릭 엔키엘, 박찬호, 디워

자유게시판

릭 엔키엘, 박찬호, 디워

1 ROCK 2 5475 1
모처럼 오후에 사무실에 앉아 인터넷 뉴스를 이리저리 넘기는데 낯익은 이름 하나가 뜹니다.
'릭 엔키엘'.
한 때 미국 프로야구 메이저리그에서 촉망받는 신인 투수로 잘 나가다가 플레이 오프게임 선발등판에서 '블레스 신드롬'이란 희귀한 정신병에 걸려 - 신체적으론 아무런 이상이 없지만 마운드에 오르면 스트라이크 존에 볼을 던지지 못하는 일종의 강박관념 - 최악의 투구로 경기를 마치고 나락으로 떨어져버린 비운의 야구선수.
이후에도 재기에 전념했지만 심마(心魔)와 부상의 악몽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빅 리그에서 사라져버렸지요.
하지만 불과 한 시즌동안 보여줬던 그의 화려한 투구는 몇 해가 지난 요즘에도 여러사람의 입에서 회자되곤 했었는데,이 릭 엔키엘이 타자로 재기해서 빅 리그로 복귀했고 그 첫 게임에서 홈런을 쳤다는 겁니다.
하루에도 수 없이 터지는 홈런 중 하나일 뿐이지만,이 친구의 한 방은 내 가슴에 오랜 진동을 남길 것 같습니다.
'천재'소리를 들으며 화려하게 데뷔했다가 오랜 좌절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던 한 젊은 야구선수가 역경을 딛고 오뚜기 처럼 다시 섰다는, 드라마틱한 이야기 때문만은 아닙니다.이보다 더 눈물겹고 감동적인 스토리는 메이저리그 역사 속에, 혹은 우리 주변에도 허다하지요.
내 가슴을 찡하게 만든 것은 별 것 아닌 홈런 하나를 감동의 드라마로 승화시킨 팬들의 엄청난 환호와 자신의 일처럼 기뻐하는감독, 동료들의 모습이었습니다. 비록 전형적인 아메리칸 휴머니즘의 한 장면이었더라도 그 모습은 정말 감동적이고 부럽더군요.
'이렇게 다시 해낼 수 있어! 절대 포기하지 말라구!'
이런 따뜻한 격려가 담긴 환호 속에 다이아몬드를 돌아 홈을 밟은 엔키엘은 리그의 홈런왕이나 월드시리즈 챔피언과는 거리가 멀지도 모릅니다. 단 한 개의 홈런 기록만 남기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삶의 여정 속에서 새로운 고난과 역경이 닥치더라도 굴복하지 않고 맞서 싸울 충분한 용기는 얻지 않았을까요?
헬멧을 벗고 관중들의 환호에 답하는 엔키엘의 눈 빛은 이미 그런 용기로 충만한 듯 보였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전성기 시절에 릭 엔키엘과 팽팽한 투수전을 벌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엔키엘을 기억하지요)
엔키엘은 투수로서 유일하게 찬란했던 한 시즌을 보내던 해였고, 박찬호 선수 역시 온 국민의 응원을 받으며 승승장구 하던 때였지요. 오늘 엔키엘의 홈런 소식이 담긴 게시판에는 여전히 박찬호 선수를 조롱하는 덧글들이 달려있습니다.
한 번 접고 생각하면, 이런 조롱마저도 박찬호 선수에 대한 기대감에서 나오는 것 아닐까 하지만,차갑게 꼬여있는 그들의 말투 어디에서도 '사람냄새'란 걸 느낄 수 없습니다.
박찬호 선수가 예전처럼 재기해서 펄펄 날아준다면 정말 좋겠지요. 하지만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고 좋은 시절이 있으면 반드시 나쁜 시절도 있는 것이 세상의 진리인 것을, 대부분 사람들은 박찬호 선수의 '좋았던 시절'에 받았던 선물을 잊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는 자신감, 물러서지 않고 맞서는 용기, 한국사람이란 자부심.
물론, 박찬호 본인이 유명해지고 돈도 많이 벌고 싶어서 건너간 미국이지요. 하지만 박찬호가 던지는 경기를 보면서 느꼈던 희열은 무엇이었을까요? 전 세계에서 자신들이 최고라고 으시대는 미국타자들을 삼진 잡을 때 환호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적어도 나는 그랬습니다. 박찬호 본인이 돈 많이 벌고 유명해지려고 건너간 미국이든 말든, 회사 숙직실에서 몰래 소주 한 병 숨겨놓고 봤던 LA 다저스 게임은 마냥 신나고 즐거운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만화가 최훈의 카툰에서처럼, 박찬호에게 일말의 빚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처럼 마이너리그에서 고생하는 시기라면 그 빚을 갚을 좋은 기회가 아닐까요. 본인에게 전달이 될지는 몰라도 따뜻한 응원과 격려의 한 마디를 해주는 것으로.
'박찬호 선수. 힘내요. 다시 할 수 있어요!'

요즘 영화 <디 워>가 아주 뜨겁습니다. 아니, 영화를 둘러싼 찬반론자들의 쌈박질이 뜨겁다고 해야 옳겠지요. 영화를 보고 썼던 리뷰처럼 나는 <디 워>에게 따뜻한 격려의 박수를 쳐주고 싶습니다. 영화 전문가들은 전체적인 짜임새의 퀄리티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살벌하게 비난들 하고 있지만 그들의 관점이 모두 옳다고 동의할 수 없습니다. 영화는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 공히 주관적인 것이므로 보는 사람이 어떤 이유로든 좋았다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전문가들의 지적처럼 짜임새있고 '영화적'인 영화가 아니었더라도 오랫만에 가족단위 관객들이 줄서게 만든 것은 분명 의미있는 일 아닐까요. 물론, 엉성하고 보완할 부분이 있는 영화이기에 지적할 수 있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부분은 이랬으면 좋겠다', '이건 좋았는데 저건 좀 별로였다'
적어도 '영화도 아닌 쓰레기' 혹은 '미제 토스터기의 조립품'이란 조롱보다는 덜 아픈 지적 말이죠.
<디 워>에 대한 이런 시각이 일방적인 애국심에 휘둘려 나온 것일까요? 영화를 영화 자체로 똑바로 보지 못한 결과일까요?
전문가 집단의 <디 워>에 대한 신랄한 평가는 박찬호 선수 관련기사에 어김없이 달리는 차가운 조롱의 덧글과 별로 달라보이지 않습니다. 저 대단한 평론가 중에서 누군가는 더 잘 할 수 있다고 격려해줬야 하지 않을까요.
물론, <디 워>는 평론가들의 악평으로부터 반사이익을 얻고 있긴 하지만 말이죠.

무조건 까대는 것 보다는, 좀 더 부드럽게 세상을 사는 일, 영화 보는 일...
왜 이렇게 우리나라에선 힘들게 여겨지는지 모르겠습니다...
극과 극, 이것 아니면 저것, 내가 자장면 먹으니까 너도 무조건 자장면 먹어야 하는,
우리나라 인터넷이란 곳에선 말입니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2 Comments
1 나무그늘  
  디워...<BR><BR>오늘은 정말로 더워...
1 전중원  
  덥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