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진렌즈 개발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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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진렌즈 개발 이야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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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www.rokkorclub.net/lensinfo/jplens.php



- 일본의 사진렌즈의 개발 이야기


- 사진과 일본인


  일본인들의 사진에 대한 기호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흔히들 「안경을 쓰고, 어깨에는 카메라를 늘어뜨리고 다니는 사람은 일본인이다」라고 불려질 정도로 일본인들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남다르다. 일본인들의 사진에 대한 관심은 180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다게루가 사진술을 발명을 발명하였던 1839년으로부터, 단지 9년이지난 1848년 사진기가 네델란드항을 떠나서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전해지면서 일본인들과 사진과의 인연이 시작이 되었다. 그리고 은염사진기가 프랑스의 파리에서 태어난지 불과 18년후,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손으로 초상(肖像)사진을 찍었다. 최초의 사진은 ----??摩지역의 젊은 과학자들이 지역의 유지인 齊彬公의 초상을 은염카메라로 촬영을 한 것이다.

  사진에 찍힌 1857년의 齊彬公의 얼굴은 약간은 초취한 것은, 그해 下田條約이 체결이 되어서 일본이 험난한 세계의 정세안에 들어갔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쇄국정책으로 닫혀있던 일본이 이 조약을 계기로 점점 문호를 열게되었고, [사진술]이라는 뛰어난 기술을 손에 넣게된 계기가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1843년, 자신의 손으로 사진기를 제작하였다는 다이노 유우키치(大野弁吉)라는 인물이 있다는 사실을 보면, 일본인과 사진기와의 만남은 참으로 전격적으로 이루워진 것 같다. 나타났다.




일본최초의 사진렌즈


  초기 거의 단독으로 일본의 사진업계에 군림하고 있었던 것은 小西六(지금의 코니카)였다. 코니카의 社史(회사의 史記)인 「사진과 함께한 백년」(1973년 간행)에 이라는 책에 의하면 1883년, 이미 아사쿠라(朝倉龜太郞)라는 사람이 렌의 제작을 시작을 하였고, 1890에는 일본의 내국전업박람회(內國勸業博覽會:국내의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박람회)에 여러종류의 광학렌즈와 더불어 사진렌즈도 출품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것이 어느정도로 대단한 물건이었는지는 모르겠지면, 시대로 봐서는 일본 최초의 사진렌즈인 것은 분명하다.

  1925년에는 해군함대본부로부터 사진총(寫眞銃:비행기의 기관총 대신 명중판정에 사용)의 제작을 의뢰받았으며, 이때 렌즈는 외국제 렌즈를 부착하여 납품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사실 해군에서는 내심 일본국산렌즈를 기대하고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코니카에서는 이것을 계기로 하여 렌즈 설계에 대한 연구가 시작이 되었고, 당시 코니카에서는 광학재료와 광학기기를 많이 수입을 하고 있었으나, 수입일변의 구조에서 체질을 개선하기 위한, 자사생산(自社生産)이라는 새로운 명제를 짊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1921년 장전(藏前)고등공업(現, 동경공대)을 졸업한, 모리 히로오(毛利廣雄)는 렌즈설계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1927년경에는 자사제(自社製)렌즈의 개발에 전념하고 있었다. 어려운 해외 문헌을 읽어 가면서, 수입품 렌즈을 분해하는 등 혼자서 어려운 연구를 지속하고 있었다.

  당시 일본광학(현, 니콘)은 독일등의 선진국으로부터 렌즈의 설계나 제조기술을 배우는 것이 가능하였지만, 코니카에서는 외국인 기술고문의 영입이 없이 단지 독학으로써 새로운 기술을 습득하였어야만 되는 사항이었다. 단지 해군에서 광학병기제작을 지도하고 있던 야마다(山田五限)로부터 약간의 어드바이스를 받는 수준에서 봉사 문고리 잡는 식으로 렌즈설계가 진행이 되었다.

  1931년 봄, 목표를 독일의 테사에 두고 시작을 하였던 모리(毛利)의 렌즈는 겨우 완성이 되었고, 그 해 6월 헥사 105mmF4.5로 스프링 카메라에 부착이 되어서 발매가 되었다. 이것은 일본최초로 본격적으로 대량생산이 된 양산형 렌즈였었다. 1935년데에 접어들면서 헥사렌즈는 더욱 더 다듬어졌고, 독일의 테사렌즈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얻었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의 확전으로 말미암아 카메라의 생산은 전면중지가 되었고, 새로운 모델의 변화가 없이 패전을 맞이하게 되었다.




니콘의 시작


  제1차세계대전이후 일본에서는 광학회사의 설립이 잇달었다. 해군이 미쯔비시(三菱)에 설립하였던 일본광학(日本光學)(現,니콘)은 사진기 회사가 아니라 측거기(測距機=측량기)등의 광학병기를 만드는 목적의 군수회사로서 탄생하였었다.

  일본광학의 역사는 그 이름과도 같이 일본의 광학사업사와 함께 하는 것을 알수 있으며, 재벌회사로서, 국책회사(國策會社:국가 정략상의 회사)로 해서 탄생했던 일본광학은 특별한 지원을 받으면서 커가고 있었다. 특히 광학기기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렌즈의 설계제작에 있어서는 렌즈의 본고장인 독일의 전통기술을 도입했다는 점이, 동종업계의 타사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매우 특이할만한 점이다.

  1918년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전쟁에 패한 독일에는 직장을 구하는 우수한 기술자가 많았고 한다. 당시 일본광학에서는 그 다음해에 회사이사인 藤井龍三을 독일에 파견하였다. 베를린대학에서 유학을 하여 독일통이었던 藤井龍三는 H· 아하토씨를 비롯한 8명의 우수한 인재를 모았다. 이렇게 독일인 기술자들이 일본에 와서 일을 하게 되었고, 이중에서 아하토씨는 일본광학의 일본 기술자들에게 렌즈설계에 대하여 강의하였고, 많은 후계자가 그에 의해서 육성되게 되었다. 독일어로 진행된 그의 강의는 번역되어 책자로 편찬되어 이 아시아의 땅에 그 뿌리를 내리고 있다.

  6년 뒤늦게, 렌즈설계의 공부를 거의 독학으로 마친 코니카의 모리(毛利)에 비교해 봐도, 훌륭한 가정교사에게 풍부하게 교육을 받은 왕년의 일본광학의 사람들은 큰 혜택을 받았다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광학쪽에서는 사진렌즈만을 주로 연구한 것은 아니였다. 주로 연구가 진행된 분야는 광학병기의 기초가 되는 망원경의 설계에 있었다. 이 시절 일인들로부터 렌즈설계기술을 습득할 핵심적인 인물로써는, 독일인 기술자들이 오기 약간전에 입사를 한 쓰나야마쓰미노(砂山角野)라는 인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887년에 니가타의 농촌 출신으로, 중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일본광학에 들어온 인물로써, 좋은 머리와 많은 노력을 하여 물리학교, 동대이학부를 졸업한 초인적인 노력가였다.

  시대가 흘러 1928년 쓰나야마(砂山)는 해군의 촉탁으로 인해 유럽의 광학공업을 시찰하게 되고, 칼·쟈이스의 테사등의 사진렌즈를 몇 종류 가지고 오게 된다. 당시  칼·쟈이스는 세계 광학기술의 최고봉과도 같은 존재로써, 일본에서 갓 이를 배우러온  쓰나야마(砂山)에게 있어서는 손도 내밀어 볼 수 없는 높은 회사로 여겨졌다.

