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도산(力道山)

영화감상평

역도산(力道山)

1 이재욱 0 2193 15


예전에 방학기 화백의 만화 '바람의 파이터'를 본적이 있었다. 극진 가라데의 창시자인 최배달을 주인공으로 한 이 만화에서,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역도산'이라는 프로레슬러에 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 이야기에서 역도산은 주인공 최배달과는 대조되게 강하기는 하나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는 다소 비겁한 인물로 묘사되어 있었다.
 

영화는 화려한 무대가 펼쳐지고 있는 어느 재즈바에서부터 시작된다. 음악이 멈추고, 사회자는 '유명한 손님' 한 분을 부른다. 그의 이름은 역도산. 그는 방금 전 한 남자로부터 칼을 맞고 피를 흘리면서도 태연하게 관객들을 향해 외친다. '이 역도산을 쓰러트리려면 프로레슬링 티켓부터 끊어라!'라고.
 

영화는 1944년 , 일제가 패망하기 약 1년전으로 돌아간다. 주인공인 '김'은 선배 스모선수들에게 조센징이라는 이유로 집단 구타를 당한다. 끊임없는 구타와 그만 포기하고 집에나 돌아가라는 선배들의 말에도 그는 '요코즈나(씨름으로 치자면 천하장사)가 되어 마음 껏 웃으며 살고 싶다'고 소리치며 버텨낸다. 그러던 그는, 한 사건으로 인해 칸노 회장의 눈에 들게 되고 회장으로부터 '역도산'이라는 이름을 받고 그가 첫눈에 반한 게이샤인 '아야'와 결혼하게 된다.

 
몇년이 지난 후, 그는 자신이 조센징이라는 사실때문에 승급하지 못한 것을 알고 분개한다. 분개한 그는 자신의 상투를 자르고 방황한다. 그러던 그는 '해롤드 사카타'라는 프로레슬러를 만나 프로레슬링의 세계를 알게되고, 프로레슬러로 사는 자신의 새로운 삶을 위해 미국으로 떠난다.
 

그가 미국으로 떠난 이후, 영화는 그 이전과는 달리 매우 빠른 속도로 전개된다. 그는 미국에서 연전 연승을 거듭하고, 일본으로 돌아와 영웅이 된다. 그러나 영웅이 된 그는 끊임없이 조금의 여유도 없이 매일 불안감에 시달리며 살아간다. 그는 점점 순수했던(?) 예전 모습을 잃어버리고 속물이 되어가며, 주위 사람들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다.
 

영화는 그런 역도산의 굴곡진 인생을 별다른 감정 없이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역도산이라는 인물을 하나의 영웅으로 미화하기 보다는 그가 보여 주는 비겁한 모습, 속물 근성등을 영화는 여과없이 보여준다. 다른 영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감동의 극대화', '명대사 날리기' 혹은 '화려한 액션'이 이 영화에는 없다. 때문에 이 영화는 확실히 '재미있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2시간 20분이라는 긴 러닝타임 때문에 관객을 지치게 할 수도 있는 영화다. 게다가 김일의 갑작스러운 등장이라든가, 마지막 장면(병원에서)의 어색함과 같은 오점들은 관객을 더욱 실망시킬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런대로 '볼 만한 가치가 있는' 영화이다. 다른건 몰라도, 영화 출연을 위해 20kg이나 살을 찌운 설경구의 노력과 그의 신들린 연기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영화는 볼만하다. 영화에 설경구는 없었다. 다만 '역도산'이 있을 뿐이었다.
 

'역도산'이란 인물은 오늘날 바쁜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을 상징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든다. 역도산이 '마음 껏 웃고 살기 위해' 비겁한 일도 서슴지 않고 행하는 모습은 오늘날 경제적 부(혹은 권력, 명예)를 위해서 부정한 일도 서슴지 않으려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일본 최고의 프로레슬러라는 성공을 이루고도 행복한 것이 아니라 그 성공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불안감에 시달리는 모습, 여유를 갖지 못하는 모습도 사회적 성공에 대한 집착과 막연한 불안감에 만성적으로 시달리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비슷했다. 그리고 자신을 '조선인, 일본인도 아닌 세계인'이라 부르는 역도산의 모습이나, '세계화 시대를 맞아 세계인이 됩시다'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대인들의 모습조차 비슷해 보였다.  개인적으로는 역도산이 존경스러운, 그러니까 '좋은 사람'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를 보면서 괜히 연민의 감정이 들었다. 그것은, 그가 오늘날 현대인들의 모습을 반영하는 하나의 '자화상' 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나 역시 현대인이기 때문에 느끼는 일종의 '동병상련' 아닐까 싶다. 이처럼 영화는 재미는 없지만 나름대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영화이다.
 

역도산, 그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했지만 한 편으론 가장 약했던 사람이었다. 오늘날 경쟁사회에서 이기기 위해 한 없이 강해져야 하지만, 한 편으론 한 없이 약하기만한 우리들도 결국은 또 다른 '역도산'일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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