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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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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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주 어렸을 때,
우리가 세들었던 주인집은 동네에서 제일 먼저 전화를 놓은 집이었어.

2층으로 오르는 계단 옆 벽에 붙어 있던...
반질반질하게 닦은 참나무 전화통이 지금도 기억나.

나는 워낙 꼬마라 전화기에 손이 닿지는 않았지만
주인집 아줌마가 거기 대고 말을 할 때면 홀린 듯이 귀를 기울이곤 했어.
검은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가 그때 난 상당히 신기했었거든.

그 때 나는 도대체 저 안에 얼마나 작은 사람이 들어가서 살길래..
하면서 퍽 궁금해했던 기억이 나.

끼니 때가 되면 밥그릇을 들고 밥 먹인다고 난리를 치기도 했었어.

그러고 보니 TV도 신기해 보였지만 제일 내가 신기해 했던 것은 역시 전화기였어.
전혀 사람같이 생기지 않은 것이 사람 목소리를 냈었거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 멋진 기계 속 어딘가에 놀라운 인물이 살고 있음을 알았어.
그 사람은 여자였는데, 이름은 '교환입니다' 였어.

그 사람은 무엇이든 알고 있었어.
누구네 전화 번호라도 주인집 아줌마가 묻기만 하면 척척 대답해줬었거든.


내가 이 전화기 속의 사람과 처음으로 대화를 나눈 것은
어느 날 집에 아무도 없을때였어.

공사작업대 앞에서 놀다가 나는 그만 망치로 손가락을 때렸던 것 같아.
(솔직히 이 부분은 좀 기억이 가물가물해. 상당히 아팠었다는 기억은 있는데...)


너무나도 아팠지만 집 안에는 나를 달래줄 사람이 하나도 없었으므로
울어봤자 별로 소용이 없을 것 같았어. 누가 있어야 울기라도 하지...
그때 나는 좀 영악했었나?

나는 쿡쿡 쑤시는 손가락을 입으로 빨면서 집 안을 헤매다가 어느덧 층계 옆에 오게 됐어.

그래! 전화기다! 전화기가 있었구나.

나는 얼른 응접실로 달려가 발받침 의자를 끌어왔어.
그 위에 올라서서 수화기를 들고는 귀에 대고 교환을 찾았어.
한두번 짤깍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작지만 또렷한 음성이 귀에 들려왔어.

'교환입니다.'

"손가락 다쳤어, 잉....ㅠㅠ"

나는 전화기에 대고 아프다고 펑펑 울었어.
이제 하소연을 들어줄 사람이 생기자 눈물이 기다렸다는 듯이 펑펑 쏟아졌지.

'엄마가 안 계시나요?'

"나밖에 아무도 없는 걸, 잉....ㅠㅠ"

'피가 나요?'

"아냐, 망치로 때렸는데 막 아파요. ㅠㅠ"

'냉장고를 열 수 있어요? 얼음을 조금 꺼내서 손가락에 대고 있어요.
금방 아픔이 가실 거예요. 얼음을 꺼낼 때 조심해야 해요.'

이렇게 가르쳐준 뒤, 그 사람은 상냥하게 다시 말했어.

'자, 이제 그만 울어요. 금방 나을테니까.'





그 일이 있은 뒤로 나는 무슨 일이든 모르는 게 있으면
'교환입니다'를 불러 도움을 청했어.

누나가 공부하는 지리책을 보다가 전화를 걸면
그녀는 워싱턴이 어디 있으며, 영국은 어디에 있고, 또 인도는 어디에 있고,
오리노코 강은 어디에 있는지, 또 어떻게 흐르는 지 자세히 가르쳐 주었어.

설명만 들어도 멋있어서, 나는 이담에 커서는
꼭 그 강에 가봐야겠다고 마음 먹을 정도였어.

그녀는 또 내 산수 숙제를 도와주었고
내가 키우는 병든 병아리에게 먹일 밥도 가르쳐 줬었어.

그리고 끝내 그 병아리가 며칠 안 가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어.
나는 즉시 '교환입니다'를 불러 그 슬픈 소식을 전했어.

그녀는 조용히 귀를 기울인 뒤
어른들이 흔히 어린애들을 달래 때 하는 말로 나를 위로했던 것 같아.

