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사진렌즈 개발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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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사진렌즈 개발 이야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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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서 계속~~~


 


 


겉보기에는 별 다를 바 없이 그저 사소한 만남이라 생각되는 두 사람의 만남에는


깊이가 있었다.


 


오사카를 방문하면 나가오카(長岡)는 언제나 잊지 않고 타지마(田嶋)를 만나고 있


었다.  타지마(田嶋) 역시 상경(上京)을 하게되면 꼭 나가오카(長岡)를 찾아갔다.


사심(私心)이나 그름이 없는 타지마(田嶋)의 성격에 나가오카(長岡)도 자신의 마음


을 열어 놓은 것이었을 것이다.


 


타지마(田嶋)가 아사다(麻田)를 나가오카(長岡)앞에 데려갔던 것은, 아사다(麻田)


로 하여금 일본광학의 신종유리용 옹기 제조기술을 습득시키기 위해서였었다.


아마도 그것은 나가오카(長岡)가 타지마(田嶋)를 대하는 호의에서 비롯된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아사다(麻田)는 1개월동안 일본광학의 공장에서 옹기의 제조실습을 받게 되


었다.


그 기술은 석고로 형(刑)을 만들고 점토를 부어넣는 거푸집에 다시 금속을 녹여 부


어 넣는 제조 방식의 옹기 기법이었다.


이로 인해 흡수성이 높은 석고에 의해 옹기의 내면에 라이닝(Lining)층이 만들어


지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미놀타의 이타미(伊丹)공장에서는 아사다(麻田) 부자(父子)가 대공


시의 와타야(綿谷政治郞)로부터 배운 전통적이고 『1년을 단위로 하는 수작업에 의


한』 수법으로 옹기를 만들고 있었다.


이것은 당시 미놀타에는 아직 알려져 있지 않은 생소한 방법이었었다.


 


그 후로 10년 후, 소화 30년대 후반이 되면서 유리용해는 연속용해(連續溶解)로 바


뀌어 있었다.


각 기업들도 이 분야에 몰두하고 있었으나, 미놀타에서는 아사다(麻田)가 백금(白


金)옹기의 외면(=겉, 바깥)을 보호하는 보조옹기(-白金보조옹기는 고온에서


연화(軟化)해 버리기 때문에, 옹기에 집어넣는 2중 구조로 되어 있다)의 제작면


에서 독자적인 노하우(Know How)를 지니고 있었다.


이 기술에 의해 옹기의 수명은 연장될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일본광학으로부터 젊은 사람 하나가 찾아왔다.


아사다(麻田)가 그를 직접 응접하였는데, 이것은 타지마(田嶋)로부터 나가오카(長


岡)에게 전해져야 할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사다(麻田)는  금속을 녹여 주형에 집어넣는 제조법을 일본광학으로부터 배워와


서 이것을 더욱 한층 발전시킨 『연속용해 옹기제작기술』을 실현하였고, 이것을


다시 일본광학에 되돌려 가르쳐 주는 것이 가능했었다 고 그 당시를 회상하며, 그


는 아직도 그 일이 참으로 기쁘고 행복했었다는 듯한 표정으로 이야기해 주고 있었


다.


 


그 후 아사다(麻田)는 회사의 총무(總務) 직책을 맡아 일을 하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가 마주친 것이, 이미 앞에서 이야기했던 베타렌즈설계의 기인 사이토


우(齊藤利街)였었다.


사이토우(齊藤)는 독신이었고, 사이토우(齊藤)의 가까이에 있는 제자 아마리(天理)


역시 아직 독신으로, 회사가 제공해준 한 채의 집에서 자취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별난 한 쌍의 사내들은 특이한 성격과 주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이미 전후(戰後)는 아니다』라고 말하여 지던 소화 30년대 중반까지, 주


위를 어지럽게 하고 있었다.


 


 


렌즈의 코팅


전쟁이 한창이던 소화 18년(1943) 가을, 싱가폴에 독일의 잠수함이 기항하였다.


이 때 독일의 사관들이 지니고 있었던 렌즈는 청색의 빛깔을 띄고 있었다.


그 쌍안경을 들여다보면 시야가 환하게 밝아져 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미 독일에서는 반사방지막(反射防止膜)이 실용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렌즈의 표면에 얇은 막(膜)을 입히면 빛의 반사를 방지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이 기술은 이미 19세기 말  데니스 테일러 에 의해 발견되어 졌던 기술이다.


 


해군이 지니고 있는 쌍안경 등은 바닷바람을 맞게되면, 그 표면이 산화(酸化)되어


그을음이 발생하게 되어 있었다.


렌즈가 낡아져서 내부에 그을음이 들어가 생기면, 그 색이 바래지면서 시야가 밝아


져서 잘 보이게 된다는 오래 전부터 선원들만의 사이에서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징


크스가 있었다.


 


푸른빛이 도는 독일의 렌즈를 보고 온 일본 해군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그 시대의 광학기기는 해군에게 있어 중요한 병기 중 하나였으며, 특히 쌍안경은


해군사관(士官)들에게 있어 눈과도 같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광학병기(光學兵器)는 이미 이전부터 렌즈로부터 가능하였었던 것이다.