  때마침 다음해, 그는 군부의 명령으로 항공사진렌즈의 제작을 위촉받게 되었고, 이 때부터 쓰나야마(砂山)는 스스로 사진렌즈의 설계를 시작하여 3년 후인, 1932년에 테사형의 사진렌즈 [아니타]를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당시, 코니카의 모리(毛利)는 일본광학의 쓰나야마(砂山)와 테사형인 본격적인 사진렌즈 개발에 있어서 앞뒤를 다투는 경쟁을 하고 있었던 셈이었다. 하지만, 당시 그들은 서로 상대의 이름도 생김새도 모르고 있었고, 모리(毛利)는 쓰나야마(砂山) 보다 13년 연하였다.

  쓰나야먀(砂山)의 다음 테마는 35mm용렌즈를 만드는 일이었다. 라이쯔(현, 라이카)의 에르마(테사형 50mmF3.5렌즈)를 입수하여, 이것을 분해하여 모방하는 일을 시작하면서 그에게는 한가지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그것은 본격적인 사진렌즈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이를 위한 최고의 선생은 칼쟈이스렌즈였었지만, 역시 쟈이스는 매우 구하기가 힘드는 물건이었다. 그런 점에서 라이쯔는 쟈이스에 비교하면 시골의 변두리 공장의 물건과도 같았다.

  " 라이쯔가 가능한 일이었다면 우리들도 충분히 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에르마를 분해하고 철저하게 데이터를 모았다. 그리고 그것을 충실히 모방하여 그것과 비슷한 렌즈를 만들어 냈다. 이에 자신만만하게 시험작 렌즈를 에르마와 비교하던 날, 쓰나야마(砂山)의 얼굴에 놀라움이 스쳐지나갔다.

  너무나도 큰 차이를 보는 것을 발견하고 쓰나야마(砂山)는 그대로 맥이 빠져 버렸다. 다시 재도전하여 에르마를 측정하고 고쳐서 수차곡선(收差曲線-렌즈의 영상이 확실히 비치치 않은 현상을 나타내는 선)에 수정을 거듭하여, 다시 테스트 렌즈를 제작하여 봤지만 역시 라이쯔(현, 라이카)의 에르마만 못해 보였다. 이에 쓰나야마(砂山)의 괴로움은 이 때부터 차츰 깊어지기 시작하였고, 그는 렌즈의 두께와 간격을 바꾸어가며, 테스트타입 렌즈를 그 후로도 10회 이상이나 만들었다. 한 개의 데스트 타입렌즈를 만들어, 에르마렌즈와 비교 테스트를 하기까지는 상당히 많은 날들이 소요된다. 1934년부터 약 10년반동안 그 일을 진행한 쓰나야마(砂山)에게 있어 가장 쓰라리고 괴로운 시기였었다.

  시작품(試作品)이 완성되면, 스스로 촬영하고, 암실에 들어가 비교음미하며, 고치기를 반복했지만, 그 때마다 매번 성능이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쓰나야마(砂山)에게는 다리에 심근경색 후유증이 있었는데, 맥이 풀린체, 그 다리를 힘겹게 질질끌며 방으로 돌아가는 쓰나야마(砂山)의 그런 모습을 당시의 주변 사람들은 자주 볼 수 있었다.

  결국 쓰나야마(砂山)의 에르마는 고심초사 끝에 그럭저럭 완성이 되었고, 이 렌즈는 세이키광학연구소(精機光學硏究所)가 발매했던 캐논에 부착하는 렌즈로 사용되어 졌고, 이것이 일본 최초의 35mm렌즈였던 것이다.

  1936년 2월, 전쟁의 어두운 구름이 세계를 둘러싸고, 일본이 군국주의시대로 빠져들고 있던 시대였다.  칼·쟈이쯔는 위료품, 측정기, 사진렌즈등을 만들고 있었다.  이 시기 쓰나야마(砂山)는 미래를 예측하여 "군수품만을 만드는 것은 회사의 장래가 어둡다고!"라는 말을 많이 하였다고 전해진다. 하지만, 그는 다음해인 1937년, 중일전쟁이 시작되던 해 50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하였다. 현제 니콘에서 쓰나야마 쓰미노(砂山角野)라 하는 사람은 반세기 이상이나 과거의 전설적인 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1919년 타카치호광학(高千穗光學 (現,올림푸스))은 현미경이나 광학기기의 메카로 하여 발족한 회사였으나, 1936년에는 다른 회사들과 마찬가지로 테사형의 찌고 75mm F3.5와 105mmF4.5 렌즈를 발매하고 있었다. 올림푸스와 같은 해에 창업했던 旭光學(현, 펜탁스)은 안경의 렌즈 연마로부터 출발하여, 사진렌즈를 제조하기 시작하였다.

  이어 1935년대가 되면서 테사형의 렌즈도 설계제조가 가능하게 되었고, 1937년 미놀타플랙스용의 프로마 75mmF3.5로 공급되게 되었다. 이 이안카메라는 찍히는 영상에 있어서는 큰 평판을 얻었으나, 1937년 당시, 미놀타에서는 아직 이렇다할 자사(自社) 브랜드 렌즈는 없었다.

  旭光學(현, 펜탁스)에서는 코니카에 옵타렌즈도 공급하고 있었기 때문에, 코니카와 미놀타는 旭光學(현, 펜탁스)에 있어서는 커다란 고객이었었다.




일본해군과 광학유리


 오오사카 공업기술시험소(-이하, 공업기술시험소)는 국립연구기관으로 1918년에 발촉된다. 공업기술시험소의 「50년사(史)」에 따르면, 광학유리의 제조 연구는 1921년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전체적으로 균질하며, 일정한 광학정수를 가지고 있는 광학유리는, 원래 19세기초 스위스에서 처음으로 제작되다가, 프랑스로 전수되었으며, 19세기중엽경에는 영국으로 전파된다. 1886년경에 독일에서는 유명한 에너멀 유리가 명성을 얻기 시작한다.

 일본에서는 명치시대부터 제 1차 세계대전까지 광학유리를 위에 열거한 나라들로부터 수입하고 있었다. 제 1차 대전이 시작되던 다음해인 1915년 12월 일본에서는 하나의 상징적인 일이 발생한다.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광학유리등의 수입이 단절되어 있던 '해군'은 간신히 프랑스의 파라마운트사로부터 광학유리 4~5톤을 수입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것을 선적하고 일본으로 향해하고 있던 선박이 독일잠수함의 공격으로 격침되게 되었고, 이것을 계기로 '해군'에서는 광학유리의 자체제조에 대한 필요성에 직면하게 되었다. 조병공장내의 낡은 주물공장의 한 귀퉁이에 용융로를 설치하여 많은 실패를 거듭한 결과, 1918년 사용가능한 광학유리들을 몇 개 제작할 수 있게 되었다. 때마침 우연히도 이 해는 오오사카의 시골인 이케다(池田)에 상공소관할의 공업기술시험소가 만들어진 해이기도 하였다.

 해군은 2년 후에는 연구분야를 담당하고, 실제의 생산은 일본광학(일본광학(日本光學))에 위탁하여 양산하기로 결정하였으며, 1923년에는 연구분야도 전부 일본광학(일본광학(日本光學))에 양도하게 되었다. 그 일본광학(日本光學)은 회사설립 다음해인 1918년부터 광학유리제조를 연구하고 있었으나, 기술적인 난관으로 인해 벽에 부닥쳐있는 상태였다. 하지만, 광학유리의 자급자족은 국가적인 과제로 생각되고 있는 중요사항이라서, 1921년 9월부터 본격적으로 연구를 다시 시작하게 된다.

 제 1차 대전이 끝나던 1918년 직후부터 일본에는 전후경기(戰後景氣)라는 극심한 경제불황이 찾아 왔으며, 1919년에는 경제공항의 파도가 밀려들면서 장기불황의 늪에 빠져들게 된다.

