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 한국 양궁이 걸어왔던 길 - 모방에서 창조로~~!! 고급스런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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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 한국 양궁이 걸어왔던 길 - 모방에서 창조로~~!! 고급스런 뒷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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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강을 고수하는 한국 양궁~~ 자주 바뀌는 규정이 한국 양궁을 견제하기 위해서 라는 얘기가 많다.

일부는 맞는 얘기지만 아래 글을 읽고 보면 결코 그게 맞는 얘기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그리고 한국 양궁의 지금까지 모방에서 창조의 패러다임으로 변환하면서 정상을 지켜 온 무서움을 알 게 된다.

뒷 편에 숨어 있는 좀 더 고급스런 이야기들을 들어 보자.

 

1980년대 초 어느 날, 서거원 대한양궁협회 전무(당시 삼익악기 양궁선수단 감독)는 연습장 앞에서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양궁이 늘 이렇게 재미없는 스포츠로만 남아 있을까? 그럴 리가 없다. 지금은 비록 기록경기이지만 결국 골프처럼 승부와 경쟁을 부각시키며 흥행을 몰고 다닐 것이다.” 

 

적막 속에 쏘는 288발의 화살

 

당시 국제 양궁대회의 진행 방식은 복잡하고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더블피타라운드라고 불리던 방식 아래서는, 한 선수가 모두 288발을 거리별로 72발씩 쏜 뒤 그 기록을 합산해 승부를 가렸다. 남자는 80미터, 70미터, 50미터, 30미터의 네 가지 거리에서, 여자는 70미터, 60미터, 50미터, 30미터의 역시 네 가지 거리에서 각각 72발을 쏘았다.

 

더블피타라운드가 선수의 실력을 가르는 데 있어 매우 공정한 방식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워낙 많은 화살을 여러 거리에서 쏘기 때문에 선수의 종합적인 능력을 평가하는 데는 좋은 방식처럼 보였다. 문제는 이런 경기 방식이 관중 입장에서는 도무지 이해하기 어렵고 재미도 없다는 점이었다.

 

우선 경기 시간이 너무 길었다. 한 선수가 쏘는 288발의 화살을 모두 집중해서 볼 만큼 양궁을 사랑하는 관중은 그야말로 극소수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라의 명예가 걸린 올림픽 경기나 한 번쯤 관심을 가지고 볼 뿐이었다. 그뿐인가. 선수들이 화살을 쏘는 동안에는 시끄럽게 응원도 하지 못했다. 결국 당시의 양궁은 양궁을 전혀 모르는 일반 관중들에게 288발의 화살을 모두 숨죽여 관찰하라고 강요하는 경기 방식이었던 것이다.

 

선수들 사이에 승부처가 분명하지 않다는 점도 더블피타라운드 방식의 결정적 문제점이었다. 그렇게 많은 수의 화살을 쏘다 보면 한 발 한 발의 중요성은 떨어지게 마련이다. 골프라면 한 홀에서의 실수로 전체 경기를 망칠 수도 있기 때문에 매 타마다 긴장감이 감돌지만, 양궁은 그렇지 않았다. 한 발의 승부를 통해 역전극이 펼쳐지는,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순간은 거의 벌어지기 어려웠다. 금메달을 놓고 막판에 대역전극이 펼쳐지는 수많은 다른 올림픽 경기에 견주어 재미와 흥분이 떨어지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여러 발의 화살을 여러 거리에서 쏘는 방식이 그 선수의 실력 전반을 제대로 평가하는 좋은 방법이라는 데에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의 양궁은 흥행보다는 기록의 공정성에 초점을 맞춘, 대학 입시나 공무원 시험 같은 경기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10년 후를 내다본 훈련 

 

그때 한국 양궁 지도자들은 생각했다. “5년 뒤, 10년 뒤에도 과연 양궁이 이런 방식으로 운영될까? 갈수록 스포츠는 재미를 쫓아 룰을 바꾸는 추세다. 양궁 역시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고, 변화의 방향은 승부의 재미를 더하는 방향이 될 수밖에 없다.”