그러한 렌즈의 기술에 있어서 뒤쳐져 있었던 것이다.


 


소화 3년(1941) 11월 일광개전(日米開戰=미일전쟁)의 직전에, 일본의 독일기술조사


단(技術調査團)이 귀국하였다.


그 때 해군의 마츠오(松尾) 대좌는 『독일에서는 렌즈의 표면에 막을 입혀 빛을 정


확하게 통과시키는 처리기술이 실제로 행해지고 있다』라고 보고 하였다.(-日本光


學工業史:소화 30년 간행)


조사단은 스위스에도 갔었으나, 그 렌즈의 코팅장치나 실제로 행해지는 현장의 견


학은 거부당하였다.


스위스에서는 소화 10년(1935)에 렌즈코팅기술이 완성되어, 제 2차 대전 초기에는


이것에 빨간 글씨로  T"라는 마크를 입혀 조나-F15(ゾナ-F15)가 발매되고 있었다.


 


스위스는 이와 동시에 이 부분에 있어 특허도 취득하였으나, 군사적인 면에서는 극


비로 부쳐졌다.  동맹국인 일본조사단에게 조차도 견학을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진공증착(眞空蒸着)의 코팅기술은 1935년에 유명한 아메리카의 스토론의 논문과 동


년(同年)에 나타나고 있었다.


 


코닥에서도 6년이나 뒤늦게 되어서야 코팅기술이 가능하게 되어, 소화 16(1941)에


엑토라(-エクトラ) 용으로 전면 채용하게 되었던 것으로, 일본의 출발이 늦어졌던


것은 자명한 것이었다.


 


 


해군의 코팅연구


소화 17년(1942) 5월, 해군에서는 요코스카(橫須賀市) 공창(工廠=군에 직속되어 군


수품을 제조하던 공장) 아오키(靑木)대좌의 지휘하에 『광학병기의 투과율을 양호


하게 해주는 연구』 라는 테마로 모리타(森田)가 주무(主務)담당이 되어, 서서히


연구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모리타(森田)는 이화학(理化學)연구소 출신의 아직 30대 전의 젊은 조병(-造兵:무


기를 만드는)중위로서, 기술적으로는 확실한 견식과 실행력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었다.


당시 같은 부서에 스나즈카(砂塚弘道-戰後 미놀타에 입사)라 하는 화학자가 있었


다. 이 사람은 산(酸)을 처리하여 유리의 표면에 규산막(珪酸膜)을 입히는데 있어


일단의 성과를 올리고 있었다.


그 연구성과가 『광학병기의 투과율을 양호하게 하는 연구』의 제 1 성과였었다.


 


제 2회는 모리타(森田) 자신이 다중막(多重膜)을 사용, 반사(反射)가 제로(0)가 되


는 조건을 파동방정식(波動方程式)으로부터 찾았던, 소화 18년(1943)의 보고(서)


였었다.


이것과는 별도로 진공증착법(眞空蒸着法)으로 불화(弗化)칼슘의 막(膜)을 씌워보려


는 연구가 시도되었었으나, 좋은 성과가 나오지 않았었다.


 


모리타(森田)는 증착기(蒸着機)의 진공도(眞空度)를 높이기 위한 개량연구에 매우


고심하고 있었다.


당시 가능했던 방법은 산처리(酸處理)에 의한 방법밖에 없었기 때문에, 소화 17년


여름, 산처리에 대한 강습회(講習會)를 요코스카(橫須賀)에서 개최, 각지 공창(工


廠)의 담당자들이 모여들어 산처리의 실습에 대해 직접 경험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산처리(酸處理)에는 예상치 못했던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처리에 의해 유리에 예상치 못했던 결함과 부식이 확대되는 것을 알게되었고, 이


처리방법은 중지되었다.


 


모리타(森田)와 동료 연구원들은 Langmuir(ラングミュア)막(膜)에 대해서도 실험을


하여 보았으나, 이것도 역시 시간이 지남에 따라 막에 변화가 일어나는 현상이 있


어서 안정성이 없었다.


 


ps.참고


Irving Langmuir : 1881. 1. 31(미국 뉴욕 브루클린) ~ 1957. 8. 16(매사추세츠 팰머스)


미국의 물리화학자:1932년 고체 및 액체 표면의 분자막을 연구해 콜로이드 연구와 생화학에


새로운 장을 연 공로로 노벨 화학상을 받았다.


 


결국 진공증착법(眞空蒸着法)밖에 없다고 판단한 모리타(森田)였으나, 그 실현을


위한 수난과 노고가 그 후 오랫동안 계속되었다.


천연의 빙정석(-氷晶石=수정?)은 그 입수에 있어서 너무도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인조빙정석(人造氷晶石)을 사전에 가스로 화로에서 가열하여, 그것을 증착하면 양


호한 막(膜)이 생성되었다.


