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들

영화이야기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놓칠 수 없는 장면들

15 하스미시계있고 10 566 2

연말에 모처럼 힘을 모아 끄적여 봅니다. 상세하지는 않지만 대강의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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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해 부산 국제 영화제에서 내 마음을 움직인 영화는 공교롭게도 모두 러시아-우크라니아 전쟁을 거론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영화가 지나치게 주제의식이 강하거나 선동/계몽적인 영화를 선호하지 않는다. 오히려 꺼리는 편이다(켄 로치와 다르덴 형제의 영화를 이제 그리 좋아하지 않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 가렐의 <북두칠성>, 프레드릭 와이즈먼의 <메뉴의 즐거움 - 트와그로 가족>,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직간접적으로 러우 전쟁을 언급할 때, 노감독들의 동시대에 대한 진심어린 근심을 읽을 수 있어서 경외감마저 들었다(당연히 이들 영화에 마음을 빼앗긴 것은 다루는 사건보다 형식적 표현 때문이다).


세 편의 영화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전쟁에 대해 이야기를 한다. <북두칠성>은 좌파 출신 할머니와 손녀와의 짧은 일화를 통해서, <메뉴의 즐거움>은 식당을 찾은 수많은 손님의 영상 중에 유독 러우 전쟁을 거론한 대화만 뽑아 넌지시 우크라이나 문제를 돌아보게 한다. 그 중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신작은 (그의 영화에 주요 소품인) 라디오를 통해 반복해서 우크라이나의 참상을 뉴스 형식으로 전한다는 점에서 전쟁에 더 밀접하게 다가선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세계의 비참함을 아키 카우리스마키 특유의 냉소적 유머로 그린 영화다. 멀리 떨어진 세상의 참혹함이 그 자체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전쟁과 무관한 개인의 삶과 공명을 이루고 있는 것이 이 영화의 묘미다.

마트 점원인 여주인공이 유통 기한을 넘긴 음식을 폐기하지 않고 집에 가져갔다는 이유로 해고 되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남자는 견디기 힘든 노동 조건을 잊고자 술을 마신 이유로 일자리를 잃는다. 두 사람은 일을 마치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지만 그들의 집은 아늑하지 않다. 라디오를 통해 계속 들려오는 것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대한 소식 뿐이다.


이와 관련해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장면이 있다. 여자가 라디오로 전쟁 소식을 들으며 집으로 온 우편물을 읽는 씬이 그것이다. 우크라이나의 도시들이 폭격 당한 뉴스를 듣던 여자가 갑자기 소스라치게 놀라며 집안의 전등을 하나, 둘  끈다. 대사는 없고 소리는 라디오 뉴스에서 들려오는 말소리가 전부지만, 관객은 그녀가 읽고 있던 우편물이 세금 고지서이고, 거기에 감당하기 어려운 전기 요금이 적혀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에는 러시아 폭탄이 날아들고, 여자의 집에는 세금 폭탄이 날아든 것을 이렇게 단순하지만 강렬하게 그릴 수 있는 것이 이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역량인 것이다.


시네필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장면들도 숨어 있다. 주인공 남녀의 데이트 코스의 하나인 영화 관람을, 감독의 절친인 짐 자무시의 영화 <데드 돈 다이>를 영화 속 영화로 보여주거나 삽입곡으로 <데드 돈 다이>의 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것은 여주인공의 퇴근 길 장면이 짐 자무시의 <패터슨>에서 주인공 애덤 드라이버의 출근길 모습과 유사하다는 점이다(두 영화에 주인공의 개가 나온다는 점도 비슷하다). 게다가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덜컹거림이 없고 창 밖의 조명의 변화만 보여주는 기차 실내 장면은, 자무시 영화에서 탈 것을 묘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점도 눈여겨 볼 부분.


물론 이 영화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버스 정류장에서 술에 취해 잠든 남자를 가볍게 흔들어 깨우던 여자가 막 도착한 버스를 타고 떠나면서, 남겨진 남자를 근심어린 얼굴로 쳐다보는 장면이다. 버스 헤드 라이트가 만드는 그림자가 남자의 얼굴 위로 훓고 지나가면, 남자는 자신의 곁에 누군가가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닫는다. 이 장면들을 연결시키며 흐르는 음악이 차이코프스키의 교향곡 6번 '비창'이다. 여기에 이보다 더 어울리는 곡을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정류장 씬은 영화 후반부 병원 장면으로 대비되는데, 기차로 사고를 당해 병원에서 사경을 헤매던 남자가 병문안을 온 여자의 키스로 동화처럼 깨어난다. 버스와 기차, 정류장과 병원, 깨닫지 못함과 깨달음, 이루지 못한 사랑과 이루어진 사랑의 절묘한 변주가 깊은 탄식을 자아낸다.