 

이후 태릉선수촌에는 특이한 양궁 훈련 코스가 생기기 시작했다. 미래에 새로 도입될 가능성이 있는 양궁 경기 방식을 예측해 거기에 맞춘 훈련을 시작한 것이다. 변화의 방향은 명확했다. 화살 한 발이 보다 중요해지는 방향으로, 그래서 승부가 좀 더 박진감 넘치게 되는 방향으로 경기 방식이 바뀔 것이라고 예측했다.

 

태릉선수촌에는 15미터, 30미터, 45미터 등 단거리 양궁 훈련을 할 수 있는 시설이 마련됐다. 그리고 실제 경기장에서처럼 널찍한 공터가 아니라 나뭇가지 사이로 화살을 날리도록 복잡한 훈련장이 설계됐다. 체육과학연구원의 협조를 얻어 소음 속 훈련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활을 쏘게 하는 등 일부러 소음을 발생시키면서 활을 쏘게 했다.

 

화살 한 발이 경기에 미치는 영향이 커진다면 제 아무리 평균 실력이 좋은 선수라도 한 번의 결정적 실수로 다 따놓은 메달을 놓칠 수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친 것이다. 그래서 실수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소음 등 좋지 않은 환경에서 활을 쏘는 훈련을 시작했다. 심리학, 생리학적 시뮬레이션을 통해 설계한 훈련이었다.

예측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1986년 서울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288발을 모두 쏘는 더블피타라운드 방식은 사라졌다. 그리고 1988년 서울 올림픽 경기부터는 그랜드피타라운드라는 새로운 경기 방식이 도입됐다.

 

그랜드피타라운드에서는 한 거리에 아홉 발씩 모두 36발만을 쏘아 승부를 가린다. 화살 수가 8분의 1로 줄어든 경기 방식이다. 자연스럽게 화살 한 발의 중요성은 8배로 커졌다. 한국 양궁 지도자들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확고한 세계 정상에 오르지 못했던 한국 양궁이 경쟁 국가들에 견주어 절대적 우위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1984년 로스앤젤레스 올림픽에서 서향순 선수가 여자 개인 금메달을 따면서 가능성을 보여준 한국 양궁은 1988년 올림픽에서 전체 금메달 4개 가운데 3개를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이후에도 한국 양궁은 끊임없이 새로운 훈련 방식을 개발해나갔다. 우선 선수들의 담력 훈련을 강화했다. 담력을 강화해야 실수가 줄고, 실수가 줄어야 화살 한 발의 중요성이 높아진 경기 방식에서 좋은 성적을 거둘 수 있기 때문이었다. 번지점프나 공수부대, 특전사 훈련장에서 선수들을 훈련시키기도 했다. 경륜장이나 경정장처럼 관중이 많이 모이고 함성이 들리는 곳에서 훈련을 하기도 했다. 심지어는 야구장의 수많은 관중의 함성 속에서 활을 쏘는 시범 경기를 펼치기도 했다.

 

한국 양궁 지도자들의 예측대로, 경기 방식의 변화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부터는 올림픽라운드라는 새로운 경기 방식이 도입됐다.

 

올림픽라운드에서는 경기의 재미가 한층 강조된다. 과거 모든 선수가 기록으로 경쟁했던 것과 달리 새로운 올림픽라운드에서는 예선과 본선이 나뉜다. 예선에서는 각자 72발씩을 쏘아 그 기록으로 1위부터 64위까지 가린다. 그리고 본선에서는 64명의 선수가 토너먼트를 통해 결승까지 승부를 가린다.

 

토너먼트에서는 전체 기록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두 명의 선수가 만나 12발의 화살만을 쏘며 맞대결을 벌인다. 그동안의 기록이 아무리 좋았더라도 상대 선수와 만나 쏜 12발의 화살에서 얻은 점수가 상대보다 낮으면 영영 탈락이다. 64강, 32강, 16강, 8강, 4강을 거쳐 결승까지, 그렇게 여섯 번을 연거푸 이겨야 우승이다. 흥행을 위해 고민하던 국제양궁연맹에서 양궁 경기 방식을 월드컵 축구 경기 방식처럼 바꿔놓은 것이다.