 


그 즈음, 나고야(名古屋)대학의 우에다(上田良二)교수의 지휘하에서도 빙정석을 사


용하여 실험적인 장치로서 튼튼한 막을 만들었으며, 응용물리지(-應用物理誌:소화


18년)에 발표되었다.


그 후 모리타(森田)는 우에다(上田)를 방문하여 만나 서로의 성과에 대해 확인하였


다.


 


모리타(森田)는 소화 18년 가을부터, 스스로 독립하여 자비로 자신만의 아이디어에


의한 증착기(蒸着機)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 장치는 상당히 발전, 고안되어 있


었다.


커다란 잠망경의 콘덴서(-コンデンサГ:condenser)렌즈의 양면을 일회에 증착하는


것이 가능토록 하는 2층(層)구조로 되어 있었고, 텅스텐(タングステン)증발(蒸發)


소스(ソГス)가 위아래에 6군데씩 배치되어 있었다.


이 소스(-ソГス:sauce)에 사전에 미리 무게를 맞추어 두었던 빙정석(氷晶石)을 놓


은 후, 전부 한꺼번에 증착시키면 적절한 두께의 막이 입혀졌다.  이 장치를 사용


하여 코팅의 필요가 더욱더 높았던 잠수함의 장명경에 실제로 배치되었다.


 


코팅처리가 된 잠망경은 그 투과율이 2~3배가되어 여명(黎明), 황혼(黃昏) 무렵에


있어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하였다.


잠수함은 이런 어두컴컴한 시간대에 은밀하게 적에게 접근하여 어뢰공격을 가하는


것이 본직이었다.


그렇기에 요코스카(橫須賀)에 입항하는 잠수함들은 그들의 망원경에 코팅을 희망하


였다.


 


이러한 이유로 각 해군공창(工廠)에서는 코팅을 실시할 필요성이 높아졌고, 이를


위해 소화 19년(1944) 봄, 요코스카(橫須賀)에서 강습회가 열렸다.


여기에는 각지의 해군공장의 광학공장 외에도 일본광학(日本光學), 동경광학(東京


光學)도 참가하고 있었다.


 


코팅장치를 요코스카(橫須賀)로부터 각 공창에 배치하였으며, 이 장치의 배달은 함


정본부(艦政本部)의 이즈미(江角)칙임기사(勅任技師)가 분주하게 움직여, 전문 메


이커로 발주하게 되었다.


이 속에는 글라스제 힉맨(-ヒックマン:Hickman)형(型) 확산(擴散)펌프(-東京,향도


[向島]의 中里製作所)와 로터리펌프(-大亞機械)가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빠르게도7월부터 吳(-중국을 지칭) 공창(工廠)에서, 수리를 위해 입항했던


잠수함의 광학병기렌즈 전부에 코팅을 입혔다고 한다.


 


모리타(森田)는 투과율(透過率)을 양호하게 해주는 연구』의 제 3회로 하여, 이 장


치를 발표하였다.


 


명제(命題)를 원대한 가슴으로 달성하였던 모리타(森田)는 『지도자로서 행복함을


느꼈던 그 일을 지금도 잊어버리는 것은 불가능하다』라고 기록하여 남기고 있다.


 


민간회사(民間會社)에 대해서도, 소화 19년 9월에 일본광학(日本光學), 동경광학


(東京光學), 치요다광학정공(千代田光學精工=미놀타) 등에도 그 장치(裝置)가 배급


(=당시 文章用語 그대로) 되었으나, 민간(民間)의 반응은 적극적이지 못하였었다.


 


일본광학이 소화 14년(1939)경부터 스트롱(ストろング)추시(追試:남이 실험한 것을


다시 실험 확인함) 쌍안경 등 요코스카(橫須賀)에 납입하였던 물건들은 약속하였던


코팅이 되어 있지 않았었다.


별수 없이 해군이 직접 그것들을 다시 분해하여 렌즈에 코팅을 입히고 재조립한


후, 함선에 장비로 배치하는 꼴이 되어 있었다.


일본 광학에서도 이 시기는 아직 코팅을 정상적으로 실시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다.


 


미놀타에서도 이 장치를 두고 힘겨워 하고 있었다.


이것을 검토(檢討)할 인재가 없었던 것이다.


 


이 당시 시대를 보면 해군은 벌써 군함건조(建造)의 계획이 없었고, 함정본부(艦政


本部)도 특별히 수행해야할 임무가 없었다.


해군항공기술창(=空技廠)의 광학부장(光學部長)은 무라다(村田)대좌의 뒤를 이어,


함정본부의 이즈미(江角)소장대우가 역임하고 있었다.


이 이즈미(江角)가 소집한 회의에서 코팅에 관해 이즈미(江角)는 민간 각 회사의


대표들에게 차례차례로 질문을 하였었다.


그러나 어느 회사고 만족스럽게 코팅을 완성한 회사는 없었다.


미놀타에서는 무카이(-向井,후일 상무)가 출석해 있었다.