 다음 해에 국제연맹(國際連盟)이 수립되고, 그 즈음부터 세계적으로 확산되었던 공항의 속에서 서서히 군축(軍縮)의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것은 국제협정에 따라 군비의 무계를 줄이려는데 있었다. 명치유신후 부국강병이라는 명제로 앞만 보고 달려왔던 일본은 당시의 국가예산 1/2을 군비로 사용하고 있었다.

 1921년에는 워싱턴 군축회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일본 해군에서는 1928년까지 9억 5천만엔을 쏟아 부어 건조한 88함대를 포기하면서, 평화시대가 찾아오게 되고, 육,해군에서는 지금으로 말하자면 명예퇴직에 들어간다.

 한편, 화려하게 시작한 일본광학기술은 무기의 자급자족에 매진하고 있던 군부(軍部)의 무리한 추진으로 일본광학(日本光學)이라 불리는 회사가 설립되게 되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일본광학(日本光學) 역시 대전이 끝난 후의 격변의 시대에 있을 여러 가지 고난에 직면하고 있었다. 거기다가 해군으로부터 도저히 이익을 얻을 수 없는 상태에서 광학유리의 연구와 생산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또한 다시 닥쳐온 경영난으로 회사사정이 매우 어려웠다. 여기에 당시 불안한 일본 사회정책을 비웃는 듯이 1923년 에는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공업기술시험소의 광학유리


 군축의 시대가 시작이 되면서 해군 또한 상당한 불만에 빠져있었다. 대함거포(大艦巨砲)를 신봉하는 해군의 분위기에 있어서, 지금의 레이다에 해당하는 광학기계, 그 광학기계의 요소를 갖추고 있는 기술의 중심은 '광학렌즈'였었다.

 광학유리가 빠진 일본 해군은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현대에 있어서 반도체의 역할과도 비슷할 것이다.

 해군은 이런 이유에서 일찍부터 이 일에 주목하였었으나, 창립간(創立間-아마도 전용공장을 일컫는)도 없는 오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만 보아도 당시의 상황이 어떠하였는지는 추측이 가능할 것이다.

 처음의 동경고등공업(東京高等工業, 현재의 동경공대)의 요업(窯業-도자기 등을 만드는)과 교수 시바타(芝田理八)는 1915년, 해군이 광학유리 연구에 착수했던 초기부터 참가했던 전문가였으며, 그 후 해군으로 자리를 이동하여, 1919년 독일에 파견되어진다.

 시바타(芝田) 해군기사(技師)가 광학유리 개막의 시대에 각 방면에서 활약하고 있었으며, 공업기술시험소와의 교량역활을 한 것은 바로 이 사람이었다.

 상공소관할의 공업기술시험소는 당연한 일이지만, 국가예산으로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일본광학은 국책회사(國策會社:국가정책상의 회사)로서 탄생하였으나, 관영(官營)만이 아니라 해군에 있어서는 궁극적이고 중요한 광학유리의 연구기관으로서 상공소를 포함하여 국가예산이 책정되고 있었던 것이었다.

 시바타(芝田)는 이러한 환경에서 공업기술시험소를 위해 최초로 리제네레이데이브식 가스용융로를 설계하였다. 더욱이 「공업기술시험소에 있어서의 광학유리의 연구는 설립당초보다 긴급을 요하는 계획이었으며, 초대소장 쇼우시(莊司市太郞)는 조속히 해군기사(技師) 시바타(芝田)를 초청하고, 1920년에는 제 3부장 우찌다(內田十喜治)를 담당주임으로 하여 300Kg급 옹기를 제조하는 연구를 시작하였다」고 한다. 그들에게 "이것은 국가적인 긴급과제다!"라는 의식이 넘쳐나고 있었다.

 우찌다(內田)이하 5人의 무리에는, 먼 후일 광학유리의 권위자 타카마츠(高松)가 포함되어 있었다.

 신규기술의 계발 단계단계마다에는 발군의 노력을 보인 창조적인 인물이 나타나 중요한 부분의 일들을 끝끝내 완수해 주고 있었다. 연구의 조직력을 말한다면, 그 조직에 어떠한 인물이 있는가가 궁극의 키워드 였었다. 공업기술시험소의 타카마츠(高松)가 참으로 딱 그러한 인물이었다. 이 사람은 즉시 선발로 해군과 일본광학에 출장하여 수 개월에 걸쳐 몸으로 기술을 습득하고 익혀, 참으로 그 사람다운 행동력으로 스타트를 끊고 있었다. 그는 그 후 3~4년은 시바타(芝田)가 해군에서 행하였던 방법과 외국에서의 제조법을 참고로 하여 용융(鎔融)시험을 거듭하여 기술을 익히고 연구하는는데 전념하였다.

 타카마츠(高松)는 긴 시간동안의 연구성과를 10여년이나 지난 후에 「초자(硝子:유리)의 광학항수(光學恒數)와 기초 조성성분(組成成分)과의 관계」라는 대논문으로 종합하여 완성하였으며, 「기술적 실적이 없는 연구보고서는 아무리 쓰더라도 공헌이 되지 않는다」라는 특론(特論)을 가지고 있는 실학인이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이 사람이 일하는 모습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타카마츠(高松)는 참으로 뜨거운 여름에도 하얀 실험복을 입은 채 용융(溶融)중에 있는 교반기(攪拌機:액체약품 등을 휘저어 섞는 기구)옆에 선 채로 그 뜨거운 열을 정면으로 받으면서 꾹 참고 견디며, 잠자코 유동상태부터 점성도(粘性度)를 더하여 완성되어 가는 유리의 표면을 몇 시간이고 말도 없이 유심히 바라보고 있었다.  일단 화로에 불이 들어가면 타카마츠(高松)는 늦은 밤이나 휴일까지도 관사에서 출근하여 그 상태를 보러 오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교반(攪拌)작업의 단계로 옮기려 도가니의 속을 보면, 수 분 전 까지만 해도 있었던 유리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거나 마치 빙산과도 같이 둥둥 떠올라 있는 일도 있었다. 즉시 재시험을 하면, 새로운 광학특성을 가진 유리의 조성(組成:조직성분)은 그것을 녹이는 용기에 있는 옹기(-뒤에 설명)를 거침없이 침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가의 원료와 연료는 일순간에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그 연구를 보러 와 있던 소장 쇼우시(莊司)는 큰 소리로 꾸짖었다.

「그것으로 옹기(るつぼ)가 만들어 지지 않는다면 광학유리도 되지 않는 다는 것이 아닌가!」

 그래서 당초 처음부터 한 방면으로만, 긴급한 연구문제였던 항공기용 점화전(點火栓:점화마개의 개폐장치) 유리의 연구에만 정근을 하고 있던 와타야(綿谷政治郞) 연구원이, 그 동안의 연구를 집어치우고 광학유리용의 내침식성(耐侵食性:침범을 막는 성질) 옹기의 철저한 연구에 돌입하였다.




유리와 옹기


 내침식성(耐侵食性)옹기의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던 와타야(綿谷政治郞)는 그 후 옹기에 있어서 귀신이 되었다.  그는 그 성과를 1928~34에 걸쳐 보고논문을 작성하였다. 옹기라 하는 것은 광학유리의 원료를 집어넣는 초벌구이 도자기이다.

 이것은 이쪽 분야와 관계없는 이외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뭐 별다를 거 없는 옹기로 보인다.  초벌구이 도자기는 외관에서는 전혀 그 특이함이 전해 오지 않으나, 고열로 가열시 재료가 용융(熔融)되기 시작하면, 이 항아리는 유리원료에 치명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고온으로 달구어진 유리가 자신을 둘러 쌓고 있는 그 항아리 자체를 녹여 버리기 때문이다.