 

경기 방식이 바뀌면서 경기장 분위기도 바뀌었다. 최근 양궁 국제대회에서는 양궁 선수와 관중 사이 거리가 불과 20미터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가까운 거리에서 관중들은 환호성과 야유를 보낸다. 경기장에는 흥분과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정적이 흐르던 공터에서 경기가 벌어지던 과거와는 딴판이다.

 

한국 양궁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쾌재를 불렀다. 이 모두가 한국 양궁이 준비해오던 변화 아닌가? 오랫동안 준비한 한국 양궁에 황금시대가 열리는 순간이었다.

 

1988년 이후 2012년까지 열린 일곱 번의 올림픽을 통틀어 한국 양궁은 전체 28개 금메달 가운데 18개를 획득했다. 누구도 넘볼 수 없는 놀라운 성과였다.

 

따라잡기 전략과 굳히기 전략

 

한국 양궁의 놀라운 점은 단순히 세계대회 정상에 올랐다는 데서 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세계 양궁을 이끌어가는 법칙을 앞장서서 만들어가고 있다는 데서 더욱 놀라운 성과를 발견할 수 있다.

 

어떤 나라가 세계대회에서 성적이 좋다고 해서 반드시 그 종목의 리더로 인정받는 것은 아니다. 그 종목의 리더로 인정받으려면 반드시 자기 나라만의 훈련 방법이나 경기운영 방법을 개발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나라가 그 방법을 배우면서 따라오도록 만들어야 한다.

 

한국 양궁에도 같은 이야기가 적용된다. 1988년 올림픽 이후 한국 양궁은 명실상부한 세계 정상에 올라섰다. 그러나 국제 양궁계에서는 여전히 메이저급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성공 초기만 해도 모방을 통해 성공한 ‘반짝 졸부’라는 인상을 떨치지 못했던 것이다.

 

실제로 한국 양궁이 기존 강자들을 따라잡고 있을 때만 해도 한국 양궁의 성장전략은 ‘모방’이었다. 한국경제가 1970년대 모방과 계획과 통제를 통해 선진국을 따라잡으면서 성장하던 모습과 흡사하다. 한국 양궁은 그러나, 스스로 정상에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시기가 되어서는 독자적인 전략과 사법과 훈련법을 창조해내기 시작했다. 어찌 보면 한국 경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주는 모범 사례다.

 

한국에 양궁이 들어오던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국제양궁대회 상위권은 여자의 경우 러시아가, 남자의 경우 미국이 휩쓸고 있었다. 한국 양궁은 당시 접근이 상대적으로 쉬웠던 미국을 모방하면서 성장을 꾀했다. 활이나 화살과 같은 장비도 모두 미국 제품이었고, 활을 쏘는 자세를 일컫는 사법도 미국 선수를 따라했다. 주요 국제대회에는 양궁 지도자들이 파견되었는데, 이들의 주요 임무는 미국 선수의 자세를 사진으로 찍어 한국으로 가져오는 것이었다. 미국을 똑같이 따라한 결과, 미국의 수준까지 올라서게 된 것이다. 어찌 보면 처음 한국이 올림픽 금메달을 땄을 때만 해도 미국이 우리를 무시했던 것은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쯤, 서향순 선수가 금메달을 따고 한국 양궁의 가능성이 보이던 시기부터 한국은 독자적인 양궁을 만들어내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이른바 한국형 양궁이었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도 한국형으로 고치기 시작했다. 모두 창조력과 상상력이 뒷받침되어 가능했던 일이다.

 

예를 들면, 체구가 크고 팔이 긴 미국 선수들은 옆으로 서서 활을 당길 때 어깨를 약간 안쪽으로 굽힌 채 코가 있는 위치 정도까지만 줄을 당겨 활을 쏜다. 그러나 한국 선수는 팔이 상대적으로 짧고 힘이 약하다는 점을 감안해, ‘강궁’ 사법을 새로 개발했다. 어깨를 바깥쪽으로 길게 펴고, 코가 있는 위치 뒤까지 줄을 더 많이 당겨 활을 쏘는 것이다. 이 방법으로 미국 선수보다 힘이 약하면서도 더 강하게 화살을 쏠 수 있게 됐다.