 


『치요다(千代田=미놀타)는 어떻습니까?』라는 질문에 『지금은 불가능합니다』라


고 무카이(向井)가 대답하자 이즈미(江角)은 쓴 웃음을 지으며 『역시 그런가!』로


짧게 끝을 맺었다.


 


해군이 호루라기를 불어대며 유난을 떨어대도, 광학회사들에게 있어 코팅문제는 참


으로 중요하면서도 골칫거리 같은 문제중의 문제였다.


그것은 당시의 광학메카들에게 있어서는 친숙치 않은 진공기술(眞空技術)과 화학지


식이 부족하였던 탓이었을 것이다.  해군으로부터 미놀타가 배급받은 『투과율(透


過率)을 양호하게 해주는 연구』는 손도 대지 않은 상태 그대로 공습(空襲)을 우려


하여 오사카(大阪)교외에 있는 미노오(箕面)소학교에 해군으로부터의 위임을 받아


(=보류된 것으로 하여) 소개(疎開)되었다고 한다.


 


 


육·해군에 의한 전시(戰時)연구


- 앞서의 일이 있기 조금 앞선 소화 19년 5월, 육·해군 공동으로 『전시동원회의


(戰時動員會議)』라 하는 기관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육·해군이 일체가 되어 회합이 열렸다.


일본의 육·해군이라는 조직의 둘로 나눠진 기능은 좀체로 조화가 되지 않는 조직


으로, 전쟁의 패색이 짙은 속에서도 육·해군의 보스(=장성)들은 더욱 의지를 굳혀


패권을 다투고만 있었다.


당시 민간기업들은 그런 틈바구니 사이에서 곤혹스러웠었다는 이야기가 당시 여러


차례 전해지고 있었다.


 


한편 해군내부에서도 같은 요코스카(橫須賀市)의 포술학교(砲術學校=포병학교)의


대함거포주의(大艦巨砲主義)와 『횡공(橫空=橫須賀海軍航空隊)』의 『항공주병론


(航空主兵論)』이 이 일에 대립하여 불모(-不毛:쓸데없는)의 의논들만이 계속되고


있었다고, 생전(生前)의 무라다(村田)는 회고하고 있었다.


 


이 전시연구는 대학의 교관들과 연구기관의 연구자들을 모아, 전시테마로 군이 연


구시켰던 것이다.


거기에서 코팅의 실용화(實用化)가 테마 중 하나가 되었으며, 이것은 최초 해군항


공기술창(海軍航空技術廠=空技廠)의 광학부장을 맡고 있었던 무라다(村田)대좌가


도맡아 관리하게 되었다.


항공관계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결국 이 전시연구는 해군공창(海軍工廠)에


서 무라다(村田)가 주로 잠수함의 잠망경을 대상으로 하여 앞서 있었던 코팅의 연


구성과를 이어받아 계승하는 것이 되었다.


 


육·해군 공동이라 하더라도 결국은 공동분야에 있어서의 일 뿐이었던 것이다.


 


다시 돌이켜 상상해 보면, 요코스카(橫須賀)공창의 모리타(森田)의 노력으로, 뭔가


조금 길이 보이기 시작한 코팅기술이었다.


 


그러나 결국 최종목표는 견고하고 벗겨지지 않는 코팅 막을 활용하여, 여러 가지


가지각색의 광학병기용 제품들을 안정공급(安定供給)하는 것이 당시의 최우선의 테


마였었던 것일 것이다.


이 회의에서 해군의 야마다(山田), 모리타(-盛田,후 니콘의 사장) 등이 출석하였으


며, 동경공업시험소(東京工業試驗所=東工試)와 대공시 등 에서 경쟁적으로 연구하


게 되었었다고, 생전(生前)의 무라다(村田)는 말하고 있었다.


 


다시, 이 위원회의 위원장은 육·해군이 3개월씩 교대로 맡기로 결정되었으나 간사


(幹事)는 단기간에 교환하는 것은 어렵다는데 의견이 모아졌다.


그래서 소화 15년(1940)에 동경화학(東京化學)을 나와 토시바(東芝)연구소에 들어


가, 그 후에 육·해군의 촉탁을 받았던 도바시(土橋-후, 코베[神戶]대학교수, 元


미놀타 고문)가 육·해군 쌍방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던 탓에 이 사람이 떠맡게


되었다.


도바시(土橋)는 종전까지 간사를 맡아 내각(內閣)의 전시연구본부로부터 연구비를


얻어, 보고서를 종합하는 일을 계속하였다.


 


이 도바시(土橋)는 무라다(村田)의 요청으로, 소화 18년 공기창(空技廠)의 광학실


험부 촉탁으로, 코팅연구에 종사하고 있었던 것이다.


종전이 가까워질 무렵, 그는 공기창에 관계하여 광학병기를 만들고 있는 회사 전부


에, 코팅을 가르쳐 주는 일을 하고 있었다.


도바시(土橋)교관은 오파마(追浜)의 항기창(航技廠)에 4일간 묶으며 일하면서, 공


기창(空技廠)에 관계된 광학기기회사들의 관계자들에게 코팅에 대해 집중교육을 실


시하였다.