 타카마츠(高松)는 광학유리 연구논문에서 이 항아리에 대해 「옹기의 품질 여하는 광학소자에 있어 치명적인 결함을 주며, 광학유리가 비균질하게 되는 맥리(脈理)현상의 원인이 되는 것의 거의 대부분은 이것이 도자기 소자에 용입(熔入)으로 말미암아 그런 것이다.  이 점이 옹기 제조에 있어 큰 어려운 산이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시중에서 판매되는 옹기를 사용하였었으나, 아무리 고심하여 보아도 스스로 만든 항아리를 쓰지 않고서는 광학초자(光學硝子) 제조라는 성과를 얻어내기는  힘들다」 라는 정황에 대해 연이어 기술하고 있다.

 그리고 와타야(綿谷)는 「뛰어난 내화재품을 만들면서, 같이 뛰어난 소자(광학유리)를 얻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하여도 과언은 아니다....옹기의 제작에 있어서 구성성분의 차이, 가열온도의 고저 및 제작방법의 여하에 따라 달라지는 옹기의 구성조직의 변화와 각 소자(광학유리)에 대한 침식성과의 관계를 연구하고, 더욱이 우수한 옹기의 제작, 특히 광학유리의 용융과 함께 적당한 옹기를 제작하는 것」이라고 하며 실험연구를 계속하여 실시하여다.

 맥리(脈理)라 하는 것은 광학유리가 특정 중요부분에 있어 균질하지 않은 부분을 말한다.  이는 맥리(脈理)부분을 빛이 통과하면서 빛이 흐트러지면서 결과물에 흐리게 영향을 미친기 때문이다.

 와타야(綿谷)의 연구성과에 의해 만들어진 옹기는 전체가 이중구조로 되어 있고, 옹기내면의 3mm정도의 두께는 내침식(耐侵食)으로 그 바탕이 이루어져 있다. 유리에 직접 닿을 수 없는 본체는 내침식성(耐侵食性)보다도 기계적 강도가 높은 재질로 만들어져 있었다.  이것은 말하자면 "콜롬보스의 옹기" 인 것이다.

 원인의 발견으로 개발은 획기적으로 진척이 되었지만, 그는 원래의 개발분야로 돌아가지 않고, 그 발안에 부응하여 소지(素地)의 계발에 몸이 녹초가 되는 것을 잊고, 밤과 낮을 혼동하는 날이 계속되었고, 마침내 고온에서도 견딜수 있는 내침식성(耐侵食性) 옹기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연구에는 그 것을 지탱해주는 숨은 공로자가 있고, 그 만큼 각광을 받지 못하는 일도 있지만, 와타야(綿谷)등의 재료기술은 특히나 참으로 값진 일 이었다고 일컬어진다. 광학유리의 용융(溶融)이라는 일도 값진 일이지만, 그것을 녹이는 옹구의 연구 역시 값진 일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하이테크나 그런 것들에 있어 최종적으로 드러난 결과만을 매스컴에서는 화려하게 소개하고 있고, 그들은 마치 연구나 기술을 픽션과도 같이 다루고 있지만, 기술은 외관으로 보이는 것만큼 화려한 것이 아니고, 과학자나 기술자는 진흙투성이가 되어 이러한 성과들을 올리는 것이다.  성공은 실패의 수 보다 결코 많지가 않은 것이 일반적이다. 더욱이 과거부터의 단어에 있는 것처럼, 성과라는 것은 「가마에 올라타는 사람도 있으며, 그 가마를 짊어지고 오르는 사람도 있고, 그 사람들이 신을 짚신을 만드는 사람도 있다」라고 말해는 지는 것이다.

 그리고 광학유리의 용융(溶融)이라는 작업은 투명도, 균질도가 연마되어져 높고, 또 광학정수(光學定數)와 다른 여러 가지 것들이 요구되어진다. 광학유리의 용융(溶融)은 연마와 정밀정량(精密定量:정밀하고 정확한 양)인 긴 공정을 필요로 한다.

 우선 옹기의 제작에 4개월이라는 시간이 걸린다. 이 옹기를 용광로에서 가열하여 분말원료를 투입하여 교반(橋畔:휘저어 섞음)하면서 1400℃의 고열에서 1~2일 용융(熔融)시킨다. 그리고 각 유리의 특성을 고려하여 온도를 제각기 다르게 하여 신중하게 휘저어 섞어줘야 한다. 용융(溶融)후에는 옹기와 함께 화로 밖으로 끄집어내어 서냉로(徐冷爐:천천히 열을 식혀주는 爐)에 집어넣고 10일간 천천히 냉각시킨다.

 그리고 옹기와 함께 깨어서 유리를 끄집어내어, 불량한 부분을 제거하고 사용 가능한 부분만을 덩어리 채로 골라낸다. 그 후 유리를 사각형으로 만든 후 유리의 균질성을 높이기 위하여 400~600℃로 가열한 후 마지막에는 천천히 냉각시킨다. 이 냉각만에도 수개월의 시간을 필요로 하는 유리도 있다.

 그리고 완성된 유리들도 사용 용도에 맞는 정확한 특성을 지녔는가의 여부는 긴 공정의 마지막에 굴절율과 압베수 등의 수차에서 사용될 것이 결정되어진다.

 굴절율 1.51680 이어야할 유리는 적어도 유효숫자가 소숫점 4자리 수치까지는 되어야 한다고 요구되어진다.  하지만 이 수치에 도달하지 못하면 수개월간의 노력은 한순간에 헛수고가 되어 버린다.

 이러한 공정은 정밀요업(精密窯業)에 엄밀주도(嚴密周到)한 과학적 처리가 추가로 더하여져, 기술소에서의 도공시우위문(陶工市右衛門:공정을 감시하고 규찰하는 직위)과도 같은 번뜩이는 재능 역시 이 분야에서 요구되어진다. 게다가 그전부터 광학유리의 용융(溶融)은 돈 먹는 벌레라고 불려질 정도로 돈이 많이 들어가는 것이였다.




광학 유리의 은인


 오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가 열린뒤에 타카마츠의 초인적인 고생을 지탱해준 사람은 쇼우시(莊司)소장이었다. 쇼우시(莊司)는 매년마다 본성(本省:중앙의 최고 관청)으로 부터 「아직 광학 유리의 연구는 완성되지 않았는가? 도대체 언제 정말로 가능한 것인가?」라고 질책 당하면서도 매년 과감하고도 요령 있게 예산을 획득해왔다고 한다.

 이와 같은 톱 매니저와 엔지니어의 신뢰관계가 연구의 결과를 좌우한다. 오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의 광학 유리는 「군부나 민간에 제공하여 광학 유리라고 한다면 오오사카(大阪) 공업시험소라고 불리어질 정도로 두드러진 활약상을 보였다」라고 한다. 다카마츠(高松츠)박사는 일본의 "광학 유리의 은인"으로 불리워 졌으며, 당시 그쪽 일에 관계되는 관계자 중에는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공업기술시험소에서는 전쟁전과 전쟁후에 걸쳐서 많은 종류의 광학 유리의 용융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공업기술시험소는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인 1941년 7월에 현재의 오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가 있는 오사카(大阪)현 이케다시(池田市)에 분소가 완성되어 광학 유리의 전문부라고 말할 만한 제6부가 신설되어 진다. 전쟁이 격렬해져 감에 따라 점차로 본직의 연구 이외에 군용 광학 유리의 생산에 심혈을 기울여서 연구소 내부는 미용공이나 초보자, 학도동원학생 등으로 붐비고 있었다. 현지에서는 제6부(후에 4부)를 「유리 공장」이라고 부르고 있었지만 본래 생산 공장의 작업 관리나 공정 관리의 실무에 정통한 인재 등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카마츠(高松)는 시당국, 경찰, 농협은 물론 본성이나 군부와의 절충등으로 과학 기술자로는 드문 비범한 재능을 발휘하였다 . 다카마츠(高松)는 합리적인 시점에서 전쟁의 행방을 예측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것들에 대한 것을 공업기술시험소의 많은 사람들은 서술하여 남겨 놓았다. 다카마츠(高松)는 과학 기술자이기에 일본의 과학 기술의 빈곤함이 절망적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또한 그렇게 간단하게 쫒아갈 수 있는 것도 아닌 사실을 이 사람은 읽고 있었다.

