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렬 칼럼] 옥주현과 이명박 - 관객은 임재범류를 ‘순정품’으로 보고 옥주현류를 ‘야매’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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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렬 칼럼] 옥주현과 이명박 - 관객은 임재범류를 ‘순정품’으로 보고 옥주현류를 ‘야매’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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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주현과 이명박”
‘진정성(眞正性)이란 무엇인가?’
김흥국이 웃겼다. MBC가 대중예술인을 경시하고 공정사회를 해친다며 1인시위를 한단다. 거기에 진정성이 없다. 이명박도 웃겼다. 소득이 낮아도 공정하면 행복하단다. 말은 맞는데 그 말에 진정성이 없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view.html?cateid=1020&newsid=20110613074704688&p=yonhap
진정성이란 무엇인가? 알아야 할 것은 진정(眞情)이 아니라 진정(眞正)이라는 거. 참되고 바른 것이 진정이다. 그렇다면 참되고 바른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의 결대로 가는 것이다. 각자 제게 주어진 길을 가는 것이다.
닭은 알을 낳는 것이 진정하고, 개는 집을 지키는 것이 진정하다. 개가 알을 낳겠다고 우기거나, 닭이 집을 지키겠다고 나서면 그것은 진심일지언정 진정은 아니다. 그것은 참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도둑놈은 도둑질을 할때 도둑질의 진정성을 인정받고, 사기꾼은 사기를 칠때 사기질의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가수는 노래를 부를 때 진정성을 인정받고, 삽질맨은 삽들고 설칠 때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농부의 아들 노무현 대통령이 시장에서 흙묻은 오이를 먹으면 진정성을 인정받지만, 호화빌라 이회창이 시장에서 흙묻은 오이를 먹으면 거짓쇼가 된다. 정동영은 뭐를 해도 진정성이 없다. 출신이 아나운서이기 때문이다.
코미디언이 장례식에 왔다면 고인을 위하여 웃음을 던져주는게 차라리 진정성이 있다고 하겠다. 눈물을 보여도 제 3자가 그것을 웃기려는 행동으로 오해하므로 차라리 가만있는게 더 나을 수도 있다.
진정성은 마음에서 우러난다고 해서 다 되는게 아니고, 열심히 한다고 해서 다 되는게 아니다. 진정성은 그 사람의 진심이나, 그 사람의 성의나, 그 사람의 본심이나, 그 사람의 열성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인위로는 결코 도달할 수 없다.
마이클 조던이 뜬금없이 메이저리그에 도전한 적이 있었다. 마이클 조던이 아무리 야구를 열심히 해도 거기에 진정성은 없다. 꽝이다. 우사인 볼트가 은퇴하면 맨유에서 뛰겠다고 설레발이 치는 것도 마찬가지다. 우사인 볼트가 설사 맨유에서 축구선수로 성공한다 해도 관객의 입장에서는 그게 판을 깨는 거다.
옥주현은 아무리 열심히 노래를 불러도 진정성을 인정받지 못한다. 진정성은 실력이 있어서 노래를 잘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뜻이 깊어서 진심으로 한다고 되는게 아니고, 감정이 복받쳐서 눈물을 흘린다고 되는게 아니다. 설사 온 몸을 다 던진다 해도 거기에 진정성은 없다. 전혀 없다. 맹탕이다.
그렇다. 오직 드라마의 기승전결을 완성시킬 때만 진정성이 통하는 것이다. 그 드라마의 기승전결에는 관객의 역할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이며, 옥주현의 경우는 노래를 잘할수록 도리어 관객의 역할을 흔드는 것으로 되기 때문이다.
옥주현이 활약을 할수록 불필요한 배역이 난데없이 뛰어들어 드라마의 흐름을 끊고 관객의 몰입을 방해하는 결과가 된다. 애초에 관객들에게 주어진 마음의 대본에는 ‘임재범 찬양, 옥주현 비난’으로 되어 있다고 보아야 한다.
문제는 기승전결의 원리다. 옥주현은 아이돌로 기(起)해서, 예능으로 승(承)하다가, 뮤지컬로 전(轉)했는데, 뜬금없이 나가수로 결(結)하려니, 네티즌이 '이건 아니잖아! 이건 아니잖아!' 하고 단체로 합창을 하는 것이다. 기승전결의 흐름이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은 극에서 이질적인 존재를 걸러내고 극의 진정성을 지키는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설사 옥주현이 노래를 잘 불러서 그 무대에서 이질적인 존재가 아님을 입증한다 해도, 지금까지 해온 ‘기, 승, 전~’의 과정이 이미 이질적이다.
화장실에 갔다온 사람이 식탁에 앉으려면 손을 씻어야 하듯이 이질적인 존재에 대한 관객의 제지는 정당한 것이다. 관객은 임재범류를 ‘순정품’으로 보고 옥주현류를 ‘야매’에 ‘사제품’으로 본다. 설사 사제품이 순정품보다 더 낫다고 해도 아닌건 아닌 것이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어서 미학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 노래를 못할 경우
– 노래도 못하는 이질적인 존재가 끼어들어 작품의 질을 저하시켰다.
◎ 노래를 잘할 경우
– 한 눈 팔던 사람이 자기 노래실력만 믿고, 오직 노래 하나에 인생을 건 순수한 사람들의 무대에 끼어들어 균질성을 필요로 하는 작품의 미학적 완전성을 훼손시켰다.
어느 경우든 마땅치 않다. 무엇인가? 관객은 여러 가수들의 작품들을 비교, 선택하는 제 3자의 위치에 포지셔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관객은 이미 자신이 주체가 되어 작품 속으로 깊숙히 들어와 있다. 관객의 역할까지 포함된 전체를 작품으로 보고 이질적인 존재인 옥주현이 그 작품의 컨셉을 망친다고 본다.