하지만 내 마음은 풀어지지 않았어.
그녀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조용히 말했었어.

'얘야, 죽어서도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


왠지 나는 한결 기분이 나아졌어.





하지만 난.....

어느 순간 부터 '교환입니다'를 찾지 않게 되었어.


가장 결정적이었던 원인은 주인 아주머니가 전화비가 많이 나왔다고
내 아버지한테 소리를 지르고 나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할 수가 없게 되었거든.



하지만 시간이 흘러 10대로 접어들면서도,
어린 시절 그 사람과 나눈 대화의 추억은 결코 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어.

간혹 어려운 문제나 난처한 일이 생기면
그 옛날 '교환입니다'에게 물어 올바른 해답을 얻었을 때의 안도감이 생각 나.
나는 그 목소리와 헤어졌음을 못내 안타까와 했었거든.


문득 생각이 나는데 이제는 나도 알 것 같아.
얼굴도 모르는 꼬마에게 자신의 귀중한 시간을 내어준 그 아줌마는
얼마나 참을성 있고 친절하며 이해심 깊은 사람이었던지를 말이야.






대학교 1학년 때였나?
내가 무얼 하는지도 분명히 모르면서
문득 옛날 살던 동네의 전화국을 불러 눌렀던 적이 있어.

'교환입니다.'

흡사 기적과도 같이, 너무도 귀에 익은 저 가깝고도 또렷한 음성이 들려왔어.


'교환입니다.'

애당초 그럴 생각은 아니었지만, 나는 나도 모르게 말을 하고 있었어.

"손가락이 너무 아파요...."


오랜 침묵이 흐른 뒤...
이윽고 속삭이듯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었어.


'아마 지금쯤은....'

'교환입니다'는 잠시 멈추었다가 이어서 말했어.

'.... 손가락은 다 나았겠지요..?'

"정말 아직도 계시는군요. 아마 모르실 거예요.
그 오랜 세월 동안 당신이 제게 얼마나 귀중한 분이었는지..."


'당신이야말로....'

그녀는 대답했어.

'....내게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 알고 있나요?
나는 평생 아이를 가진 적이 없었기 때문에
늘 당신의 전화를 예전부터 기다리곤 했답니다.
우습죠? 이런 얘기...'


결코 우습지 않았어.
하지만 나는 그 말을 입밖에 내지 않았어.

대신 내가 그동안 아줌마를 얼마나 그리워했는가를 말하고
나중에 고향에 내려올 때 다시 전화해도 좋으냐고 물었어.

'부디 그렇게 해줘요. 그냥 연희아줌마를 찾으면 돼요.'

"안녕히 계세요. 아줌마."

'교환입니다'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니 기분이 왠지 묘했어.



"다시 병아리를 키운다면 아줌마가 말해준대로 키울게요."

'그렇게 해요. 그리고 미국도, 영국도, 인도도...
또 오리노코 강에도 가봐야겠지요? 그럼, 잘가요....'







한참 뒤...
나는 다시 고향에 돌아와 전화를 걸었어.

'안내입니다.'



다른 목소리가 대답했어. 나는 연희 아주머니를 바꿔달라고 했어.

'친구분이신가요?'

"네..."


'.... 유감이지만
연희 아주머니는 몸이 아프셔서 지난 몇 년 동안 잠깐씩만 일하셨습니다.
그 분은... 한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


내가 전화를 끊으려하자 그녀가 물었어.

'잠깐만요, 혹시 OO씨 아닌가요?'

"네, 맞습니다."


'그러시다면 아주머니가 남긴 말씀이 있습니다. 편지지에 적어놓으셨지요."


"무슨 말씀인데요...?"

나는 물었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어.


'여기 있군요.
그에게 말해줘요. 죽어서도 살아갈 수 있는 다른 세상이 있다고...
그는 내 말 뜻을 이해할 거예요....'



나는 그녀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전화를 끊었어.
아주머니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었어.





이즈음 되니 그 아주머니가 다시 생각이 나.

이제 내 고민은 누가 들어주나.....