 이것은 아마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때 기술에 관여하고 있는 사람들이 마음속에서 깊이 느끼고 있었던 것은 절망감이었을 것이다. 그것이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과 교차되면서 그들은 끊임없이 고통스러워 했을 것임에 틀림없다. 다카마츠(高松)의 고뇌는 패전후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된다.

 미국군이 진주하면서 미군에서 갑자기 인접한 구육군조병창을 시찰하였고, 벤록구라고 하는 만만치 않는 남자가 오오사카(大阪) 공업시험소에 들어오게 된다.

 거기에 과거의 일본육군과 완전하게 같은 연구시설이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고, 바로 그 날 점령군은 이 시설에 대하여 폐쇄를 선언하였다. 이러한 일에 다카마츠(高松)는 곤혹스러워 하였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섭외국(涉外國)과 교섭을 시작했다. 또한 직접 벤록쿠와 만나서 필사의 절충을 하기도 하였다. 그 날 자신의 세배나 되는 체격이 큰 남자를 대접하면서 그로부터 건네진 술잔을 받고 있는 다카마츠(高松)의 모습은 비장하기까지 했다. 벤록쿠도 다카마츠의 열의에 감탄했을런지도 모른다.

 연구소는 수주일간의 페쇄로부터 풀려났지만, 다카마츠(高松)는 강건한 체질을 가진 사람이 아니어서 전쟁중과 전쟁 후의 가혹한 시련으로 몸은 허약해져 가고 있었다. 1948년 1월 다카마츠는 오오사카(大阪) 공업시험소 소장으로 퇴관한 직후에 병으로 타계하였고. 그는 전쟁 후의 카메라 공업의 화려한 융성을 결국에는 볼 수 없었다.




미놀타의 탄생


 미놀타(당초 千代光學精工:치요다광학정공)는 동업 타사가 전부 동경지구에서 생겨난 것에 비교하여 유일하게 관서(關西), 그것도 오오사카(大阪)라고 하는 상업도시에서 발생했다. 오오사카(大阪)는 상업의 도시이며, 오오사카-고베지역은 전쟁전부터 일본 굴지의 중공업 지대이기도 했다. 그러나 카메라나 정밀 기계 공업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미놀타는 오오사카(大阪)에서 1928년에 창업하였다. 창업자인 타지마(田嶋一雄) 상인적인 발상보다는 무역적 발상으로부터 탄생시켰다.

 타지마(田嶋)는 와카유현(和歌由縣)의 해남에 있는 漆器를 업으로 하는 문중에서 태어나, 게이오대학을 졸업한 후 가문의 무역부분에 적을 두고 무역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시대불황의 흐름에 휘말려 섬유, 도자기 등의 무역에 앞날에 있어서의 한계를 느끼고 있었다.

 1927년 외국 여행의 기회가 있어서 프랑스의 광학 기계 메이커인 SOM社를 견학했을 당시, 그곳에 일본용으로 수출하는 측량기를 볼 수 있었다. 부가가치가 높은 광학 기계가 그 날 젊은 타지마(田嶋)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 다음 날부터는 그는 사진기의 제조업을 목표로 삼았다. 두 사람의 독일인도 협력하겠다고 나섰다. 한 사람은 일을 하면서 알게 된 윌리 하이레먼, 다른 한 사람은 이노만이라고 하는 사진기 제조에 해박한 마이스터급의 뛰어난 기술자였다. 같은 독일인이지만 日本光學(니콘)이 초대한 사람들처럼 이름이 알려진 독일인들은 아니었다. 이들이 기술에 있어서는 어떠한지 잘 모르지만 타지마는 이 사람들을 믿고 운명에 맡기기로 했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보다는 어딘지 특별한 사람들에게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1928년 효고현(兵庫縣)의 무코가와(武庫川)에 공장을 만들고 제조를 시작하였다. 타지마(田嶋)는 그 후 미놀타의 이름을 붙인 독특한 카메라를 출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전쟁전에 생산된 미놀타 플랙스는 독일제품의 모방품 이었으나 일본의 로라이 라고 불리워졌을 정도로 성능이 좋았다. 그러나 렌즈에는 自社설비가 없이 코로나나 프로마라 불리는 브랜드의 렌즈는, 렌즈전업(專業)의 旭光學(현, 펜탁스)에 설계와 제작을 의뢰하고 있었다.

 1937년 7월,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일본군은 곧 중국 내륙 깊숙이 침공하였으며, 나중에는 「사치는 적이다!」라는 말을 내세우는 전시통제시대를 앞으로 하여 카메라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였다.

 타지마(田嶋)는 해군기지와 직접 부딪쳐 보아야겠다고 결심하고, 해군 함정본부의 문을 두드렸다. 해군으로부터 사관용의 7배율 쌍안경을 만들어줬으면 한다는 타진이 있었고, 설계도가 해군으로부터 지급되었으며 1938년 가을부터 생산이 시작되었다. 검사를 위한 감독관도 파견되었다.  그러나 이 쌍안경의 제작을 하려 하여도 개당 139円 75錢의 납입가격에 대비하여, 1대당 60円의 적자가 나왔다.

 타지마(田嶋)는 국가를 위하여 채산(採算:수입,지출 비용)을 염두에 두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생산을 계속하였으며, 곧 해군도 이 사실을 알고 딱하게 생각하였는지 1940년에는 8Cm의 대형 쌍안경의 제작을 의뢰하였고, 이것은 단가 1,000円이 넘는 채산(採算)이 산정 되어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이 생산을 통하여 미놀타는 해군과 관계를 맺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미,일전이 한창이던 때, 해군으로부터 터무니없는 황당한 계획이 난데없이 날아 들었던 것이다. 그것은 1942(昭和 17)년 1月의 일이었다.

 함정본부장의 명으로 「광학유리 용융(溶融)공장을 서둘러 건설하라」라는 통달이 미놀타에 도착한 것이다. 전쟁의 시발이 되었던 하와이의 진주만기습작전, 말레해전에서 예상이상의 승리를 얻었던 일본해군은 이때 잠시동안의 화려한 승리의 정점(頂点)에 서 있었다.




해군의 명령


 미놀타가 해군으로부터 접수한 「광학유리 용융(熔融)공장을 서둘러 건설하라」라는 통달문의 건의자는 중부지역 해군공창(工廠:군에 직속되어 군수품을 제조하던 공장)의 광학공장주임이었던 日下部鍼治郞 대령였었다. 日下部는 진보적인 이상가(理想家)로서 수단을 가리지 않고 지론(持論:자신이 가진 논리)을 강행하는 타입의 실력자였었다. 일본의 중부지역에 있었던 中國工廠의 광학공장을 군의 시설부에 상담도 하지 않고, 강행하여 확장하기도 하였다.

 이 대령는 전쟁이 격화되어서 공습을 당하게 되면, 일본광학유리의 시설이 괴멸해 버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해군계열의 日本工學(현 니콘)도 공군계열의 소원광학(小原光學)등도 전부 동경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런한 이유로 광학유리의 제조거점을 관서지역으로 분산시킬 도리밖에 없다고 열심히 주장하였고, 해군 역시 이 건의안에 동의하게 되었다.

 곧, 효고현 이타미시에 부지를 사서 공장건설이 시작 되었고, 1943년, 유리용융공장이 어렵게 완성되어 점화식(點火式)을 가지게 되었다.