관객은 자신을 아웃사이더로 보고 역시 방송가의 아웃사이더인 임재범류에 동질감을 느끼며, 그동안 방송에 빈번히 출연한 메인스트림 옥주현을 거부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여기에 포지셔닝의 원리가 작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정성은 포지션 맞추기다.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다 채워져 있는데 골키퍼 한 명이 딱 없어서 애타게 찾고 있을 때 마침 딱 와주는 골키퍼라든가, 98이 완성되고 다만 2프로 부족할때 그 부족한 2프로를 임재범이 채워주었듯이, 마지막에 화룡점정을 해주는 사람이 진정성을 인정받는다.
임재범 한 사람이 들어왔을 뿐인데 나가수의 격이 달라진 거다. 마찬가지로 이소라 하나 나갔을 뿐인데 나가수의 격이 떨어진다. 꼭 필요한 요소가 되어서 남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줌으로써 널리 남을 이롭게 하는 사람이 진짜다.
지금 단계에서 옥주현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할 뿐이다. 널리 남을 이롭게 한 증거가 없다. 남이 다 지어놓은 밥에 숟가락 들고 덤벼서는 결코 진정성이 인정받을 수 없다. 필자가 옥주현을 안티하는 것은 아니다. 필자의 주장하는 바 핵심은 옥주현이 드라마의 기승전결에서 기(起)에 섰느냐 결(結)에 섰느냐다.
다른 사람이 노력해서 기, 승, 전까지 다 해놓았는데 옥주현이 마치 주인공이라도 되는 것처럼 마지막에 ‘짠’ 하고 나타나서 ‘결’의 열매를 챙긴다면 그건 아니라는 거다. 옥주현 입장에서는 이게 가수 데뷔나 마찬가지다.
기(起)로 보면 옥주현은 특출나게 잘 했다. 결(結)로 보면 남의 잔치에 밥숟가락 들고 덤빈 거다. 어떤 자세로, 어떤 포지션으로 다가서느냐다. ‘난 가수 아니고 뮤지컬 배우야’ 했다가 ‘사실은 나도 가수인데’ 이건 아니라는 거다.
마치 이명박이 동료들이 감옥에 붙들려 가서 고생할 때는 현대건설에 입사해서 잘 먹고 잘 살다가 민주화가 되자 ‘사실은 나도 학생 때 학생운동 좀 했는데’ 하고 밥숟갈 들이대는 것과 같다.
관객들은 오랫동은 음지에서 묵묵히 씨앗을 뿌린 가수들이 가을이 되자 마침내 수확의 잔치를 벌이는 무대로 보고 있는 것이며, 옥주현은 뿌려놓은 씨앗이 없다고 본다. 오히려 열매만 털어간 자가 아닌가 하는 관점이다. 옥주현은 그동안 방송가에서 챙긴 것이 전혀 없었는가? 임재범은 확실히 없었다.
진정성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서 나오는 것이다. 진정성은 마음의 진심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진정성의 진은 참 진(眞)자다. 진짜냐 가짜냐다. 진짜려면 기승전결의 전체과정이 다 진짜여야 한다. 씨앗부터 진짜여야 한다. 뿌리부터 진짜여야 한다. 근본이 진짜여야 한다.
손학규처럼 딴나라당에서 넘어오거나, 김영삼처럼 자유당에서 넘어오거나, 박정희처럼 총칼들고 담 넘어오거나, 이명박처럼 노가다판에서 굴러먹다 오거나, 박근혜처럼 유산상속문서들고 나타나거나, 이건 중간에서 밥숟가락 들고 끼어든거지 제대로 된 드라마의 기승전결이 아니다.
기승전결이 되려면 처음 씨앗단계부터 제 위치에 심어져야 한다. 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자만, 그 민주주의 씨뿌리기에 함께 파종한 자만, 한결같이 그 밭과 들판을 지키고 있었던 자만, 그 민주주의 결실을 수확할 자격이 있다. 그것이 참되고 바른 것이다. 곧 진정(眞正)하다고 하겠다.
뿌린 자가 거두는 것이 진정성이다. 민주주의 제단에 그대는 무엇을 뿌렸는가? 방관자는 원초적으로 자격이 없다. 중간에 자리 비운 자도 자격이 없다. 곧 관객들의 준엄한 심판이 있을 것이다. 아직은 관객들의 컨셉이 다른 곳에 가 있지만, 조만간 관객들은 민주화 운동 50년 역사의 최종결산에 흥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기승전결의 법칙대로다.
처음 등장했다가 마지막까지 가는 것은 어디까지나 주인공이다. 중간에 끼어든 자는 중간에 나가는게 드라마의 공식이다. 옥주현을 비판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옥주현이 뭔가를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자신이 ‘나가수’를 통해서 처음 가수로 데뷔하고 있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거다.
임재범 등은 이전부터 널리 대중을 이롭게 했고, 이제 그동안 기여한 공로에 대한 평가와 보상을 받으려 한다. 옥주현은 이전에 희생한 것이 없고, 이번에 처음 대중에게 기여했다. 그리고 지금 기여한 것 이상으로 얻고 있다. 투자한 사람이 바로 이익을 챙겨가는 법은 세상에 없다. 옥주현은 지금 투자하고 10년, 혹은 20년 후에 정당한 평가와 보상을 바란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드라마의 법칙이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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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7 외자막만  
저도 느끼는 것이지만, 가요라는 것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인생을 노래한다는 윗어른들의 가르침이 와닫더군요.
마음의 감흥이 없는 최신가요와는 멀어지고, 70-80년대 음악과 클래식을 점차 좋아하는 저는...늙어가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