 


이 교육을 마치고 도바시(土橋)가 고베(神戶)의 자택에 돌아와 보니, 자택은 이미


전화로 불타 있었다.


이렇듯 당시의 일본은 이미 손을 써볼 방법도 없었을 뿐만 아니라 실상은 코팅문제


에 신경 쓸 틈이나 경황도 없이 어수선하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대공시에서의 연구


소화 16년 동경문리대(文理大)로부터 대공시에 전근하였던 아사코시(淺越)(사진2-


후, 오카야마(岡山)大學理學部長. 元, 미놀타 연구부장)는 앞서 기술했던 전시연구


원(戰時硏究員)이 되어 렌즈코팅을 담당하였다.


그리고 이와다(岩田)등 연구원들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구하였다.


 


그때의 내용에 대용에 대해서는 대공시『50년史』에 의하면, 『그 일부를 제외한


서류가 보관되지 못해 자세히 설명하기 어렵다』고 기록되어 있다.


군부의 시야에 거슬려 눈치를 보느라 그 기록마저 함부로 적을 수가 없었던 것이


다.


 


그 연구는 진공증착법(眞空蒸着法)에 의한 弗化마그네슘 코팅을 최초부터 문제로


꼽고 있었다. 그들은 안정적인 방법으로 대량생산이 가능한 진공증착법의 확립을


도모하고 있었던 것이다.


 


아사코시(淺越)와 그들 연구원들의 업적은 후일 일본의 카메라회사에 전승되었고,


그 성과는 전후의 평화산업(平和産業)에 크게 공헌하게 되었다.


 


아사코시(淺越)는 이 후 『50년史』에서,


『 군은 코팅에 기를 쓰고, 연구를 재촉하였다.  이와다(岩田)군 등의 도움에 의해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여 그 방법을 완성하였다.  12Cm망원경 렌즈에 처리했던 것을


요코스카(橫須賀)에 가지고 가게 하여, 부근의 산야(山野)에서 해질 녘 그리고 어


둠이 깔릴 무렵과 해가 뜨는 시간대에 성능을 확인한 결과, 그 효과에 대해 실감하


고 크게 기뻐하였었다.   이 기술을 이제부터 모든 광학병기에 시술하여 전선(戰


線)에 보내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그 시점에서 종전(終戰)을 맞이하게 되었


다.


이 기술은 전후(戰後) 평화산업계(平和産業界)에서 주목을 받았으며, 미놀타를 시


작으로 다수의 여러 카메라 회사들이 이 기술을 배우기 위해 장기간 교환기술자를


대공시에 파견하는 기업도 있었고, 또는 대공시 주최의 강습회나 도쿄에서 개최하


는 상공성(商工省) 주최의 강습회에(=강사로서) 출석하는 등, 그 기술을 사용하여


미놀타를 시작으로 다른 회사들도 연달아 카메라를 발매하는 것이 가능하기에 이르


렀던 것이다.


그 때 연구했던 것이 지금은 어떠한 렌즈에도 처리되어 있는 반사방지처리(反射防


止處理)의 근원이었다.  이 진공하에서의 방막증착(薄漠蒸着)의 수법은, 이 후 대


공시의 자랑할만한 성과들 중 하나였었다.  그 후에도 이와다(岩田)와 연구원들의


이중막색소증처리법(二重膜色消增處理法-미놀타에서 실시), 다중막간섭(多重膜干


涉)필터의 연구, 대형증착장치(大型蒸着裝置)의 개발 등은 학회로부터 주목을 받고


있다.----- 』


고 기록하고 있다.


 


 


전후(戰後)카메라 렌즈의 코팅


종전(終戰)을 맞이하여, 해군대좌 무라다(村田)는 미놀타의 연구부장으로 초빙되었


다.


이 후 무라다(村田)는 카메라에 해군시대의 기술을 적용하는 것이 적용가능하지 않


을까 생각하고 있었다.


그 중 코팅을 제일 우선후보로 올렸다.


 


이전부터 전시연구(戰時硏究)에서 무라다(村田)는 대공시의 아사코시(淺越)와 그의


부하 이와다(岩田)와 친한 사이였었다.  즉시 무라다(村田)는 대공시를 방문 협력


을 요청하였다.


 


대공시의 기술을 미놀타에 전해준 것은 야마모토(山本良次)라 하는 인물이었다.


원래 그는 유리기술자였으나, 이 사람은 참으로 비상하게 열심히 일하는 인내심이


강한 사람이었다.


무라다(村田)는 이 사람을 대공시에 파견하여 코팅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야마모토(山本)가 사용했던 증착기계(蒸着機械)의 유확산(油擴散)펌프(-기름을 확


산시키는 펌프?)는 지금까지의 사용되어졌던 해군시대의 글라스(-유리)제가 아니라


주철제(鑄鐵製)의 것으로, 즉시 카메라렌즈에 코팅을 입히는 연구를 시작하였다.


