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치명적인 가난과 치명적인 만남 [스포일러 주의]

영화감상평

<흑권> - 치명적인 가난과 치명적인 만남 [스포일러 주의]

2 칼도 4 3121 5

흑권 (Fatal Contact / 黑拳)
장르 : 드라마
등급 : 미정
감독 : 나수요 
주연 : 오경  / 정중기  / 양애근 
상영시간 : 106분
제작연도 : 2006년
국가 : 홍콩
 




극심한 가난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지만 이 상처가 그들 모두에게 동일한 효과를 끼치는 것은 아니다. 누구는 영악해지고 타락하지만 누구는 영악해지지만 타락하지는 않고 누구는 영악해지지도 타락하지도 않는다. 물론 이 셋 중에서 가장 큰 상처를 받는 이들은 마지막 유형의 사람들이다. 그것은 그들이 영악하지 못해서 계속 가난하기 때문이고 또 그 영악하지 못함은 그들이 영악하고 타락한 이들에게 이용당하고 배신당할 만큼 순박한 이들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즉, 영악하지 못하기에 그들은 결코 혼자 힘으로는 자기 자신을 위해조차도 무언가를 적극적으로 기획하고 실행할 수 없으며 기본적으로 양심과 규칙의 테두리를 벗어나 행동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 영악하거나 타락한 이들에게 마음을 빼앗기거나 부추김을 당했을 때가 아니면, 그들은 결코 모험하지 않으며 무리하지 않는다.

<흑권>은 치명적인 주먹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 치명적인 가난과 치명적인 만남에 관한 영화다. 남주인공인 고공은 본토 출신의 국가 대표 쿵후 선수이다. 그는 선수 활동이 없는 기간에는 홍콩 무대에서 쿵후 기예를 팔아야 할 만큼 빈곤한 처지에 있다. 그러면서도 그는 천생 온화하고 낙천적이며 지하 격투기 시합 선수가 되어 큰 돈을 벌어볼 욕심 따위는 갖고 있지 않다. 불법이고 국가 대표 쿵후 선수로서의 자신의 명예에 오점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은, 같은 본토 출신 기예 단원이자 가슴에 담고 있던, 어여쁜 쓰디가 부추켰기 때문이다. 물론 처음서부터 쓰디는 그를 지하 격투기 도박업자에 연결시켜주고 그의 매니저가 되어 큰 돈을 쥐어볼 생각 뿐이었다. 도박업자가 그에게 접근해 오기 전에 이미 이성으로서의 그에게 호감이 있었던 것도 분명 사실이나 그 호감은 큰 돈에 유혹당하자 마자 억압당하고 만다. 쓰디의 타락은 끝내는 자신에 대한 고공의 애정을 이용해 거짓 인질극을 벌여 그로 하여금 일부로 지는 격투기 시합을 행하게 하고 아무런 애정도 없이 도박업자에 몸을 맡기는 지경까지 이른다.

쓰디는 왜 그런 사람이 되었는가? 도박에만 빠져 지낸 무능력한 아버지와 불쌍한 어머니 밑에서 12살이 되기 전까지는 맨 발로 다녀야 했던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 이 가난에 따뜻한 관심을 보이지 않았던 주변 사람들 때문이다. 그녀는 '내가 먹을 것이 없다고 해서 네 배가 고프겠어?'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녀는, 역시 본토 출신인, 순박함을 잃지 않은 주지에게 젊음과 외모를 이용해 돈 많은 남자들을 유혹하는 법을 설교하고 경제적으로 시원찮은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지 말것을 권고하며 머뭇거리는 주지를 집요하게 타박한다. 주지가 결국은 돈많은 중늙은이를 꿰어차고 다니는 모습을 보고 고공이'창녀'라고 욕할 때도 그녀는 뜨끔해하는 표정조차 짓지 않는다. 이런 그녀에게 빠져, 그리고 충분한 돈을 모아 그녀와의 행복한 미래를 기약하고 싶어 고공은 점점 더 강도높은 격투기 시합을 거듭하게 된다. 본래의 착한 마음씨를 잃고 상대를 죽일듯이 패대는 자신의 모습에 경악하기도 하지만 그는 이제 멈출 수 없다. 영악하지만 타락하지는 않은, 그래서 '때리기도 잘하지만 맞기도 잘하는', 그래서 어머니의 꿈을 실현시켜 주기 위해 절실하게 큰 돈을 필요로 하면서도 자신의 쿵후 실력을 그저 주위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는 여흥거리로만 써먹을 뿐인 수장이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는 이치를 잘알고 적절히 자기제한을 할 것이라 믿으며 고공에게 지하 격투기 선수로서의 마음가짐을 가르치고 고공의 트레이닝 파트너가 되어준다.       

