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 펜팔 친구
고등학교에 진학한 여동생이 날마다 자기 반 '이상한 애' 얘기를 했다. 예쁘고, 착하고, 작가 이상을 몹시 사랑한다는 별난 아이. 동생이 <오감도> 시집을 보여주며 이런 괴상망측한 책을 읽는 아이라고 덧붙였다. 그 아이가 너무 좋아서, 너무 멋져 보여서, 더 알고 싶어서, 그 아이가 좋아하는 책을 빌려 왔는데 도무지 이해를 할 수 없다고 투덜거렸다. 인근 학교 소년들은 이 예쁜 소녀와 짝사랑에 빠졌고 소녀들은 그 아이를 (요즘 말로 치면) 롤 모델이나 셀럽처럼 흠모하고 동경한다고 들었다. 펜팔이 유행하던 때라 호기심이 발동해서 편지를 썼다. 갱지 노트를 찢어 작가 이상에 대한 잡담을 적었고 동생 편에 편지를 들려 보낸 얼마 후 답장을 받았다.
초록색 글씨의 편지였다. 기분이 우울한 날엔 '오늘 나는 보라색입니다. 내 주위에 초록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보라색 편지를 보냈다. 어느 날엔가는 유치환의 시 '생명의 서'가 필사된 편지가 왔고 나는 '행복'과 '깃발'에 대한 답장을 썼다. 그녀는 까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뫼르소 흉내를 내기도 했다가,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과 아프라삭스가 나오는 <데미안> 얘기를 나누었으며, 소설 <젊은 느티나무>와 <좁은 문> 그리고 오토바이, 바다, 놀이터, 필름 카메라와 스물네 개의 세계, 봤던 영화들, 보고픈 영화들에 대한 수다가 이어졌다. 가장 많이 오고 간 편지 내용은 이상과 레몬과 날개에 대한 것들이었고 편지 봉투엔 종종 '石兄'이란 초록 글자가 적혀 있었다. 1986년 여름 무렵의 일이었다.
그 아이가 고3이 되던 해 나는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했다. 드문드문 편지가 이어지다가 흐지부지 끊겼다. 그녀는 대학생이 됐을 터였고 나는 1987년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린 군인으로 민간의 일들을 까맣게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재밌는 얘기를 들었다. 그 아이가 TV에 나온다고 동생이 알려주었다. 펜팔 친구를 TV를 통해 처음 본 셈인데 내가 상상하던 모습이 아니어서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편지를 주고받던 인연 때문인지 그 아이가 나오는 드라마나 영화를 챙겨 보기 시작했다. 남장여자 컨셉의 소매치기 조현지를 연기했던 드라마 <젊은이의 양지>에서의 모습을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고, 출연작 중 영화 <파란 대문>을 가장 좋아했다. 작가 이상을 사랑하던 그 아이는 운명처럼 영화 <금홍아 금홍아>에서 이상의 연인 '금홍' 역을 연기했다. 스크린으로 그녀를 보며 인연의 신기함에 대해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생명들이 폭죽처럼 터져 나오는 봄날, 내 첫 펜팔 친구의 부고를 접했다. 35년 전, 그녀로부터 받은 초록과 보라의 편지들을 오랜만에 꺼내 읽었다.
오른쪽으로 누운 글씨를 쓰는 사람에게 왼쪽으로 누운 글씨를 쓰는 사람이 편지를 씁니다. 며칠 전에는 비가 왔습니다. 나는 어두운 색의 비가 오는 날을 무척 좋아합니다. 그런 날이면 나는 아주 유쾌합니다. 영화를 얼마나 좋아하냐고 물었지요? 내가 꾸는 꿈마다 한 편의 영화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좋아합니다.
오늘 하늘빛은 어둠칙칙해서 참 좋았습니다. 며칠 전인가 국립 도서관에 가던 새벽에 안개가 끼었습니다. 연한 보랏빛으로 숨이 차게 달려오는 안개의 감촉은 아침에 먹는 귤과 같았습니다. 오늘 나는 보라색입니다. 내 주위에 초록색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슬픈 것은 아니지요. 교문 밖을 나선 후엔 시간이 황금같이 소중해집니다. 제임스 딘으로 가 마시는 블랙 coffee는 달콤합니다. 불행히도 혼자라는 것 외에는 다 그럭저럭 참을만합니다. 내 절실하게 느껴봤던 아름다움은 슬픔 그 자체였습니다. 그리고는 여름날 오후의 햇살에 반사되는 초록 잎들. 또 그리고는 서로 사랑하는 이들의 마주 보는 눈빛.
대학에 간다면 여대생이 아니라 그냥 대학생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아주 조금 살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많은 것들을 할 것입니다. 나는 제한되어진 삶 속에서 완전한 자유와 사랑을 가지고 살고 싶습니다. 그리고는 미련 없이 날아가 버릴 생각입니다. (몸무게를 좀 줄여야겠군)
이제 '완전한 자유와 사랑'을 온전히 누리며 영화를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영화 자체가 되었기를.
처음이자 마지막 펜팔 친구였던 이지은 배우의 명복을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