 


최초 실험장은 미놀타의 연구부에 있었던 니시노미야(西宮)공장에, 대공시의 장치


를 잠시 빌려 모습을 갖춘 듯 하였으나, 곧 미놀타의 사카이(堺)렌즈공장에 같은


설비를 들여와, 거기에서 야마모토(山本)가 코팅작업을 시작하였다.


 


미놀타의 전후 양산(量産=대량생산)렌즈 코팅의 출발은 업계 중에서 가장 빨랐었


다.


그것은 당시 해군의 요청으로 코팅의 양산화기술(量産化技術=대량생산화기술)에서


실무적인 책임이 높았던 대공시가 지리적으로 가깝고, 또 무라다(村田)라 하는 해


군 광학기술의 보스(Boss)가 전후(戰後)에 미놀타에 들어와 기술도입의 교량역할을


재빠르게 행하였던 탓이었다.


 


소화 21년(1946) 8월 발매 미놀타 세미ⅢA 에는 마젠타(マゼンタ-magenta)색을 입


힌 75mm f3.5 코팅렌즈가 붙어있었다.  이것은 미놀타가 설계에서부터 제조까지의


전 과정을 자사(自社)에서 처리한 최초의  로커(ロッコ-ル)  렌즈였다.


동시에 이것은 일본에서 최초의 弗化마그네슘을 진공증착법에 의해 증착하여, 대량


생산된 카메라용 ** コ-Оッド ** 렌즈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가 소화 23년 4월 미놀타에 입사하여 처음 맡은 임무는 미놀타의 세미라 불리


는 슬링(ス-リング,SLING) 카메라를 검사(檢査)하는 일이었다.


 


  청색을 입힌 렌즈가 コ-Оッド 렌즈다  라고 해군감찰관(-미놀타는 조금 이상히


긴 하지만, 상사를 직명(職名)으로 부르지 않는 습관이 있었다. 그런 이유로  후꾸


자와상(福澤さん) 이라고   거침없이 이름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에게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이것을 읽어보라며 건네준 『東大의 쿠보다(久保田)선생이 쓴』책


과 『응용물리지(應用物理誌)』등도 그에게서 넘겨받았다.


이것을 읽고 카메라를 검사하자, 가장 앞 표면에 작은 깨알같은 흠이 있는 것이 보


였다.


회전식 렌즈의 나사를 빼내고, 표면을 관찰하자 이물질이 붙어있었다.


후꾸자와(福澤)가 주머니에서 돋보기를 꺼내어 신경질적으로 들여다 보더니 『음-!


이것은 사리(物=불순물, 결정체)다. 진공처리를 할 때 이런 일이 자주 발생한다』


고 말해 주며, 이 막을 천으로 문질러 떼어낼 것을 명령하였다.


그의 말대로 천으로 박박 문지르자 가까스로 지우는 것이 가능하였다.


그는 이렇듯 사소한 문제에 대해서 까지 자세히 알고 있을 정도로 매우 열심히 이


일에 열중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상사는 부하인 나의 교육에도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고, 그 후 나에게 사카이


(界)공장의 코팅장치를 견학하고 오라 명령하였다.


거기에서 처음으로 야마모토(山本)라 하는 사람을 만났었다.


야마모토(山本)는 온후한 듯 인품 있는 사람이었으나, 반면 완고하기 그지없는 사


람으로 복지부동의 자세로 웅크리고 쭈그려 앉아 기계의 수리를 하고있었다.


 


대공시제 사무용책상정도의 커다란 크기의 기계는 어딘가가 불안정하여, 자주 진공


도가 오르지 않아 곤란해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기계의 상태가 나아져야 코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이런 처리방법으로 종전 후 딱 1년째의 여름, 미놀타 세미렌즈에 세계최초의 코팅


을 입혔다며 야마모토(山本)가 기쁨에 가득 찬 얼굴로 말하였다.


세계최초의 고팅렌즈는  자이저 였으나, 이 사람은 자신의 나라를 편들고 싶은 기


분으로 그렇게 믿고 있는 듯 하였다.


 


그 2년 후 소화 25년(1950) 나는 사카이(界)공장으로 전근을 가게 되었다.


 


증투실(增透室)이라 적힌 간판이 붙어있는 작업장에서 야마모토(山本)는 역시 언제


나처럼 묵묵히 쭈그리고 앉아 기계의 수리를 하고 있었다.


이 기계의 파이프 관절부분에는 컴파운드라 하는 차색(=갈색)의 점토가 잔뜩 발라


져 있어, 기브스를 두르고 있는 중환자와도 같은 이미지를 주고 있었다.


 


기계의 기밀구조(氣密構造)는 여기저기 문제투성이였었다.


당시는 봉인용 고무(-혹은 미끄럼 방지용 고무)의 질이 나빠서,  ウイルソンシ-ル


原理 대로 작동하지 않았었다.  때때로   카- 카-   하는 Kaisla(カイスラ-)관(管)


의 소리가 나면서, 오존(O3) 수증기가 일어나기도 하였었다.


그럭저럭 장시간이 걸쳐 손을 본 끝에 간신히 진공도가 올라가더라도, 弗化마그네


슘을 가열하여 증착(蒸着)을 시작하려 하면, 순식간에 진공도가 내려가 버렸다.  