물론 고공은 적절히 자기제한을 할 만한 사람이다. 그가 고의적인 패배를 실감나게 보이게 하기 위해 스스로의 다리에 중상을 입히고 쓰러졌을 때도 고공의 이성은 살아 있었다. 그는 완벽하게 자신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의 잘못은 그저 쓰디와의 만남이 치명적인 것이 될 줄을 미리 알지 못했다는 것 뿐이다. 그는 쓰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마도 그에게 잘해준 유일한 동년배 이성이었을테고 매력적인 외모를 지녔으며 그와 동병상련의 처지에 있었다. 게다가 그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분명 진실이었다. 그녀가 돈을 위해 이 진실을 잠시 외면했을 때도 그 진실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괄호 속에 들어가 있었을 뿐이다. 그녀가 격투장에서 도박업자의 손길을 거부한 것은 그 진실 때문이었다. 고공이 병상에서 '철심을 박아 발길질이 더 위력적이 되었다'고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하고는 모아둔 돈을 둘이서 어떻게 쓸까 그녀게 묻는 순간, 왜 자기를 좋아하느냐라는 그녀의 질문에 '네 배가 고프면 내 맘이 아플꺼야'라고 그로서는 매우 노골적인 고백을 한 순간, 그녀가 병실을 박차고 나와 옥상에서 몸을 던졌던 것은 그 진실 때문이었다. 그녀는 끝내 충분히 타락할 수 없는 사람, 타락했지만 자신이 타락했다는 사실을 완전히 외면할 수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옥상 끝단에 잠시 몸을 눕혔던 그녀가 몸을 기울여 그대로 화면에서 사라지는 장면이 관객에게 상처를 주는 것은 이 때문이다.   
 
쓰디의 죽음은 고공의 죽음이기도 하다. 먼저 그의 정신이 죽는다. 그녀의 죽음에 책임이 있으리라는 심증을 갖고 도박업자의 저택을 찾아가 마구 살상을 자행하는 고공, '넌 단지 이용당한거야, 멍청아!'라는 도박업자의 말을 부정하며 경찰의 총구 앞에서도 칼질을 멈추려고 하지 않았던 고공은 더이상 살아있다고 말할 수 없다. 이어서 그의 몸이 죽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다.

<흑권>은 조금 집요하다. 우선, 병실 장면에서 관객은 고공의 입을 통해 수장이 본토의 고향으로 돌아갔음을 알게 된다. 그가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은 고공이 격투 시합에서 거짓으로 패배하는 모습을 지켜본 후이다. 애초 계획했던 30만원을 다 모으지는 못한 상태에서 그가 귀향을 결정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그의 귀향기차 안에서 주지의 모습이 보이는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게다가, 고공의 죽음은 영화를 끝나게 하지 않는다. 관객은 아직 쓰디의 시신을, 그녀의 얼굴을, 평생 동안 간직만하고 흘리지는 않았던 그녀의 눈물이 그제서야 흘러내리는 것을 지켜보아야 한다. 그리고 이어서 은하수가 쏟아져 내리는 푸른 언덕 위에서 그녀가 고공과 나란히 앉아 나누는 '페라가모 구두'에 관한 대화를, 지독했던 가난에 대한 얘기를 들어야 한다. 그 구두가 불구덩이 속에 들어가는 장면에 가슴을 채이면서 말이다.

