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조가 든 K-1, 작은 희망을 보여준 최홍만.

자유게시판

망조가 든 K-1, 작은 희망을 보여준 최홍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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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민속씨름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었다.
이만기, 이준희, 홍현욱, 이봉걸 같은 장사들이 라이벌 관계를 이뤄가며 군웅할거 시대를 열었고 전통의 배지기 기술에 현란한 다리기술, 특히 뒤집기 같은 환상의 기술로 상대를 메치는 카타르시스는 정말 대단했다. 그중에서도 속전속결 승부의 묘미를 보여줬던 이만기 장사와 국보급 다리기술을 보여줬던 모래판의 신사 이준희가 천하장사 타이틀을 놓고 팽팽하게 맞섰던 시절은 정말 대단했다. 프로야구에서 삼성 라이온즈 장효조와 해태 타이거즈 김종모가 4할에 가까운 타율을 보이며 타격왕 경쟁을 보였던 시기와 거의 비슷한 시기였을까. 스포츠는 온 나라 사람들의 심심풀이 땅콩에서부터 울분을 달래주는 다정한 친구 역할까지 기꺼이 되주던 시대였다. 그 중 민속씨름은 특히 더 그 역할에 충실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몇 개월 전, 천하장사 최홍만이 더 이상 배고프고 가난한 모래판에선 살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일본 종합 격투기 K-1으로의 진출을 선언했을 때 여기저기서 말들이 많았다.
비록 인기가 없어져 큰 돈벌이는 안 되더라도 몇 안 되는 고유 스포츠인 씨름 선수가, 하물며 최고의 타이틀을 거머쥔 천하장사가 투견판 같은 일본의 격투기로 자리를 옮긴다니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논란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런 평면적인 논란보다 더 관심가는 것은 최홍만이란 선수가 과연 K-1 무대에 적응할 수 있을까하는 의문이었다.
역대 일본 스모 선수 중 최고의 스타였던 다카노 하나와 더불어 요코즈나(최고 품계)를 양분하며 ‘위대한’ 선수 칭호를 받았던 아케보노가 수많은 만류를 무릅쓰고 K-1에 진출했다가 연전연패하는 상황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케보노가 당치도 않은 K-1 링에 오른다고 했을 때 이미 예상되었던 상황이었다.
K-1이 어떤 링인가. 지금은 비록 PRIDE FC에 밀려 종합격투기 시장에서 2위에 머물고 있지만 한 때 ‘세계는 돔(도쿄)으로 통한다’는 명문을 만들 정도로 세계 격투기 팬들의 심금을 울렸던 영광의 무대가 아닌가. 250여 킬로그램의 거구, 자기 몸도 제대로 가누기 힘든 상황의 선수가 덩치로만 버틸 수 없는 무대라는 것을 그는 실전을 통해 제대로 보여준 것이었다. - 본야스키의 플라잉 킥 한 방에 기절했던 게임이 있었다.
스모와 씨름은 비슷해 보이나 다른 점이 많은 스포츠다. 단순히 넘어뜨리거나 밀어내는 스모에 비해서 씨름은 일단 얽혀서 시작하므로 다양한 발기술과 손기술이 스모에 비해 세분화되어있다. 그러나 일단 몸무게가 많이 나가는 편이 유리한 것은 같은 상황, K-1과 같이 정해진 시간동안 몸을 많이 움직이며 주먹과 발, 무릎으로 상대를 가격해서 점수를 얻거나 KO를 이끌어내야 하는 경기에서는 많은 몸무게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역대 K-1 월드그랑프리 챔피언을 지낸 선수들을 봐도 ‘비만형’은 한 사람도 없었다. 이런 현실에서, 물론 씨름선수로 활약할 당시에도 비만형은 아니었지만 최홍만이 글러브를 끼고 K-1 링에서 로우킥을 날리며 경기하는 그림이 쉽게 그려지지는 않았기에 걱정하는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망신이나 안당하면 다행이겠다’