이런 기계를 조심조심 수리하여 , 몇 번이고 코팅을 계속하고 있는 야마모토(山本)


는 어지간히도 고집스런 노인네처럼 보였다.


 


山本老人이라 불렸던 이 사람은 장인기질로 코팅기술을 사람들에게 전수하지 않았


을 뿐만 아니라, 전수해줄 수제자나 부하도 두지 않았었다.


이것이 카메라 생산에 있어 지장이 되고 있었다.


 


이에 곤란함을 느낀 회사는 소화 24년, 오사카대학 요시미즈(吉水)연수실 출신의


니시노(西野)를 채용하여, 야마모토(山本)와는 별도로 코팅기술을 익히게 하였다.


 


이 즈음 렌즈코팅의 필요성이 카메라와 쌍안경 메카들에게 급속하게 확산되었고,


전문메이커의 도쿠다(德田)제작소가 진공증착기(眞空蒸着機)의 발매를 시작하였다.


 


렌즈코팅은 폭넓게 보급되어, 이 전쟁시대부터의 대난문(大難問-크게 어려운 난관)


의 코팅이라 불리던 첨단기술도 급속도로 보통의 기술로 전락하고 있었다.


 


니시노(西野)는 당시의 최신식머신(德田製)을 사용하여 대량생산렌즈의 코팅을 담


당하였고, 그 옆에서 야마모토(山本)는 여전히 등을 구부리고 쭈그려 앉아 낡은 기


계의 수리만을 하고 있었다.


후일 일에 대한 염증이 서서히 밀려오기 시작 할 무렵 야마모토(山本)는 정년이 되


어 미놀타를 떠나게 된다.


 


이와다(岩田)로부터 편지가 도착하였다.


제 1회에 기술했었던 오사카(大阪)공업시험소의 기록을 읽고, 대공시의 기획실에


근무하고 있는 혼조다카코(本庄孝子)여사(-사진3)로부터의 연락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었다.


 


우리들에게는  대공시(大工試) 라는 이름에 매우 친숙해있다.


대공시, 즉 오사카공업시험소(大阪工業試驗所)는 그 후 오사카공업기술연구소(大阪


工業技術硏究所)로 명칭을 바꾸었다.


그리고 현재는 『독립행정법인산업기술총합연구소(獨立行政法人産業技術 合硏究


所)』로 명칭이 바뀌어져 있다.


하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대공시가 전부이다.


이 시리즈가 끝날 때 까지  대공시(大工試) 라는 이름으로 통칭하도록 하겠다.


 


작년 10월 그 대공시에 방문했었다.


현재는 신규(新規)테마 발굴(發掘)그룹의 주임 연구원을 맡고 있는 혼조(本在)여사


가 전쟁전 대공시에 대해 기술한 나의 글을 다른 이의 소개로 읽어보고, 연락을 달


라고 했던 것이다.


 


오래 전부터 나는 몇 번이고 대공시를 방문하였었으나, 그것은 벌써 반세기도 전의


일이었다.


겨울이 가까워지고 있을 무렵 답게 미노오(箕面)의 산을 등에 진 몹시 추운 풍경


속에 대공시의 건물이 줄지어 서 있었다.


 


작년 가을 대공시에 혼조(本在)여사를 방문했었다.


반세기(半世紀)전의 모습을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지금의 대공시의 전면현관 앞에


는 진황색으로 단풍이 물든 커다란 나무가 1그루 서있었다.


 


그 날 나는 혼조(本在)여사로부터 여러 가지 자료의 카피를 전해 받았고, 이번 회


의 집필에 유용하게 쓸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대공시에서 오래 전부터 일했던 연구자, 이와다(岩田)의 소식을 알고 싶어하


고 있었다.  이 사람은 전쟁중 대공시에서 아사코시(淺越)의 지도하에 진공증착법


(眞空蒸着法)에 대해 연구를 하고 있었다.


혼조(本在)여사의 재량으로 그에게 전화를 걸 수 있게 되었다.


80세를 훨씬 넘기고 있는 나이였으나, 수화기 반대편에서는 건강한 목소리가 돌아


왔다. 그 당시 나의 질문에 대해 그는 후일 편지로 답변을 보내왔다.


 


B5크기의 레포트용지 8장에 꽉 차게 써넣은 문자가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는, 손으


로 직접 써 내려간 편지였었다.


 


이 글의 앞 부분에서 나는 소화 25년경에 미놀타에서 야마모토(山本)라는 사람이


사용하고 있었던 진공증착기의 이야기에 대해서 언급했었다.


이 기계가 대공시의 제품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나, 그 기계의 제작에 종사


하였던 이와다(岩田)로부터, 무언가 좀더 자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그 편지의 내용속에는 대공시에서 제작했던 진공증착기에 대해서의 일을 세밀하게


기록하여 두고 있었다.