나는 앞에서 <흑권>은 치명적인 주먹에 관한 영화가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흑권>을 박진감넘치고 처절하며 혁신적인 격투신들의 연속으로 즐기는 이들을 뭐라 말할 생각은 없다. 정말이지 그 격투신들에는 지금까지의 어떤 액션 영화에서도 본 적이 없는 신선한 '박투'가 정교하고 생생하게 녹아있다. 드라마의 강도가 높아지면서 거기에 맞물려 점점 더 수위가 높아지는 이 격투신들만으로도 <흑권>은 충분히 즐길만한 영화이다. 하물며 <흑권>은 '은근한' 리얼리즘 영화이기도 하다. 그것은 중국 본토(순박함, 이용당함,타락해도 사악해지지는 않음)와 홍콩(돈만 밝히거나 사악한 무리들)의 관계에 관한 영화, 공산당 간부들을 천안문 광장에 싸그리 끌어모아 탱크로 깔아뭉게고 싶을 정도로 극단적인 중국의 빈부 격차에 관한 영화, 가난 앞에서의 사람들의 저마다 다른 태도들에 관한 영화, 남자의 순정에 관한 영화이다. <흑권>은 이 모든 '관한'들에서 성공했다. 기본적으로는 단순한 내러티브에 잔재미가 있는 세부들을 채워넣었고 '그' 태도들을 달리하는 인물들을 훌륭히 형상화했다. 요즘 기준으로는 절대 멋진 외모를 가졌다고 할 수 없는 오경은 수수하고 온화하며 결국은 열정적이기도 한 고공의 캐릭터를 완벽하게 소화했고 더할 나위 없는 무술 연기를 보여주었다. 쓰디역을 맡은 양애근의 연기 역시 출중했다. 어딘가  앙칼져 보이면서도 소녀같은 느낌을 주는 그녀의 윤곽선은 기본적으로는 여리고 착한 쓰디의 캐릭터와 잘 맞아 떨어졌다. 음악, 특히 마지막 격투가 끝나고난 후 고공이 쓰러져 있는 장면에서 나온, 흐느끼는 듯도 하고 읊조리는 듯도 한 듯한 여성 가수의 노래와 전반적으로 약간 어둡고 짙은 색감 역시 하나의 전체로서의 영화와 잘 어울렸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4 Comments
1 Realdoc  
  어디서 퍼 오셨어요?ㅎㅎ ~_~ 글 잘 쓰셨네요

져도 방금 봤는데 거의 스킵으로 보았죠 그래도 내용 이해하는데는 지장 없더군요
액션신은 리얼리티한게 최근에 본 액션 영화들중 가장 리얼리티 했습니다...

킬링 타임으로 추천입니다 액션신도 많고

칼도님 추천 하고 갑니당
13 fastfan  
  훌륭한 감상평 정말 잘 읽었습니다.
오경의 환상적인 액션에만 흥분해서 바라본 제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군요.
이렇게 영화를 깊이 있게 바라볼줄 아는 분이 부럽습니다.
2 무지개  
  정말 공감하는 감상평이네요
리얼액션도 최고이고 가슴을 울리게하는 가난의 슬픔...스크린에 다 표현 안됀것까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였어요
영화도 영화지만 이 감상평은 다시 영화를 떠올리게 하네요~^^
이영화를 본지 일주일쯤 된거 같은데
아직도 영화의 여운이 남았나봐요
1 남상진  
  여러면에서 미덕이 보이는 감상평..잘 읽었습니다.
스포일러가 무색하게 보고 싶어지는 영화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