 이타미시(伊丹市)에 가까이 있는 이케다시(池田市)에는 공업기술시험소가 있었고, 광학유리의 권위자인 다카마츠(高松亭)박사가 거기에 있었던 것도 행운이었다. 이것은 행운이라기 보다는 日下部대령의 시나리오에 처음부터 포함되어 있었던 일이였다. 그러나 당초 이타미(伊丹)의 렌즈공장에서는 SK10을 제조할 계획이었으나, 생산된 것은 SK9 또는 SK8이 만들어 졌으며, 당시 렌즈설계를 하고 있던 中桐信吾는 이런 인덱스(INDEX:지수,지표)의 변화에 부합하여, 렌즈의 수정설계 정도는 스스로 해내지 않으면 안 되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이타미공장의 점화식이 있기 2개월 전에 무코가와(武庫川)공장에 있던 다카마츠(高松)에게 궁전하(宮殿下:황궁으로부터)의 규제가 가하여 졌다.

 궁전하(宮殿下)의 규제에 걸리게 되면, 당시 간부(幹部)들은 공구감격(恐懼感激:몹시 두려워하거나 감격함)하여, 딱딱하게 얼어 무언가 실수라도 나오지 않을까 안절부절못하였었다.

 하지만 이날 高松宮는 비위가 좋았었다. 그는 사장에게「사이토우(齋藤)는 건강한가?」라는 질문을 받았다. 사이토우(齋藤)란 사람은 그 2년 전에 미놀타에 입사했던 齋藤利衛를 말하는 것 이었다.

 황족으로부터의 하문이 있었던 탓에, 안내를 맡고 있던 사장 등은 크게 놀랐었으나, 사카이(堺)에서 렌즈를 설계  하고 있는 저 괴상스런 별난사람 사이토우(齋藤)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었던가?! 하는 의혹으로 사내(社內)에서는 내심 크게 놀라게 되었다.


 


   ---- 아래부분은 지금 정리중입니다...^^; 




사이토우((齋藤利衛)라는 인물


군부보(官部甫???후일 마미야로 전출)는 후일 대동정밀을 나와, 理化學에 10년간 자리를 둔 후, 동년 9월에 해군의 지정(指定)공장으로 있던, 堺공장에 공장장으로 부임하게 된다.


官部(사람이름 OR 관에서 부임한 자)가 미놀타에서 처음으로 마주친 것은 안하무인하는 각양각색의 귀신들 이었다.  그 귀신들 중 하나가 렌즈설계주임인 사이토우(齋藤利衛)였었다.


사이토우(齋藤)라 하는 인물은 미놀타의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그가 입사하던 시기는 昭和 16년(1941)이 저물 무렵이었다.


사이토우(齋藤)는 토우조히데키(東條英機), 야마시타토코유키(山下奉文)와 육군사관학교의 동기생으로, 졸업 후 임관하였으나 상관과 의견이 맞이 않아 퇴관하였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참고-토우조히데티(東條英機:1884-1948) : 陸軍軍人, 政治家


  참고-야마시타토모유키(山下奉文:1885-1946): 軍人, 陸軍


그것이 사실이라면 육군사관학교의 졸업사진에 사이토우(齋藤)이 찍혀 있을 것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옛 육군사관학교의 사무실까지 동행하여 그 일을 조사하는 것을 가능케 해준 고마운 분이 있었다.  마츠다(松田政夫)라 하는 분이 조사해본 바, 동사판으로 되어있는 육군사관학교 17기 졸업명단에  토우조(東條)의 이름은 있으나, 사이토우(齋藤)의 이름은 없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 동사판보다 더 낡고 완전히 해어져 너덜너덜해진 성과 이름만 남아있는 명단이 첨부되어 있는 자료에 사이토우(齋藤利衛)의 이름이 있었다.


(또한) 齋藤의 이름 앞에는 포(砲)라는 작은 글씨가 적혀 있어, 그가 포병이었는가를 판단해 볼 수 있었으나 사진은 없었다.


여기에서 추측해 보면, 이 자료는 임관시의 명단인 듯 하며, 사이토우(齋藤)은 육사 17기에 있었으나, 大正 8년(1919) 이전에 중퇴하여 졸업하지 못하고 있다.


상관과 의견이 맞지 않아 퇴관 하였던 것은 임관 후가 아니라, 육사시절에 싸움을 하여 중퇴를 당한 것일지도 모른다.


사이토우(齋藤)는 육군 유년(幼年)학교의 졸업생이었다고, 코우야산(高野山)에 있는 사이토우(齋藤)의 묘석(墓石)에 각인되어 있으며, 졸업생이라고는 써 있지 않다.


그후 사이토우(齋藤)는 일본 광학에 입사하여 렌즈 설계를 배우게 되지만 결국에는 일본 광학을 퇴사하고 후지산 은둔 생활에 들어갔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타지마 사장이 사이토우(齋藤)를 미놀타에 끌어들였다고 한다.


사이토우(齋藤)를 타지마(田嶋)에게 소개한 것은 전후(戰後)에 미놀타가 맞아들인 전 함정본부의 강각금시(江角金市)였다고 한다.


사이토우(齋藤)는 전시중 소집을 받고 입대하는 젊은 사원들이 인사하러 가자「토우조(東條)가 선동하는 것을 듣고 죽지마라. 자신의 몸은 자신 밖에 지킬 수 없다」라고 타일렀다. 「바보같은 토우조(東條)」라고 큰소리로 말하여 주변 사람들이 놀라서 뒤로 물러섰다고 한다.


또한 당시 번성했던 방공연습(防空演習)에도 참가하지 않고 부하들에게도 참가하게 하지 않았다.


「방공연습은 일에 있어서 방해거리일 뿐이다. 어차피 토우조(東條)가 일으킨 이 전쟁은 패할 것임에 틀림이 없다」라 말하면서 출입구 문에 못을 박아서 폐쇄하였다.


그리고 모두에게 사다리를 타고 창으로 출입하게 하였다.


사실 이렇게까지 했던 것은 가까운 곳에 살고 있던 해군 감독관이 접근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그는 언제나 검은 옷을 입었으며, 이야기를 시작하면 반나절 아니 하루 종일이라도 그칠 줄 몰랐다. 자신은 사진 렌즈의 설계는 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서도 독일식과 프랑스식 설계법의 차이 등을 설명하기도 하고 양서도 자주 읽었었다. 어학에는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주변에서는 인정했다.


사이토우(齋藤)와 이야기를 하다보면, 연기에 둘러쌓여 있다는 인상을 함께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이토우의 이야기는 꽤 흥미 있기로 미놀타 사내에 퍼져있었지만 어디까지가 진실인고 어디까지가 사실인가는 의문이었다.


나는 분명히 굵은 밧줄을 벨트대신에 착용하고, 미놀타에 입사한 후, 내가 있었던 제품검사실에 사이토우(齋藤)를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진흙투성이의 버선에 종종걸음으로 바쁘게 걷는, 함부로 마구 자란 수염의 이 노인은 몇 명의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붙임성도 있었다.


그의 풍채는 시골의 농사꾼이라기 보다는 昭和초기의 불운한 노동자오도 같아 보였다.


그는 어리기만 하였던 당시의 나의 이해력을 일으켜준 인물이기도 하였다.


이 인물이 이루어낸 역할을 검증하기 전에, 헌병이나 특고(特高:고등계형사)들의 감시가 심했던 그 시대의 일본에 이렇게 대담한 발언이나 행동을 했던 인물이 존재했다는 것으로 어떤 의미에서는 안도감조차도 느껴졌다.


그리고 어딘가 남들과 다른 사이토우(齋藤)를 다카마츠(高松)가 알고 있었다는 사실도 조금은 수수께끼이다. 사이토우와 미놀타 렌즈 설계의 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언급하기로 하자.


 


 




전후의 기적


 1945년 8월 제2차 세계대전은 일본과 독일의 패배로 전쟁이 끝나게된다.

