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끄러지지 마세요~" - 영화가 죽음을 예언할 때
umma님이 킹 비더 감독의 걸작 <군중>(1928)을 올린 김에 생각이 나서 몇자 적어봅니다.
<군중>은 거의 숏 바이 숏으로 뜯어보며 봐야할 만큼 이야기거리가 많은 영화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생각할 때마다 영화 속의 주인공 존으로 나오는 제임스 머레이의 죽음이 먼저 떠오릅니다.
너무 빨리 유성처럼 사라진 배우이기 때문이지요.
킹 비더 감독은 <군중>의 남자 배역에 처음에 스타 배우를 쓸려고 했다네요. 하지만 그 경우, 군중의 익명성을 나타내는 캐릭터가 파괴될 것 같아 오디션으로 신인 배우를 뽑으려 했다고 합니다.
뉴욕의 큰 사무실에 근무할 것 같은 사원처럼 보이는 배우를 원했지만 생각만큼 쉽게 구해지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어느 날 킹 비더 감독이 촬영장에서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엑스트라 중의 한 사람이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지르며 '실례합니다'하고 지나가더라네요.
그 남자를 보자마자 자기가 찾던 인물이란 걸 안 킹 비더는 바로 이 남자를 쫓아 달려갔습니다.
남자에게 이름을 묻자 제임스 머레이라는 대답을 듣고 킹 비더는 자신의 명함을 주고 다음 날 찾아오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제임스 머레이는 비더 감독이 장난을 친다고 생각했는지 다음 날에도 그 다음 날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비더 감독이 엑스트라들 사이에서 그를 찾아냅니다. 제임스 머레이는 캐피탈 영화관에 도어맨으로 근무하는 말쑥한 청년이었지요.
어빙 탈버그 앞에서까지 테스트에 성공한 제임스 머레이는 결국 <군중>의 주연 배우를 따냅니다.
<군중>의 성공과 함께 엄청난 스타 탄생이 이루어졌지요. 하지만 그 이후로 두 사람이 같이 영화를 만들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습니다. 운명이 그들을 피해갔던 것이지요.
킹 비더 감독은 영화 <쇼 피플>(1928)에 마리온 데이비스의 상대역으로 제임스 머레이를 캐스팅하려고 했으나 수포로 돌아갑니다.
이후 그를 다른 배역이나 스탭으로도 고용하려고 했으나 기회가 오지 않았나 봅니다.
킹 감독의 회상으로는 어느날 일을 마치고 스튜디오를 나오려는데 스튜디오 시궁창에 쓰려져 있는 그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참 뒤 <일용할 양식>(1934)를 찍으려고 준비할 무렵(이때 제임스 머레이는 결혼에 실패하여 이혼을 한 뒤였을 것으로 추정됩니다)에 그를 찾았다고 합니다.
주연 배우로 그를 캐스팅하기 위해서였죠. 할리우드 거리를 걸어가는데 부랑자 모습의 퉁퉁 부은 남자가 지나가는데 그 사람이 제임스 머레이였습니다.
그는 비더 감독에게 돈을 요구하며 술을 사달라고 하더라네요. 술집에 가서 그에게 몇마디 물어보자 제임스 머레이는 인사불성이 되어서 비더 감독에게 "엿이나 먹으세요~"라고 욕을 합니다.
킹 비더가 "그래, 지미 그게 너 방식이라면 너도 엿이나 먹어!"하고 쏘아대고 나옵니다.
그리고 소식이 끊겼다네요. 사람들이 비더 감독에게 종종 물었나봅니다.
"<군중>에 나왔던 그 잘생긴 배우는 어떻게 되었어요?"하고 말입니다.
킹 비더는 소문으로 그가 자살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의 죽음을 알려주는 편지를 받고 그가 어떻게 죽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 편지는 제임스 머레이가 죽던 날 같이 있었던 사람이 보낸 편지였습니다.
제임스는 거의 알콜 중독자가 되어서 거리에서 구걸을 하거나 사기를 치면서 생활을 했습니다.
그날도 무리들과 어울려 돌아다니며 돈을 빌렸습니다.
"나는 할리우드 스타인데 스튜디오에 돈 가방을 놔두고 왔다. 곧 스탭이랑 감독이 오면 바로 갚을테니 20달러만 빌려달라"
그리고 빌린 돈으로 술을 마시며 거리를 걷다가 갑자기 마치 배우처럼 광대짓을 하며 강물로 미끄러지며 뛰어들었답니다.
사람들이 장난인 줄 알고 깔깔대고 웃는데 그의 얼굴이 물속에서 천천히 떠올랐습니다.
주위의 사람들이 그를 겨우 건져내었지만 이미 그는 죽어있었다네요.
그런데 <군중>에는 마치 제임스 머레이의 죽음을 예고나 하는 듯한 장면이 등장합니다.
존과 메리가 살고 있는 집에 처가 식구들이 들이닥칩니다.
평소에 존의 모습을 탐탁치 않게 여기는 장모와 처남 때문에 존도 불편합니다.
마침 술이 떨어지자 존이 술을 구하러 밖으로 나갑니다.
문 밖으로 나서려는 존을 잡고 메리가 말합니다. "뭐 잊은 것 없어?"
존이 처가 식구의 눈치를 보며 메리에게 키스를 하자 메리가 이야기하죠.
"자기야, 얼음에 미끄러지지마!"
존이 대답합니다. "바보 같이 내가 왜 얼음에 미끄러지니?"
문 밖을 나온 존은 보기 좋게 계단에 쌓인 눈을 밟고 미끄러집니다.
이때 메리가 창문을 열고 말합니다.
"자기야, 미끄러지지마!"
두 번이나 나오는 미끄러지지 마라는 경고.
저는 이 장면만 보면 몸에 소름이 끼칩니다.
영화가 마치 촉망 받았던 배우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거던요.
할리우드에서 살아남을려면 어쨌던 미끄러지지 말고 견뎌야 한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1936년 제임스 머레이는 강물에 미끄러져 익사합니다.
그의 죽음은 자살인지 사고사인지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킹 비더 감독은 그의 일생에 관한 영화를 준비했으나 완성하지 못합니다.
할리우드가 제임스 머레이에게 접근해서 배우로 만들었으나 그는 결국 성공하지 못합니다.
영화 <군중> 속의 평범한 남자처럼 살다가 사라진 것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