- 펌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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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Comments
26 장곡  
전에는 전화교환원이 있어서 교환을 해야 전화를 받거나 걸을 수 있었을 때가 있었지요.
전화가 오면 교환원이 그 집으로 연결을 해줘야 했지요.
그래도 신기했지요.
40 백마  
촌구석에서 있어서 저런 전화는 구경도 못했지만 전화기 옆에 돌리게 있어 그거 돌리면 교환원 나오고 전화기 하나로 마을 전체가 사용했어요...

추카추카 6 Lucky Point!

4 애플그린  
혀...형님들... 은 대체...

저는 다이얼 세대라

구전으로만 전해듣던 그 시절입니다
9 알투엑스  
다이얼 전화기 시대였던 80년대 초에도 아주 시골엔 교환이 있었답니다~ㅎㅎ

추카추카 14 Lucky Point!

10 자막요정  
어멋, 구럼 교환을 경험하신 세대시네요... (부정하기 있기 없기 ㅎㅎ)
우째든, 알투엑스 님은 처음 뵙는 것 같은데
제가 깨방정(?)이었네요 ㅡ,ㅡ  앞으로 씨네스트에서 자주 봬요^^
10 자막요정  
어멋, 형님이라뇨... 원로님, 전화기 발명 때부터 생존하셨으면서 ㅋㅋ
사실은 울 할머니께서 전화기 발명 초기부터 휴대폰 사용까지 다 겪으셨죠
올해로 꽉 채운 100세... 구래서 저도 유전적으로 기대 수명 100세ㅡ,ㅡ
100세면 100세 요정입죠 ㅎㅎ
우째든, 나이는 속이는 자들은 X침요 ㅋㅋ
애플그린 님은 원로님 해주시기로 했으니까
이런 개그 전 아주 쪼아요 ㅎㅎㅎ
(싫으셔도 봐주기~ feat. 핑클)

4 애플그린  
댓글내용 확인
10 백세요정  
댓글내용 확인
4 애플그린  
할머님이 장수하시는군요 저는 어릴적에 모두 돌아가셔서
얼굴도 기억안나고
외할머님 기억만 아련하네요
10 백세요정  
글쿤요... ㅡ,ㅡ;;
그런데요 무병장수하시면 좋은데 울 할머니는
지금 요양원에 계세요 ㅠㅠ;;
할머니 건강하셨을 때 여행도 가고
맛집도 모시고 갔어야 하는데 후회돼요
가족은 정말 건강할 때 있을 때 잘해야
하는 것 같아여

추카추카 17 Lucky Point!

12 블랙헐  
아직도 114 운영되지 않나요 ? 유료 이긴 하지만..... ^^*
저도 다이얼 세대~~~ 다이얼 돌리는 맛~~~ 크~~~ 1번이 제일 앞인가 0번이 제일 앞인가 제일 늦게 원위치 되는게~~~ 보는 맛도 있고 돌리는 맛도 있고~~~
요즘 다이얼 전화기 ( 취미 소장용 - 전화도 된데요 ) 꽤 비싸던데...... 돌려보고 싶다아아아앙~~~~ 
10 자막요정  
어멋, 다이얼이 뭐예욧 ㅎㅎㅎ
(없어 보이는 짓인 줄 알지만 어려 보이고 싶어서 시치미떼봤어요ㅋ)
음... 우리 아부지가 전화상회를 하셨더랬어요
구래서, 제가 문 사장 딸로서 전화에 대한 고증(?)을 하자면
청색과 백색 전화가 있었는데 백색이 더 비쌌던 거 같아요
그리고 그 시절에는 전화 회선이 부족해서 신청하고 1-2년
대기했어야 했고 '쁘락지'(???? 정확한 단어가 아닐 수도요) 같은 걸 해서
동일한 회선으로 한집에서 전화 2대를
안방 1, 거실 1 이렇게도 썼던 거 같고요
우째든, 요즘 애덜은 전화하라고 하면서
손가락으로 귀와 입에 대는 거 이해 몬한다네요 ㅡ,ㅡ
너무 오래 살았떠 ㅡ,ㅡ (난 옛날 사람)