3월 26일, 콧바람을 휘날리며 순창에서의 멋진 주말을 보내고 있을 때, 서울에선 K-1 서울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하루가 지나 케이블을 통해 본 K-1 서울대회, 3시간 넘도록 TV 앞에 앉아있게 만든 것은 오직 ‘최홍만’이란 선수의 경기 모습에 관한 궁금증뿐이었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경기결과는 먼저 알았지만, 그래서 더욱 의아했다. 와카쇼오나 아케보노 같은 퇴물들이야 당연히 이겼겠지만 우승이라니. 12월에 열릴 ‘영광의 돔’에서의 월드그랑프리 출전권 획득이라니. 정말 믿어지지 않는 결과였다. 도대체 얼마나 허술한 선수들이 나왔기에 단지 몇 달간의 연습만을 거친 초보 선수가 우승할 수 있었단 말인가. 그것이 정말 궁금했다.

K-1은 망해가고 있다. 세 시간 넘게 본 서울대회는 정말 형편없는 각본에 짜인 격투기 쇼에 불과했다. 보는 사람들의 피를 끓게 하는, 결코 절대 뒤로 물러서지 않는 감동의 투지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자신보다 40센티, 60킬로가 더 나가는 거대한 골리앗과 연장까지 가는 접전을 보여준 서울의 ‘영웅’ 카오클라이 말고는 어느 선수 하나 제대로 ‘투지’를 보여주지 못했다. 어차피 수퍼파이트란 게임은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한 기획 매치라고 하더라도 하이킥 한 방에 게임을 포기한 ‘무자비’한 머서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고 최영의 선생의 수제자가 만든 K-1이 아니었나. 선수로 변신한 심판 위원장 노부아키는 또 무슨 의도인지, 본인들은 극구 부인하지만 일본의 자존심 아케보노에게 단 1승이라도 헌납하기 위한 야비한 시나리오란 것은 체육관 앞을 지나가던 똥개도 다 알만한 것이다. 더욱이 마흔 여섯 살 노인과의 시합 이후 2차전에서 다리를 절고 링에 올라 몇 차례의 펀치만으로 타월을 던져버린 아케보노. 그가 과연 일본의 자존심 다카노 하나를 여러 차례 눌러 이겼던 ‘위대한’ 요코즈나가 맞는지 의문이 들었다. 가뜩이나 독도 문제로 국민적 스트레스가 치밀어 오르는 때 일본 선수 두들기는 최홍만이 대견하기는 했지만 수십만 원씩 내고 직접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이 처량해 보이는 순간이었다.
나는 지금도 똑똑히 기억한다. 관절이 부러지고 뼈가 어긋나도 결코 포기를 몰랐던 남자들, 눈자위가 몇 센티 찣어지는 상처쯤은 아무 것도 아닌 듯 반대편 라운드의 상대를 노려보며 링이 울리기만 기다리던 그 눈빛들. 이제는 전설이 된 영원한 K-1의 남자, 푸른 눈의 사무라이 앤디 훅과 두려움을 모르는 육식동물 마이크 베르나르도, 퍼펙트맨 어네스트 후스트와 세기 최강의 킥복서 피터 아츠, 싸우는 사이보그 제롬 르 반나...링 위에서 자신의 이름과 도장의 자존심을 위해 명예를 걸고 싸웠던 진정한 남자들의 투지를 기억한다. 거대한 괴물 밥 삽을 하이킥 한 방으로 보내버린 크로캅의 냉철한 눈빛과 자신이 KO시킨 상대를 일으켜 세우며 존경의 박수를 보내던 진정한 파이터 마크 헌트의 모습을 기억한다.
그러므로 이런 K-1은 전혀 반갑지 않다. 망조가 단단히 들어버린, 퇴물과 기획 이벤트 매치가 판치는 K-1의 링에서는 더 이상 어떤 감동도, 가슴 떨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한국씨름 장사의 성공적인 K-1 데뷔를 축하하는 공허한 울림만 남았을 뿐.
김이 빠지긴 했지만 최홍만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모습이었다. 기획된 대진운 덕에 퇴물을 치우는 역할(?)을 하긴 했지만 상당히 많은 감량을 성공하고 가뿐해진 몸으로 마구잡이 펀치를 날려대는 최홍만의 모습에서 작은 희망을 볼 수 있었다.
더욱 대견한 것은 3회를 뛰고도 다시 연장 1회를 지치지 않고 마친 체력이다. 무슨 경기든 기초 체력이 뒷받침 되지 않고는 이야기를 풀어갈 수 없을터, 최홍만은 앞으로 성장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이제 갓 데뷔한 최홍만이 지역 우승을 차지했다고 해서 마냥 기뻐하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다. 앞으로 그가 만날 상대들은 이번에 이긴 상대들과는 차원이 다른 ‘야수’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결승전에서 만난 카오클라이가 만약 최홍만과 거의 비슷한 체급이었다고 한다면 과연 최홍만이 이길 수 있었을까. 작고 가벼운 상대였기 때문에 주먹질, 발길질을 허용해도 데미지 없이 넘어갔지만 비슷한 크기의 상대는 이야기가 틀리다. K-1에는 이번 수퍼파이트에도 나왔던 세미 슐츠 같은 괴물들이 즐비해있다. 2M 가까운 키에 엄청난 덩치에도 불구하고 로우킥 하이킥을 붕붕 날리는 ‘비스트’들이 첩첩산중 존재한다는 것. 이들과 붙어서 이기려면 단지 체력만 가지고는 어려운 이야기다. 자신만의 특기, 펀치면 펀치, 킥이면 킥, 필살기를 익히고 실전에 적용시키는 훈련을 죽도록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 연말 ‘영광의 돔’에서 열리는 월드그랑프리 무대에서 비로소 진정한 승리의 맛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걱정에도 불구하고 천진하게 웃는 최홍만의 미소와 인터뷰를 보며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희망을 봤다. 배고파서 천하장사 타이틀을 버렸다지만, 허울좋은 명성 뒤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무관심이 서운하고 힘들었던 것 아닌가. 이젠 진정한 승리와 환호로 그 배고픔을 채워야 하지 않겠는가. 최.홍.만.