두 남녀의 약속 장소인 영화관에는 <데드 돈 다이> 외에도 비스콘티의 <로코와 그의 형제들>, 데이빗 린의 <밀회>, 샘 뉴필드의 <잃어버린 대륙>,  장 삐에르 멜빌의 <고독>, 고다르의 <국외자들>과 <미치광이 삐에로> 등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한마디로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선호하는 영화가 상영되는 상상의 영화관이다. 그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로베르 브레송의 자본에 대한 비판적 영화 <돈>의 포스터. 영화의 제목처럼 브레송이 더 이상 영화 자금을 확보하지 못해서 유작이 되어버린 영화.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돈으로 대변되는 자본주의를 관객이 계속 응시하게 배치해 놓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도 한 편의 영화에 대한 오마주로 끝 맺는다. 남자가 퇴원하는 날, 주인 없는 개를 키우게 된 여자에게 그가 묻는다. "개 이름을 지었나요?". 여자의 답변. "네. 채플린이예요" 그리고 두 사람이 개를 데리고 지평선을 향해 희망찬 걸음으로 걷는 뒷모습이 화면에 등장할 때, 이 영화가 <모던 타임즈>의 라스트 씬과 같은 길을 걷고 있음을 문득 깨닫게 된다. 그리고 불현듯 왜 여자가 일하는 마트의 계산대에서 가공육 패키지들이 계산대를 이탈하는 장면이 영화의 첫 장면으로 나오게 되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것은 <모던 타임즈>의 그 유명한 컨베이어 벨트 씬에 대한 카우리스마키 나름의 헌정인 것이다. 아울러 <모던 타임즈>에서 공장에서 일하는 찰리를 끊임없이 감시하던 카메라(=빅브라더)는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남녀의 일상을 끊임없이 침범하는 라디오 뉴스가 대신한다. 어떤 면에서 이 영화는 21세기에 아키 카우리스마키가 찍은 <모던 타임즈>이며, 자본주의의 가을에 대한 냉소적이지만 따뜻한 희망도 함께 품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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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Comments
14 스눞  
우아한 리뷰 잘 읽고 갑니다 :)
이렇게 멋진 글 종종 남겨 주셔서 감사합니다!
게시판에 하스미 님 글이 뜸하면 건강 걱정하고 있습니다(Umma 님과 함께요).
수많은(?) 씨네스트 팬들을 위해 종종 소식 전해 주세요 ㅎ
<사랑은 낙엽을 타고> 보게 되면 다시 와서 이 글 읽어 볼 예정입니다.

날 춥습니다. 건강 잘 챙기시고,
좋은 영화, 재미난 영화 마음껏 누리시길 기원합니다! :))
메리 크리스마스 & 새해 복 많이!

(덧 : 게시글에서 '환장하게 재밌다'고 추천해 주신 <블릿 트레인>, 덕분에 저도 환장하게 재밌게 봤습니다. 고맙습니다! ㅎ)
스눞님 오랜 만이네요.^^ 여기에 뜸해서 하시는 일이 많이 바쁜가 보다 하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부국제 때 바삐 영화 챙겨보시고 소식 남긴 것 기억하는데.. 올 해도 참여하셨는지 궁금하네요.

한 해 마무리 잘하시고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_ _)
2 도토리쿵쿵쿵  
잘 읽었습니다. 제가 기억 못 하는 것일 수 있는대 병문안 장면에서 여자가 키스하는 장면이 있던가요? 잡지를 읽어주던 기억은 나는데. 스킨십 장면은 기억이 안 나네요.
이 부분은 제 기억의 착각일 수도 있습니다. 영화를 영화제 때 한 번 보고 기억 속에 담아두었다가 시간이 오래 흐른 뒤에 쓴 글이니까요. 핀란드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다는 가짜 뉴스를 듣고 의식이 회복 된 것 같기도 하네요. 조만간 다시 봐야겠습니다.
2 도토리쿵쿵쿵  
네 축구 이야기가 맞네요. 연말에 정말 최고의 영화였습니다.
다시 확인하니 제 기억이 맞습니다. 축구 이야기 때는 눈만 움찔하고 이마에 키스하니 의식을 차리고 눈을 뜹니다.
17 바앙패  
잘 보고 갑니다.
S 한움  
해박한 영화 지식으로 정갈하게 쓴 글  고맙게 잘 보았습니다
찾아보니 현재 상영 중인 영화로서 박스오피스15위내요 주위에 상영관이 있나 찾아봐야겠내요
보잘 것 없는 글 잘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영화는 꼭 한 번 찾아서 보시길 바랍니다. 제 예상대로 이 영화를 올 해 10 Best의 하나로 뽑은 해외 언론이 많습니다.
S 컷과송  
오늘 영화를 보고 이 글을 기억하여 읽었습니다. 샘 뉴필드의 <잃어버린 대륙>은 배경이 된 다른 영화들에 비해 어떤 특이점에서 선택된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내년에도 좋은 영화글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