 9월에는 미국 점령군이 들어왔고, 곧 이어 맥아더원수가 두툼한 군용 점퍼에 옥수수 파이프를 물고 군용기로부터 내려오는 뉴스의 영상을 보면서 이 패전한 날 이후 일본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았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것을 피할 수 없다고 느꼈다.

 하지만 사회전반적으로는 기분 나쁠 정도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작년까지 격렬하게 전쟁에 임했던 일본이었지만 8월 15일을 경계로 하여 일본인은 다이나믹하게 변화하였다. 그것은 독특한 일본인의 특성이라고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생존하기 위해서 일본인은 현명하고 부지런하게 조용히 변화했다.

 전시중에는 광학병기(光學兵器)를 만들고 있던 이전의 일본의 카메라 회사는 이미 그 해 가을에 카메라를 만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카메라산업은 경공업(輕工業)이다. 따라서 거대한 시설도 풍부한 원재료도 전력도 필요 없다. 현명한 기술자와 능력 있는 장인만 있으면 작은 카메라상에서도 카메라는 만들어질 정도이다. 유리를 녹이고 다듬어서 렌즈를 만드는 기술이나 기술자는 군수병기 제작에서 카메라 제작으로 업종을 전환하였다.

 미놀타에는 오사카(大阪) 신사이바시(心齋橋)에 있는 낡은 초등학교(小學校)의 폐교를 빌린 형태로, 카메라를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패전 이듬해인 1946년 8월, 전쟁이 끝난 후 정확히 1년 후의 일이었다.

 1947년 가을, 미놀타 렌즈 용융을 하고 있었던 이타미(伊丹)공장의 모습을 견학한 글에 의하면, 학생복 차림의 한 무리의 단체가 나카무라(中村常郞)라고 하는 선생의 인솔하에 한큐전차(阪急電車)의 이타미(伊丹)역에서 내려 논길을 끝없이 걸었다. 그 좁은 논길을 투덜투덜 거리며 논길을 걷고 있자니, 먼발치의 높은 굴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렌즈 용융(溶融)을 하던 이타미(伊丹) 공장이었다. 그 날 그 공장에서는 무엇인가 바쁘게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었다. 시간이 조금 흐르자 공장장이라고 하는 사람이 나와서 「지금 이 공장에서는 라이카 렌즈를 분주하게 생산하고 있습니다. 이미 작년에는 텟사렌즈도 생산했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렌즈의 단면도를 가리키면서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사람의 머리가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의심했다. 당시 나는 카메라에 관해서는 전문가라고 자신하고 있었다. 라이카도 텟사렌즈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이런 후진 곳에서 만들고 있을 리가 없었다. 이 공장의 공장장은 전술한 이케다(池田) 오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부근에 있었던 구 육군 조병창 공장장이었던 쿠도(工藤哲夫)였었다. 그는 패전후 미놀타에 초빙되어서 공장장이 되었다.

 그 날 이야기에 거론되었던 텟사렌즈라고 하는 것은, 전년도 발표한 미놀타 Ⅲ형의 텟사 렌즈(75㎜F3.5)로서 이것은 렌즈의 설계, 유리의 용융, 렌즈의 연마, 조립까지의 일관 공정 모두를 처음으로 미놀타에서 실시했다고 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라이카는 그 무렵 개발중이었던 포칼 프레인 샷타의 35㎜판 카메라, 미놀타 35의 회사내의 애칭으로 이타미에서는 그 렌즈 슈퍼 로콜 45㎜F2.8의 유리 용융에 모든 정성을 쏟고 있었다.

 아무튼 생존하기 위해서 필사적인 戰後의 일본이었지만, 카메라에 종사해왔던 사람들은 지금 시대로 보면 풍채가 시원치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었으나 그 이상과 높은 자부심만큼은 강인한 무리들 이였었다.




도심속의 초등학교(小學校) 공장


 당시 오사카(大阪)시의 중심부는 폐허가 되어 있었다. 미국의 B29(폭격기)에 의한 폭격으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모두 불타버린 들판과도 같은 것들 이었으며, 그 타버린 흔적의 한 구석에 콘크리트의 초등학교 건물만이 덩그렇게 남아있었다. 건물은 거의 완전한 모습 그대로 보였지만 내부는 완전히 타버려서 새까맣게 그을려있었다. 오사카(大阪)의 그 맞은편에는 전쟁이 끝나던 해인 3월 13일의 대공습에서 불타 무너져 내린 오사카(大阪) 선착장의 토이야마찌(門屋街:뱃사람의 숙소들로 이루어진 거리)가 있었다. 타니자키 준이치로(谷崎潤一郞)의 '細雪'에 등장하는 우아한 파도와도 같은 말을 사용하는 여성들의 오래된 보금자리이기도 하였었다.

 그런 상업도시, 오사카(大阪)의 중심가의 오래된 초등학교 건물 안에 카메라 회사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타버린 도심에 공장을 이전시키는 것은 전쟁중에는 역소개(逆疎開)라고 말하고 있었다.  타버린 흔적이야말로 안전이라고 하는 발상에서 공장을 이전시키는 것을 일컫지만 미놀타의 경우에 있어서의 이전은 전쟁이 끝난 후의 일이었다.

 


 


광학유리와 옹기


시간을 거슬러 전쟁중으로 돌아가 보자.


이타미시(兵庫具伊丹市)는 大阪(오오사카)에 인접한 오래된 城下町(じょうがまち:


성을 중심으로 발달한 도시)로서, 유서있는 술 곳간들이 곳곳에 여기저기 널려 있


는 도시이다.


이 거리는 한신(阪神)대지진으로 인해 그저 처마를 맞대고 즐비하게 늘어서 있던


낡은 집들이 무너져 내려, 완전히 새롭게 재건되어 거리의 풍취와 모양이 크게 변


해 버렸다.


이伊丹市(이타미시)에는 벌써 오래 전부터 미놀타 렌즈의 용융공장이 앞서의 전쟁


말기에 해군의 요청이라기보다는 거의 명령에 가까운 지시에 의해 건설되어져 있었


다.


최초에는 밭으로 쓰던 땅의 한가운데에 있는 작은 구릉위에 세워진 공장 이였었으


나, 그 공장에는 괴물과도 같은 높은 굴뚝이 하나 솟아 있어서, 그 지역의 사람들


에게는 무언가 왠지 모르게 기분 나쁜 듯한 인상을 심어 주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


다.


 


  저것은 해군의 용융(熔融)공장이다   라는 등 우중충한 풍문이 끊이지 않았었다.


 


그러나 현재는 광대한 국도 171번선이 그 옆을 달리고 있고, 이 공장의 주변은 극


히 보통의 도회지 풍경이 펼쳐져 있는데 지나지 않는다.


이 공장에 서서 북동쪽을 바라보면, 10Km 정도 앞쪽부근에 산맥이 줄지어 연결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미노오(箕面:大阪府の市)의 오월산산(五月山山)의 갈래로 이어지는 산맥 사이에는


그 유명한 저명천(猪名川:이나가와-이후 저명천으로 명칭)이 흐르고, 좌측에는 이타


미공항(伊丹空港)이 펼쳐져 있다.


이타미공항은 본디 공군이 소화(昭和) 14년(1939)에 건설한 것으로, 전후(戰後) 그


것을 확장하여 오오사카의 국제공항으로 사용되어 지고 있었다.


저명천(猪名川)의 멀리 저편에 연이어 있는 산들의 산기슭에 오오사카 공업시험소


(=大工試)가 전쟁전부터 현재까지 같은 장소에 그대로 남아 있다.


이전에는 이 곳이 미놀타의 이타미(伊丹)공장에서 바라다 보였으나, 지금은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밀집되어 있어 분간을 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그 거리는 불과 6Km 정도에 불과하다.