처음에 언급했던 추억 속의 스포츠는 이제 없다. 모든 가치가 돈에서 시작해서 돈으로 끝난다. 아마가 아닌 프로이므로 당연히 경기에는 사람들의 이목과 돈이 집중되어야한다. 하지만 이번에 보여준 서울 대회는 K-1이 PRIDE FC에 밀리는 원인이 뭔가를 극명하게 보여줬다. K-1이 배출한 당대의 격투기 스타들이 줄줄이 PRIDE FC로 넘어가버린 이유, 시청율이 떨어지고 관객이 줄어드는 이유가 뭔지 아주 간단명료하고 정확하게 보여줬다. 링 위에서 피를 튀며 싸우는 것은 이름이 아니고 실체이다. 과거 그들의 경력이나 배경이 아닌, 현재의 사람이 펀치와 킥을 날리며 싸우는 것이다. 위대한 과거의 명예를 허명으로 만들고 거액의 파이트머니에 무도인의 자존심을 팔아버린 퇴물들이 퇴출당하지 않는 한 K-1은, 그렇게도 좋아했던 K-1은 금세 망해서 사라져 버리고 말것이다. 반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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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1 房9CHA  
  정말 글 잘쓰시네요!
많은 부분 동감이 갑니다. 사나이들의 뜨거운 열정이 들끓는
K-1무대에 격에 맞지않는 경기였음은 정말 인정합니다.
그래도 홍만선수 더 열심히 해서 한국의 자존심을 보여주길
그리고 저 하나 궁금한점이있는데요 ㅋ
크로캅이 밥샵과 싸울때는 로우킥을 날린뒤에 왼손스트레이트로
눈을 가격해서 이겼습니다. 하이킥은 안날렸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