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스트의 아름다운 전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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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네스트의 아름다운 전통

11 붉은입술 6 5310 6

시네스트에는 제가 기억하는 몇 가지의 아름다운 전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자기가 좋아하는 영화를 남들과 함께 공유하고 싶다는 바람 한 가지로
아무런 대가없이도 적지않은 시간이 소요되는 자막 제작에 공을 들입니다.

그리고 그 자막이 어떤 경로로 어떻게 돌아가던
많은 사람이 공유해주기만을 바라고
좋은 자막 고맙다, 수고했다는 한 마디에
또다른 자막 제작에 나서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누구라 할 것도 없이
시네스트의 모든 자막제작자들에게서 보이는
참으로 아름답고 순수한 모습 그 자체라고 하겠습니다.

둘째는, 넓은 마음입니다.
제가 시네스트 가입하고나서 1~2년쯤 후에
겁없이 영화 자막제작에 도전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즘과는 달리 우리 세대는
영어라고는 학교에서 배운 교실영어가 전부인데다가
회화라곤 입도 벙긋 못해보고 간혹 AFKN이나 띄엄띄엄 보는 수준이었기에
처음부터 무모한 도전이었으나,
남들도 다 하는데 별 거 있겠냐 싶어 무작정 시작했지요.

만만하게 보이는 쉬운 영화를 선택한 탓(?)인지 처음엔 잘 나가다가
영화 내용이 본론에 들어가기 시작하자 조금씩 막히기 시작하더군요.

사전을 끼고 끙끙대기를 몇일 보내다가
그래도 잘 모르겠는 건 창작을 하다시피 해가며
어찌어찌 작업을 마쳤습니다.
그리고 자막을 게시판에 덜썩 올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무슨 배짱이었는지 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난 뒤...
누군가에게서 메일이 한통 날아왔습니다.

자신을 시네스트에서 가끔 자막을 만들어 올리는 사람이라고 밝히고는...
'실례가 되지않는다면....'으로 시작하는
아주 정중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문체로
제가 번역한 자막에 대해 잘못된 부분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상당 부분에서 발견된 오류를 지적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얼굴이 따뜻해 지는가 싶었는데...
그가 편지 말미에 덧붙이기를,
'누구나 처음부터 잘 할 수는 없다. 나도 처음엔 이런 과정을 거쳤다'며
용기를 주는 멘트를 덧붙이고는...
참고로 할만한 서적까지 몇권 알려주는 것이었습니다.

그 순간, 이름 모를 그가 마치 학창시절의 은사처럼 존경스럽게 느껴지더군요.
'이런 사람도 있구나'

평생 그 어디에서도 그처럼 따뜻하고도 자상하며
그러면서도 공손한 가르침(?)을 받아본 일이 없었던지라
그때 제가 느꼈던 흐뭇함과 감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는 표현 그 자체였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저는 시네스트와 시네스트의 자막제작자들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 자막은 당연히 수정되어 다시 등록이 됐고
그후 용기를 갖고 몇번의 제작을 더 시도하다가...
워낙 시간과 품이 많이 들어가는지라 부득이
먹고는 살아야 하겠기에 슬그머니 제작 작업에 손을 놓고
최근에는 다른 분들이 제작한 자막을 손질해 올리는 일에만
일조(?)를 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

그후로도 시간만 나면 시네스트에 와서 이것저것 집적거렸던 것은...
그때의 감격과 고마움이 늘 가슴 저변에 자리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내가 받은 것과 같은 무언가를 나도 누구에겐가 주고싶다는 생각,
바로 그것때문입니다.
간혹 이러한 저의 행동을 이상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분들도
물론 없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래도 저는 시네스트에 올 때마다 늘 그가 준 감격이 오버랩되어
마치 고향집을 찾은 듯 여기저기 들락거리며 뒤져보고
혼자 미소짓는 시간을 가졌었고,
누가 원하지도 않는데도 불구하고
공연히 이것저것 주접대기를 즐겨왔던 것입니다.

생활 속에서의 작은 행복과 감격을 경험한 사람은 평생 잊지못하는 법이지요.
부부간이건, 친구간이건, 직장에서건, 온리인상에서건...
사람이 존재하는 곳이라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들이 존재하는 한
이런저런 모양의 감격과 행복들이 만들어지고
또 전염이 되어 퍼져나갈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누구에게 무언가를 아무 조건없이 주려는 사람이 있고,
그의 배려를 받아 감사함으로 느낄 줄 아는 사람이 있는 한,
누구나 정말 이 세상은 한번 살아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낄 것이고
그 감격과 작은 행복은 모두의 가슴에 언제나 지속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제게 그 가치를 알게해 준 곳 중에 하나가 시네스트였기에...
이러한 전통과 미풍이 오래토록 지속되고 또 많은 분들에게 전수되어
단순한 자막사이트 그 이상의 커뮤니티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앞으로도 변함이 없을 겁니다.

