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수꾼(스포일러임. 영화 안본 분들은 유의하셈.)

영화감상평

파수꾼(스포일러임. 영화 안본 분들은 유의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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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초에 우정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기태,베키,동윤.
놈놈놈으로 이들을 구분하자면 주는데 안먹는 놈, 줘도 못먹는 놈, 주면 잘 먹는 놈이랄 수 있겠다.
극단적이지만 그들의 여성관계를 '거세'로 표현하면 기태는 스스로 거세를 했다.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그런데 베키는 자신이 거세당한 이유를 기태에게 돌린다.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가 기태를 좋아해서 자존심이 뭉개졌기 때문이다. 그들은 결국 멀어지게 된다. 다신 돌아오지 않을 기차를 탄 것처럼, 혹은 멀리 찾기 힘든 곳으로 날아간 야구공처럼.
기태는 제일 무서운 '놈'이다. 주는데 안먹는 놈은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보이지 않는가. 정신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무섭다. 우정을 위해 스스로 억압한 성욕은 그가 휘두르는 폭력이 조금 더 자연스러울 수 있는 좋은 장치가 된다. 프로이드가 그랬다. 억압한 것은 귀환한다고. 폭력과 성욕은 본능이라는 거대한 번주안에 귀속되어 있다. 그리고 억압되는 것이나 귀환하는 것이나 무조건 본능이다. 영화를 본 사람은 알겠지만 기태는 미친개가 될 준비를 마친 상태이다.
기태는 동윤이 얄밉다. 동윤은 영화 내내 거세당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기태가 만들어준 여자친구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주제에, 자신과 오랜 시간 친해왔음에도 베키의 편을 든다. 그래서 기태는 결심한다. 동윤을 거세하기로. 하지만 동윤을 거세한 댓가는 크다. 야구공보다 자신이 이뤄놓은 폭력의 세계보다 중요한 진실한 우정을 잃게되니까 말이다. 이제 기태는 우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동윤의 시선 밖으로 사라져야 한다.
 
주인공들은 야구를 한다. 그들이 자주하는 야구놀이는 일반적인 야구가 아니라 한사람이 일방적으로 쳐내고 다른 사람들은 주워오는 놀이이다. 한사람의 쾌를 위해 다른 사람들은 희생이 강요되는 놀이이다. 기태는 야구공에 특별한 의미를 둔다. 영화에서 그 의미는 자세히 드러나지는 않지만 어머니와 관련된 어릴적 트라우마로 예상된다. 그 공은 아무리 멀리 던져져도 기태만이 찾을 수 있다. 기태에겐 희망과도 같은 것이다.
야구는 본래 단체게임이다. 협동해서 보금자리인 '홈'으로 '인'하는 게임이다. 그러나 그들의 야구놀이는 이미 말했듯 야구라고 부르기 어렵다. 공을 쳐내는 잠깐의 쾌락을 위해 여러시간 동안 공을 찾아내야 한다. 대책없는 홈인이다. 그들의 야구놀이는 기찻길에서 이루어지는데 기차는 어디로 멀리 떠나거나 어디로 돌아올 때 이용한다. 사춘기, 방황의 시기에서 그들은 행복한 여행을 떠나는가 아니면 다신 돌아올 수 없는 곳으로 떠나야 하는가를 영화에선 기차를 통해 말해주는 듯하다.    
기태는 ‘짱‘이다. 기태는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폭력을 사용한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따라와주지 않는 베키, 그 이전에 재호를 깐다. 재호를 까는 것은 재호가 베키와 어떤 시선을 주고 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소외하는,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 시선말이다. 기태가 멀리 쳐낸 공을 보며 국민타자가 되어 금의환향하는 모습을 주위의 시선들은 열광적으로 호응해야 한다. 그것이 기태가 바라는 시선이다. 그 시선에 대한 요구는 지극히 폭력적이어서 주변인들은 기태가 그렇게도 증오하는 가식를 사용할 수 밖에 없다. 억지로 만들어진 시선은 가식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태는 확실히 희생을 했다. 베키를 위해 이쁜 여자도 포기했다. 그런데 베키는 기태가 고백받는 장면을 보고는 의심을 한다. 그래서 재호에게 은밀한 시선을 보내고 기태가 자리를 비운 사이 '맞았을 거야'라는 말을 던진다. 그것은 폭력으로 다져진 그의 왕국에 흠을 내는 말이다. 기태의 왕국이 유지되기 위해서 자신을 주목하지 않는 베키는 사라져야 할 사람이 되어버린 것이다.
기태는 우울하다. 자신의 왕국을 지키려면 도전자를 과감히 숙청해야 한다. 완벽하게 자신의 밑으로 밀어넣어 자신만 올려다보게 해야 한다. 그게 설령 친구라 할지라도 말이다. 중요한 것은 지배 대상이 친구라는 점이다. 지배-피지배 관계와 우정이라는 단어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그러나 영화에선 이 모순을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기태는 베키를 ‘깠다‘기 보단 ’교육’시킨 것이다. 자신이 홈런타자가 되어 관중들의 열광을 지속할 수 있게끔, 그 무리 속에 베키가 있게끔 그를 교육한 것이다. 그러나 베키는 기태를 바라보는 것을 완벽하게 그만둔다. 전학가기 직전, 가식을 벗어던지고 기태의 무리들이 모두 알고 있으나 기태에게만큼은 쉬쉬했던 불편한 사실들을 쏟아낸다. 자신이 열심히 가꾸던 왕국의 핵심이 가식으로 뒤덮혔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기 위해 기태는 베키에게 이런 말을 한다.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데?'
그러자 기태의 폭력을 경험한 베키 역시 대응한다.
'너는 나한테 이러는 이유가 뭔데?'
 
