들이 껴안는 일본에서 한국을 빛낸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는 '유치찬란한' 민족주의적 정서가 없다. (이를테면 역도산과 동시대를 살아간 일본 속의 한국인 가라데 명인 최영의를 다룬 영화 <바람의 파이터>를 떠올려 보라) 왜 그것을 피하려고 한 것일까?

여기에 세 번째 (끔찍한) 대답이 있다. 그것은 예술적 결단이 아니다. 여기에는 그것을 다루는 순간 필연적으로 이끌려 들어오게 될 북한에 대한 (선험적) 두려움이 있다. 김신락의 고향은 함경남도였으며, 그가 돌아가고 싶어하는 곳은 그가 떠날 때는 조선이었으나 돌아가야 할 때는 북한이 되어버린 한반도 북쪽이었다. 그러나 남한에서 만들어진<역도산>은 그것을 두려워하고 망설인다. 그러므로 이 영화의 마지막은 아주 기괴하게 끝난다.

죽어 가는 역도산이 떠올리는 가장 (행복하고) 그리운 순간은 아내 아야와 함께 벚꽃 날리는 봄날 신사에 가서 소원을 비는 그 자리이다. 그것은 죽어 가는 그 순간에 자기 자신 곁에 끝까지 남아주었던 아내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다. 역도산의 마음 밑바닥에 있는 것은 순정(!)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과 다르다. 역도산은 세 번이나 결혼을 했으며, 그에게는 자식도 남아있다. (영화는 자식도 없이 외롭게 죽어 가는 것으로 끝낸다) 영화는 그것을 비틀어서, 사실을 왜곡해서라도, 역도산이라는 인물에게 이 순간을 마련하려고 한다. 그것은 무엇을 바꿔친 것이었을까?

역도산의 비극이 안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은 결국 그가 조선 사람이었다는 것이다. 그걸 피하는 것은 실재의 대면을 하여튼 피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즉각적으로 역사의 괄호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 그것은 영웅이 구차한 실재에 사로잡히는 대신 환상의 자리에 올려놓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서 실재를 대면하기 두려워하는 사람은 역도산이 아니라 (차승재와) 송해성이다.

그들은 영웅 신화의 실재가 지닌 진실이 드러날 까봐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그 영웅 신화가 지녔을지도 모르는 역사의 리얼리티가 두려운 것이다. 이를테면 만일 역도산이 김일성을 지지했다면? 그러니까 여기서 두려운 것은 역도산을 넘어서 김신락이 되기 위해 타자의 자리를 넘어서 주체의 자리로 횡단하는 순간을 막으려는 무관심을 빙자한 안간힘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있는 것은 창백한, 선험적인, 교육받은, 남한 전후 세대의, 하여튼 피하고 싶은, 레드 콤플렉스이다. 그 무거운 짐이 <역도산>을 그 어떤 망설임의 모호함 속에 그냥 남겨 놓는다. 모두에게 버림받고 어느 눈 오는 겨울 날 어이없게도 야쿠자의 칼에 맞아 죽어 가는 역도산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의 쓸쓸함은 몇 마디 한국말에 있을 뿐이다. 하지만 거기에서조차 고향을 떠날 때 가져왔을 함경도 사투리의 그 어떤 액센트도 남아있지 않다. 우리는 오랜 동안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사람이 서울 표준어로 자기 말을 고칠 수 있는 경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말끔하게 지워진 그 어떤 흔적도 없이 사라진 김신락의 고향에의 그리움에 대한 말소. 그렇게 함으로써 영웅 신화의 비극으로 이끌기 위해 역도산을 점점 미쳐 가는 인간으로 다루는 것보다 더 무시무시한 억압의 귀환이 어디 있겠는가?

1963년 12월 15일에 김신락으로 죽은 역도산은 2004년 12월 15일 다시 한번 죽는다.(영화 <역도산>의 개봉일) 그러나 이번에 죽어 가는 역도산은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죽어가면서 추억에 감긴 그 마지막 장면은 아야가 소망했던 착한 남편 역도산의 자리이다. 그는 아직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다. 이 보?더 무서운 결말이 어디 있겠는가?


2005년 01월 0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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