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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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소리

1 황정한 0 1648 0
잠깐 사이에 나는 여편네를 잃고, 또,
전세로 눌러 살던 집도 사글세가 되고
그리고 부랄 친구들이며 피붙이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내리는 쓸쓸한 골목길 어귀를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이울어서,
비는 더욱 세게 몰아치고, 몸에 한기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일하는 주유소 이층에 자릿내나는,
두 평 반에 돌아와 목구멍에 소주를 밀어 넣었다
그리하여 나는 이 쩐내나는 낡고, 눅눅한 방에서,
새 소리 들릴 때나 쥐 소리 들릴 때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버거운 것 같이 생각하며
자장면이나 짬뽕이라도 배달 오면
면발을 밀어 넣으며 간이 영수증 뒤에다 별 뜻 없는 글귀를 적어보기도 하며,
또 좁은 방에 쿡 쳐 박혀서 나가지도 않고
줄담배를 피우며 부질없는 생각들을 해 보면서
나는 내 살아온 날들이며 살아갈 날들을 소 새김질하듯 자꾸 씹는 것이었다
가슴에서 무언가 울컥 올라올 적이며
두 눈에 나도 모를 이슬이 흥건히 괴일 적이며
나는 내 팔자가 서럽고 쓸쓸한 생각이 들어 죽고 싶다는 생각도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러다가도 나는 눈을 들어,
자동차에 기름 넣는 사람들을 바라보든가 햇빛에 마르는 속옷 빨래들을 쳐다보기도 하는 것인데,
이럴 때 나는 내 의지며 노력으로 인생을 헤쳐가는 것이 무모한 것임을 생각하고
이것보다 더 깊고 은밀한 무엇이 있어서 나를 끌고 가는 것을 묵상하는 것인데,
시나브로 해는 뜨고 지고 계절이 바뀌는 동안에,
내 세사에 얽힌 슬픔이며, 탄식이며, 원망이며, 잦아들 것은 점차 가슴 어딘가에 침전되고,
그래도 못 벗겨낸 외로움을 견딜 때쯤 해서는
어김없이 석양 노을이 찾아와 창을 두드리고 내 맘을 열어보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날에는 시집을 펼쳐보기도 하며, 신의 존재를 생각해 보며
양평 용문사 앞뜰에 천 년을 더 인내하면서
올 가을에도 은행 다섯 가마는 넉넉히 거둘, 그리 늙어도 아직 무수한 연두 잎 햇살에 일렁이는,
지금도 수액을 빨아 올리는 만만갈래의 거대한 뿌리를
그 오래고 영험하다는 은행나무의 숨소리에 내 귀를 갖다 대는 것이었다






* 백석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패러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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