우째든, 추억이 새록새록 돋는 글이네요^^
Many thanks to bluechhc~
20 큰바구  
백색전화 흑색전화라고 했을걸요. 백색전화는 본인이 직접 전화를 사서 쓰는 전화고 흑색전화는 전화국에서 전세(?)로 빌려쓰는 전화였을거예요
80년대 초만해도 있었는데 그후 다이얼전화에서 금성에서 NFC ->버튼을 누르는(전자식 전화기)로 발전해가죠
그 당시에는 삼성은 전화기를 만들지 않았어요 오로지 금성사에서만
그리고 말씀대로 전화 신청하면 1년내지 2년이 걸렸어요 개통할려며는 왜냐면 전화국에서 전화 신청접수를 받아서 그 지역에 몇회선을 증설할건지 계산을 하죠
그리고는 발주를 하고 공사를 들어가죠 그러면 지하케이블부터 전주 입상케이블 공사 맨홀공사 이렇게 공사가 들어가야 하니까 2년3년 걸렸어요 그래서 개통이 늦어졌죠
80년대 중반들어서는 무지막지 서울 경기지역이 개발되면서 무조건 케이블 공사부터 하니까 그때는 전화선이 남아 돌았어요..
그러다 80년대 후반에 금성사에서 광케이블을 세계최초로 개발을 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금의 인터넷까지 광케이블로 되는거예요.
머리카락 만한 광코어 속에 수많은 빛을 쏘아서 각기 여러가지로 부딪치지 않게 빛이 파장되서 전달되는거죠 그게 광케이블에 원리입니다 .
이상 내가 아는 지식하에서 말씀드렸습돠~ ㅋ
20 큰바구  
아. 죄송 ㅡ,.ㅡ;; 내가 일할땐 청색전화라고 하지 않고 흑색전화라고 했엇거든요 ㅋ
청색전화가 맞네요..ㅜㅜㅜ;;;;
29 언제나  
댓글들 쭈우우욱 보고... 무슨 소릴까???.... 시침 뚝...
10 백세요정  
ㅋㅋㅋ
아 놔, 우리는 어려 보일라고 모른 척하고 그라믄 막 없어 보임요 ㅎㅎ
우째든, '잘살아 보세'를 듣고 자란 새마을 운동 세대인 우리는 다이얼 전화 썼더래요
영화관에 키오스크가 없을 때라서 1-2시간 줄도 섰었고 그래서 암표도 대따 많았고요
은행에서는 출납 담당 직원이 손으로 통장에 입출금 내역 써주고
통장도 어찌나 만들기 쉬웠는지 은행별로 가지고 있을 수 있었다우
추억이 방울방울 돋소~ (feat. 주말드라마 '오작두'가 생각나네요 ㅎㅎ)
29 언제나  
흑백 테레비로 공포 드라마 <옥녀>를 보고 화장실도 가지 못했다는 건 비밀입니다...
10 백세요정  
ㅋㅋ
때찌때찌... 흑백 테레비 모르는 세대인 줄 알았자나요 ㅎㅎ
우째든, 연탄도 실제로 봤을 것 같아서 반갑소^^
29 언제나  
연탄집게로 맞을 뻔도 했다는.... 어머머... 뭐라는 거야!!!... ㅎ
주말 행복하게 보내세요.
10 백세요정  
ㅍㅎㅎㅎㅎ
완전 정감 돋소('오작두' 버전요 ㅎㅎ)
S 푸른강산하  
무언가 아련한 느낌이 전해져 옵니다.
10 꽁지없다  
한국판 어린왕자 같은 느낌이 오네요.
12 블랙헐  
'교환원'님 생각하니 영화 한 편이 떠오르네요.
레드 드래곤 (Red Dragon, 2002)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35733
맨헌터        (Manhunter, 1986) https://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15421

두 편인데 한 작품입니다. '레드 드래곤'이 리메이크 작품 ('양들의 침묵' 프리퀼이라 해야하나..... '양들의 침묵'은 1991년작 인지라 '맨헌터' 후속작이 맞겠죠? 
헌데 소설은 무엇이 먼저 출간 되었는 지 몰라서....ㅎ  두 작품 다 볼만해요~~~비교해도 좋더군요. (감독님들 한 가닥 하시는 감독님들인지라~ ^^*)  재미의 기준은 물론 제 기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