 


 


육군은 소화(昭和) 14년 가을에 그 대공시(大工試)의 동측에 인접하여, 광학유리의


제조를 위하여 동경 제 1공군 조병창(造兵廠-무기를 조달, 공급하는 군수창고) 이


케다(池田)공장을 건설하겠다.


그것은 거의 억지에 가까운 육군에 의한 밀어붙이기 식의  벼락치기 공사  였었다.


 


만주사변(1931. 9. 18)경 까지 육군은 광학유리의 소재의 공급에 있어서는 거의 전


량을 해군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수요의 급증에 쫓기어 더 이상 해군이 흘려주는


떡고물의 해택을 누리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던 이유에서 였었다.


이러한 이유로 광학유리의 연구 메카인 대공시(大工試)를 이용하기에 용이한 입지


의 유리함을 노리고, 그 측면을 점거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빠르게도 다음해인 소화 15년(1940)에는 제 1회 생산을 하게 된다.


 


해군도 억척스럽게 대공시에게 어려운 문제들을 떠 넘겨 강요하고 있었다.


전쟁말기에 이르자 대공시는 광학유리의 연구보다는, 흡사 광학유리의 제조공장과


도 같이 변해 있었다.


토요하시(豊橋:愛知具 南東部 豊川下流域の市)의 해군공창(工廠:군에 직속되어 군


수품을 제조하던 공장)에서 감독관으로 부임해 온, 아직 채 성년도 되지 않은 어린


해군 사관이 군도를 휘둘러 대면서   생산량이 오르지 않고 있다!   고 기합을 넣


으러 왔었다.


그는   생산량이 오르지 않으면, 내가 책임을 지고 배를 가르겠다   며 비장한 결


의로 관계자들을 독촉하였다.(-이 이야기는 후일 대공시의  『50年史』 에 여러번


실리고 있다)


 


오래 전부터 해군과의 친분이 깊었던 대공시도, 돌연 육군이 인근의 부지에 2만평


규모의 유리공장을 건설한 일로 인하여, 대공시는 본의 아니게 육·해군의 틈사이


에 서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육군과 해군 등 군을 상대해야 하는 선량한 관민(官民)들은 그 틈사이에서 고생이


끊이지 않았었다.


이것이 당시 패전을 앞둔 직후의 일본의 모습이었다.


 


아사다부자(麻田父子)의 분투(奮鬪)


지금도 이 이타미시(伊丹市)에 살고 있는, 벌써 반세기 전의 광학유리를 둘러 쌓고


있었던 많은 일련의 일과 사건들, 그리고 대공시와 육군 그리고 미놀타 이타미공장


의 역사와 그 길을 함께 걸었던 사람이 있다.


 


아사다(麻田), 희수(喜壽:77세)를 맞이하는 그는 지금도 여전히 젊은 청년과도 같


은 건강미가 넘치고 있는 듯한 사람이었다.


이 인물과 나는 오래 전에 JR(=일본 전철) 이타미역에서 만남을 가졌었다.


 


명치 28년(1895)에 태어난 아사다(麻田)의 아버지는 본디 일본 ????의 제조공장에


서 일하던 솜씨 좋은 기능공중의 장(長) 이었으나, 어느 날 군으로부터 호출을 받


고 육군장교와 함께 어딘가로 동행을 하게 된다.


육군이 이 인물의 옹기 제조기술능력을 높이 평가, 그의 능력을 필요로 하여 몰


래 빼돌려 스카웃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를 대공시(大工試)의 다카마츠(高松)박사에게 소개하여, 거기에서 대공시


류(流:스타일)의  옹기 제조기술을 습득하도록 하였다.


군부의 군속(軍屬)의 신분으로 유학을 보낸다는 명목으로, 광학유리를 제조할 수


있는 옹기 제조의 실무습득을 도모하였던 것이었고, 아사다(麻田)의 부친은 아직


어린 아들 시게루(-아사다의 애명)도 함께 데려가 부자가 함께 이 일을 도모해 보


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실제로 옹기의 제조는 대공시의 와타야(綿谷)가 지도하였으나, 아사다에게 있었


서 일본 ?????? 시대의 일반유리제용의 옹기에 이은 연장업무일뿐, 그다지 어렵


거나 고난이 따르는 일은 아니었다.


그 후 육군의 이케다(池田) 공장건설이 시작되었고, 전후(戰後) 쿠도테츠오(工藤哲


夫)견습장교가 미놀타에 부임하여 배치었으며, 그 후 제 2대 공장장이 되었다.


 


대공시에서 옹기제조기술을 마스터한 아사다(麻田)의 아버지(=시게루는 소집당하


여 외지에 있었다)는 종전(終戰)이 되던 그날까지 육군의 공장에서 옹기를 만들


어 내고 이었다.


아사다(麻田)의 아버지는 종전 다음 해인 소화(昭和) 21년(1946) 쿠도(工藤)와 함


께 미놀타에 입사하였다.


 


건설 된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여러모로 미숙하고 경험이 부족했던 미놀타 공장


에 아사다(麻田)의 아버지가 오지 않았더라면 미놀타의 옹기는 불가능하였을 것


이다.


그는 미놀타에 있어 참으로 커다란 보배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전후(戰後), 이 육군공장의 설비들은 경매에 붙여졌고, 코하라(小原)광학과 캐논,


미놀타가 이 경매에서 맞붙었으나, 결국 미놀타가 지리적 이점 때문에 경매에 낙찰


되었다.


이 육군의 공장 내부에 저장되어 있던 대량의 광학유리소재(素材:기초재료), 연단


(鉛丹)과 산화발륨 등도 고스란히 미놀타의 손에 들어오게 되었고, 물자부족에 시


달리던 전후의 시기에 생각지 못했던 횡재를 하게 된 셈이었다.


 


아사다(麻田)도 소화 23년(1948)에 미놀타에 입사하게 되었고, 그 후 옹기 제작


에 참여하게 된다.  그리고 소화 26년(1951), 아사다(麻田)는 미놀타의 타지마(田


嶋一雄) 사장과 동행하여 일본광학(현,니콘)을 방문하게 된다.


아사다(麻田)는 그 방문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체 상경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처 정


장 상의를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전후(戰後)의 빈곤한 시대, 사람들이 여름정장을 입지 않고 있는 것은 당연하게 받


아들여 지고 있던 시기였었다.


이 때 동경에 있었던 미놀타의 거물 이즈미(江角金市)가   내 것을 입고가라!   며  


선뜻 상의를 벗어 빌려 주었다.


 


아사다(麻田)는 미놀타와 니콘 양측 사장들 사이에서 긴장하고 있었다.


타지마카즈오(田嶋一雄)와, 소화 22년(1947)부터 소화 34년(1959)까지 긴 시간동안


일본광학의 사장을 역임하였던 나가오카마사오(長岡正男)는 서로 마음아 잘 맞았었


다.


장강(長岡)은 나가오카(長岡半太郞)박사의 아들로서, 말하자면 미츠비시(三菱:삼릉


=니콘)의 영주(領主)였던 셈이다.


 


전쟁이 한창이던 당시, 군(軍)의 지시에 의해 미놀타에서 제조했던  노바쌍안경 은


일본광학이 설계했던 것으로, 미놀타에서는 일본광학을   미츠비시 상(三菱さん)   


이라 부르며, 존경과 경원(敬遠)을 담아 부르고 있었다.


 


미놀타의 창시자 타지마(田嶋)는 기주(紀州)의 명문가 출신으로 수출과 영업이 전


문인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동경의 입장에서 분류하여 본다면, 본래부터 국옥(國屋=국가or나라)이나


오사카상인(大阪商人)에게 있어서의 부양가족인 셈이었다.


 


겉보기에는 별 다를 바 없이 그저 사소한 만남이라 생각되는 두 사람의 만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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