'시선'은 영화에서 중요한 단어이다. 기태가 엔딩에서 사람들의 '주목'을 원하는 것이나 재호와 베키가 주고받는 은밀한 시선에서 기태가 '고립'을 느끼는 씬. 그 외에도 기태와 동윤이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것도 어떤 시선이 함축되어 있다. 동윤의 형태는 알아볼 수 없게끔 뿌옇게 처리되어 있고 말하는 기태의 형태는 거울로만 비춰진다. 유일하게 뚜렷히 드러나는 기태는 그러나 거울에 비춰진 모습이라서 내면에 있는 다른 자아를 보여주는 듯한 인상을 준다. 자신이 아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정작 자신이 보고있는 동윤은 알아볼 수 없게끔 지워져 있다. 거울에 비친 기태가 하는 말은 '주목받아서 좋다'이다. 그에 대꾸하는 동윤은 '없어질 일이다'라고 하는데 거울 속에 유일하게 주목받을 얼굴인 기태는 어딘가 이질적이고 화면에서 가장 비율을 많이 차지한 동윤의 얼굴은 그와 반대로 흐릿하다. 결국 그들의 파국은 자살, 자퇴, 전학으로 이어진다. 서로의 시선에 서로를 두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 영화에선 동윤이라는 인물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도 주목받기를 원하는 기태가 갖고 있는 유일한 장점인 ‘폭력‘은 동윤이가 덤빌 때만 거세된다. 심지어 그의 무리가 기태를 때린 동윤을 처벌할 때도 기태가 막아준다. 그 과정에서 재호가 얻어맞고 조직이 와해되는 지경에 이른다. 기태가 동윤에게 보여준 최고의 배려이다.
동윤은 기태의 입지가 커지는 것이 못내 신경쓰였을 것이다. 중학교까지만해도 자신에게 '병신'이라고 부르지 못했던 아이니까 말이다. 친구라는 터울로, 과거의 입지로 동윤은 기태의 질풍노도를 막아내고 있다. 동윤 역시 베키와 마찬가지로, 우정은 방어의 도구일뿐이다.
기태와 동윤의 과거가 어땠는지는 야구공이 왜 소중한지만큼 확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기태가 동윤보다 약했었다는 뉘앙스는 영화에 드문드문 깔려있다.(유일하게 기태와 대등한 존재가 동윤이며 테이블에서 서로 얘기할 때 ‘예전에 나한테 병신이라고 못했는데’라는 대사에서 그들의 관계가 어땠는지 유추할 수 있다.) 그래서 동윤은 기태가 지키려고 하는 왕국에 대해 '졸업하면 다 사라질 것들'이라고 말한다. 마치 그의 비행을 먼저 답습한 사람처럼 말이다. 그래서 동윤은 기태의 비행선배이자 롤모델이기도 하다.
베키가 맞는 것은 동윤에게도 두려움이 된다. 지배와 피지배의 가혹함을 이미 답습한 동윤이기 때문에 동윤은 당장이라도 자신을 지배할 수 있는 기태의 모습이 두렵다. 동윤이 베키가 맞을 때 나서서 도와주는 것엔 자신에 대한 방어가 있다. 베키를 위한 것이라는 명분 역시 그들의 우정만큼 가벼운 포장지일 뿐이다.
기태에게 우정이 없다는 진실을 말하는 것이 동윤이다. 기태에겐 우정의 대명사였던 동윤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기태는 동윤의 시야에서 사라져야 한다. '잘못된 것은 없어. 처음부터 너만 없었으면 돼'이기 때문에 베키가 했던 것처럼 전학을 갈 수도 없다. 나중에 동윤이 그랬던 것처럼 자퇴를 할 수도 없다. 사라지는 것. 자살할 수 밖에. 그가 힘껏 쳐낸 공처럼. 열심히 찾아냈던 그 공처럼. 하지만 그 공을 쳐낸 것은 동윤이었으며 그 공이 소중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것도 동윤이었고 기태를 세상밖으로 던져낸 것 역시 동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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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1 김선제  
이영화의 독특한 관점과 나름의 심리묘사 연출은 가치는 있으나
개인적으론 이영화에 대한 과대평가가 일부 있다고 생각합니다
1 시네마키드  
제 주위에선 못 본 사람들이 많길래 다른 분들도 그렇지 않을까해서 소개하는 차원에서 비평해봤습니다.(비평하다보니 본디 목적인 영화소개를 너머 스포일러가 되어버렸지만ㅜㅠ) 그리고 이 영화를 과대평가한 적 없습니다. 그냥 제 느낌을 조금 논리적으로 표현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물론 이 영화 좋다고 많이들 떠들어대긴 하지만, 떠들어댄 거에 비해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잘 모릅니다. 그냥 저 나름대로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함께 공유하고 싶은 마음에 몇 자 적어봤습니당. 그리고 개인적으로 전 이 영화가 과소평가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