 


그것은 『소생이 만든 물건은 아니지만, 높이 약 1m의 목재다이에 약 40Cm각으로


두께 약 10mm의 정도의 놋쇠판 중앙에 배기구(排氣口)와 전극(電極)도입구(導入口)


3개의 구멍을 뚥고 설치한 것이다.  베르자(ベルジャ-,대형단열진공용기[大型斷熱


眞空容器])는 위에 구멍(=입구)이 있는 것으로, 고무마게에 알류미늄봉(棒)을 끼워


넣어 방전전극(放電電極)으로 만들어, 밑 부분에는 고무판을 원형으로 잘라내서 기


밀(氣密)패킹으로 하여 두었다.


배기계(排氣系)는 이연제(理硏製)의 글라스유확산(油擴散)펌프와 그 귀퉁이에는 대


아제(大亞製)의 유회전(油回轉)펌프로, 베르자(ベルジャ-)의 밑 부분과의 연결은


아래판의 배기구에 납땜 처리했던 금속의 표면을 균일하게 정밀 처리하고, 유리의


메인 밸브의 leak(꼭지), ガイスラ-(한자루)관(管) 및 펌프와 연결하는 접합부분을


매끄럽게 처리하여 일체(一 )로 만들어 블록(유리製)을 사이에 세우고 확산펌프에


연결, 확산펌프와 회전펌프는 진공용 고무관의 그 사이에 유리꼭지 및 leak(꼭지)


를 집어넣은 것이었다』 라고 당시의 증착기(蒸着機)의 모습을 재현하여 올리고 있


었다.


 


내가 소화 25년에 미놀타에서 처음 보았던 증착기는, 이 대공시에서 수작업으로 만


든 제 1호의 외형에 비교해 보면 매우 진보한 물건으로, 아마 몇 대(代)가 될지 모


를 나중의 버전업된 기계였던 것일 것이다.


내가 봤던 미놀타의 증착기, 전후(戰後) 바로 미놀타의 세미ⅢA의 생산에 사용되었


다고 전해지는 증착기의 오일확산펌프는 유리제품이 아니고, 주철제(鑄鐵製)였었기


때문에, 이것은 전후 이리저리 함부로 나뒹굴며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며 돌아다니


던 것을 , 미놀타가 손에 넣게 되었던 제품이었던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어찌 되었든 일본 전후(前後)의 진공기술의 발단은 이연(理硏-理化學硏究所)에서


그 근원을 발견했던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확산펌프가 유리제에서 금속제로 변하였던 내막에 대해서 그는 신빙성 있고 조


금 흥미가 있을 만한 이야기로, 그 경위에 대해 써 올리고 있다.


 


그것은 『그 경위는 역시 사이클로트론(Cyclotron-원자핵의 인공파괴에 쓰는 경원


소[經元素]이온가속장치)입니다.  이연(理硏)에서 소형 사이클로트론의 시작(試作-


시험작)에 성공했던 니시나(仁科)선생이 보다 대형화하는 것을 시험해 보았으나,


쉽게 빔(beam)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아메리카의 이 분야에 있어서의 권위자 로


렌스박사가 있는 곳에 연구원을 파견하는 의견을 물어왔던 것입니다.


 


로렌스박사는 도면(圖面)을 검토한 결과, 배기계(排氣系)의 능력(能力)이 부족하다


고 지적하며, 자신이 속해 있는 회사의 금속제 확산펌프의 설계도면을 선뜻 건네


주었던 것입니다.


 


때 마침 미·일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일본으로 오는 마지막 귀국선을 타고 귀국하던 이 연구원은 호텔에 도면을 잊어버


리고 온 것을 깨닫고, 아직 남아있었던 사람에게 부탁하여 교환선에서 가까스로 도


면을 전해 받아 그 도면이 이화학연구소(理硏)에 도착했던 것입니다.


 


『이연(理硏)의 사이클로트론은 재료의 입수도 궁색한 가운데 전쟁의 재난으로 괴


롭고 어려움이 많았던 그 속에서도 끝까지 극복하여 차츰 빔(beam)도 발사할 수 있


게 되었으나, 종전을 맞이하며  자 이제부터다! 라고 말하여 지던 시기에 사이클로


트론을 바다에 집어넣도록 명령받았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까지의 진공기술(眞空技


術)을 소생시켰으며, 전후(戰後) 마치 비 온 뒤의 죽순과도 같이 진공관계의 회사


들이 속속 나타났었습니다.


제작에 참여했던 도쿠다(德田)도 그 계통에서 시대의 흐름을 타고 있었던 것일 것


이다』


 


그 계통의 기술이 전후 일본카메라 산업에 기여하게 되리라는 것을, 당시 그 누가


상상이나 하였을까 --- ?!


 


전후 진공증착기의 영웅 도쿠다(德田)제작소는 수년전에 시바우라(芝浦)제작소에


흡수합병되어, 회사명이 시바우라니레테크(芝浦ニレテック)가 되었으며, 진공관련


부문은 시바우라메카트로닉스(芝浦メカトロニクス=Shibaura_Mechatronics)가 되어


지금도 『TOKUDA』의 상표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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