아래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네스트의 작은 변화의 바람은
지금껏 시네스트에서는 없었던 일이라 기억합니다.
모르긴해도 시네스트뿐만 아니라
다른 커뮤니티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사례입니다.

이분법적인 선택을 묻는 투표는 흔하지만
중요한 사안에 대해 누구나 자신의 뜻을 스스럼없이 밝힐 수 있는 기회...

어떻게 보면 별 것이 아닌데도 실천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때문에 일부에서는 쓸데없는 일이라며 비웃을지도 모르지만
오히려 그렇기에 더 도전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일일 겁니다.

목소리 큰 사람이 주도하기 십상인 온라인 커뮤니티의 속성상
이런 시도가 신선한 충격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운을 뜨고 누가 삽질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호응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고 실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다 아시다시피, 많은 사람들이 공연히 쭈몃대기도 하지만
이런 자리는 어디에서도 본 일이 없는 낯선 자리이기에 더 그럴 수 있습니다.

이런 노력 그 자체가 값진 것이며
이런 시도의 경험이 또다른 힘의 원천이 됩니다.

저는 오늘 이 게시판을 바라보며
예전에 느꼈던 기쁨과 흐뭇함을 다시한번 느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일이 계기가 되고 전례가 되고 또다른 아름다운 전통이 되어
시네스트는 정말 사람사는 냄새가 나는 커뮤니티라는 인식이
모든 누리꾼들에게 퍼져나갈 수 있게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뿐만 아니라...
설사 누군가 고의로 이상한 자막을 올렸더라도
마치 경쟁적으로 범인을 수색하여 개가를 올린 사법관들처럼 공과를 드러내며
뒷맛이 씁슬한 살벌한 분위기를 연출할 것이 아니라
모두가 권고하고 타이르는 성숙한 자세를 부단히 보여줌으로써
본인 스스로 미안함과 부끄러움을 느끼게 만드는 분위기를 만들어 가고,

누가 잘못된 자료를 등록했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실수라며 함께 유감의 뜻을 표하여
본인 스스로 앞으로 선별을 잘 해야겠다는 의욕을 갖게 만들며,

설사 번역에 오류가 발견되더라도, 모두가 자상한 선배가 되어
내 생각엔 이런 경우에는 이런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더라는 식으로 지적해 줌으로써
본인 스스로 고맙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적을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가면...

그렇게 모두가 하나같이 사람들이 사는 냄새와 모습을 보인다면
제 모습과 향기를 찾은 숲에 새들이 되돌아오듯이
시네스트는 자연스럽게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돈을 들이는 물리적인 홍보를 하면 일시적인 효과는 볼 수 있을 지는 몰라도
이렇게 사람 냄새를 타고 입에서 입으로 번지게 하는 방법엔 결코 미치지 못합니다.

지금은 비록 몇몇분이 중심이 되어 시작하고 있지만
이번 일을 계기로, 앞으로 시네스트를 찾을 때마다
늘 흐뭇한 사람 냄새를 맡게될 즐거움의 단초가 될 수 있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그동안 제가 시네스트에 올렸던 모든 자료나 글들로 인하여
혹시 조금이라도 마음이 상했던 분들이 계시다면
그것은 결코 제 의도가 아니었음을 밝혀드리니 오해 없으시기 바라며,

언제봐도 변함없이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하는 것 같아 보기에 참 좋은
시네스트 운영자 재회님을 비롯한 시네스트 가족 모든 분들에게
늘 기쁨과 행복이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PS:
저는 예상 외로 일이 잘 풀려, 당초 계획보다 훨씬 빠르게 행사 종료 이전에
해외로의 출국 일정이 잡혔습니다.

대단히 송구한 일이나, 당분간 업무로 인하여 접속이 어려울 듯 하여
이 글로 제 인사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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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Comments
1 가을하늘  
  하시는 일 잘 마무리하시고 건강히 잘 다녀오세요 !
1 달별  
  가슴 울리는 글 잘 읽었습니다.
행간에서 배어나는 따뜻함이 고스란히
시네스트 가족들에게도 전이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뜰 안에서 사람다움을 저 역시 배우고 있는 중입니다.
하시는 일도 잘 풀리셨다니 다행입니다.
해외에서 몸건강 유의하시고 늘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1 cloVer4  
  시네스트를 알면서 느꼈던점을 잘 표현 하셨네요
저도 충분히 공감하고 있습니다
작문 실력이 짧은 저로선 이렇게까지 장문을 쓰신 능력이 부럽네요
다음에 다시 돌아오시면 꼭 글 남겨주세요
댓글 인사 드릴께요 ^^
3 영화나 볼까  
  건강 조심하시고 만사형통 하시길 빕니다. ^.^
1 나무그늘  
  돌아오시면 그때 가서 뵙도록 하죠... ^^<BR><BR>오실 때 제 선물도 꼭 챙겨서 오시길... ㅎㅎ
1 삐루  
  해외에서도 가끔 접속하시어 외국 돌아가는 예기좀 들려주세요.<BR>건강하시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