 

처음에는 콧방귀만 뀌던 서구 선수들이 한국 선수가 선전을 거듭하자 하나 둘씩 자세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최근 국제대회에서는 16강 정도까지 진출하는 선수들은 하나같이 한국형 사법을 이용한다. 그러다 보니 원래 종주국인 유럽이나 미국 선수들보다 아시아 선수들이 점점 더 선전하는 현상까지 나타난다. 한국인 체형에 맞는 한국형 사법이 표준이 되다 보니, 한국인과 체구가 비슷한 아시아 선수들이 상대적으로 유리해진 것이다.

 

소음이 있거나 번잡한 곳에서 훈련을 하는 방법도 한국만의 비법이고 매우 창조적인 발상이다. 예를 들면, 국가대표 선발전 경기를 서울시청 앞 광장, 서울올림픽공원, 망상해수욕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번잡한 곳에서 진행한다. 이를 통해 선수들의 담력을 키우고, 새로운 경기 방식에 대한 적응도를 높이는 것이다. 다른 어떤 나라보다 먼저 이런 훈련법을 개발하는 상상력을 발휘한 것이다.

 

현재 한국 지도자의 훈련법을 인정한 국제 양궁계에서는 한국인을 대표팀 감독으로 영입하는 게 유행이다.  현재 수십개국의 국가대표 남녀 총감독이 한국인이다. 미국 국가대표팀 남녀 감독도 한국인이다. 한국형 훈련법의 수출이 전방위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장비를 한국화한 것도 큰 전환점이었다. 국제대회 금메달을 휩쓸던 1990년대 중반까지도 한국 양궁 선수들은 남자는 미국 활, 여자는 일본 활을 사용했다. 그러다 보니 리더 대접을 받을 수가 없었다. 1996년 애틀랜타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던 양궁 대표팀은 1995년 겨울에 미국에서 신제품이 나왔다는 소식을 듣고 새로운 활을 구하러 미국 본사까지 찾아갔다가 문전박대를 당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한국에 신제품을 먼저 팔 수는 없다는 어이없는 이야기만 듣고 돌아온 것이다.

 

그때 대한양궁협회는 강수를 뒀다. 1996년 올림픽 뒤부터 초등학생과 중학생 대회에서는 외국산 활을 쓰지 못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처음에는 엄청난 반발이 있었지만 몇 년 안에 국산활 생산업체는 눈에 띄게 성장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선수 모두가 국산 활을 사용하게 됐다. 당시 여자 개인 1∼3위를 한국이 휩쓸었고, 남녀 단체 금메달 모두 한국 차지였다.

 

이제 한국 활은 국제 표준이 되고 있다. 최근 세계선수권대회 16강 이상 올라오는 국가들의 대표팀 선수들을 보면, 과반수가 한국산 활을 사용하고 있다.

 

변화의 시점을 찾아라

 

한국 경제는 모방을 통해 성장했다. 한국인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계획과 통제에 길들여진 채 모방의 패러다임 아래서 생존했고 성장했다. 하이에나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지나면 모방은 더 이상 성장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하이에나의 방식은 사냥을 대신 해주는 누군가가 있을 때만 유효하다. 선두권에 들어서고, 최전선에 서야 하는 시기가 오면 모방 이상의 것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독자적인 활쏘기 방식이 있어야 하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훈련 방법이 있어야 하고, 자기 몸에 꼭 맞는 활과 화살이 있어야 한다. 이것들은 남이 만들어줄 수 없는 것이다. 오직 스스로의 창조력과 상상력으로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양궁은 원래 우리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배우면서 싸워야 했다. 그러나 어느 순간이 지난 뒤 도입한 창조 전략은 한국 양궁이 배워서 만든 우리 역량을 거꾸로 수출할 수 있게 도와줬다. 한국 양궁이 성장하던 시기, 따라가는 전략은 모방이었다. 그러나 선두 자리에 올라서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창조 전략은 선두 자리를 탈환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가장 중요한 경쟁력이 됐다. 모방에서 창조로 패러다임이 전환하면서 세계 정상을 꿈꿀 수 있는 길이 열렸던 것이다.

 

한국 양궁이 걸어갔던 길은 우리 모두가 걸어가고 있는 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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