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영화를 놓치지 마세요 - <중혼자> 최종
(앞에 글에서 이어짐)
세 개의 글로 마무리 할려고 했으나 글이 잘려서 안 올라가네요. 나누어서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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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하나 남았습니다. 필름 누아르의 형식을 빌려와서 멜로 드라마로 바꾼 이 영화가 다시 사회 드라마로 어떻게 발전되는가. 그것을 다시 ‘침범’이라는 테마로 설명해보겠습니다.
이 영화에서 공권력은 어느 범위까지 침범할 수 있는가의 문제는 아이다 루피노의 이상적 바람과 같습니다. 중혼 사실이 경찰에 알려져 해리를 체포하러 왔을 때, 경찰은 해리의 집 문을 두드리지 않습니다. 해리가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내려 올 수 있도록 아파트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진1~3]: 이중 결혼을 범한 죄로 해리를 체포하러 온 경찰들. 그들은 해리의 집 문을 두드리지 않고 아파트 아래에서 해리를 기다리고 있다.
공권력이 개인 사생활을 넘어서서는 안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
법정 판결 장면에서 변호인은 이런 말을 합니다. ‘해리 그레이엄은 영웅은 아니지만 괴물도 아니다. 그가 필리스를 그냥 정부로 두었다면 문제가 없었지만 그녀를 좋은 의도로 부양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는 법정에 서게 되었다. 이것은 모순이다’ 이와 같은 변론에 판사는 중혼죄가 가지는 모순을 일부 인정합니다. 그리고 해리가 어느 쪽의 여자를 선택할지, 두 여자가 해리를 받아들일지의 문제는 당사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라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법적인 최종 선고는 다음 주에 있을 것이라면서 예고합니다.
<중혼자>는 최종 선고를 보여주지 않고 끝이 나는데 중혼죄에 대한 부분은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는 열린 결말을 선택합니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를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선고 일정을 알려주는 판사의 말이 끝나자 사람들이 일어서서 법정을 나가고 필리스와 해리가 말없이 쳐다봅니다. 필리스가 법정을 떠나고 다시 해리와 이브가 마주 봅니다. 이브가 등을 돌리고 법정을 나오다가 뒤돌아 서서 남편을 쳐다봅니다. 해리가 다시 구속되어 법정을 나서는데 이브가 지켜보는 모습에서 엔드 마크가 떠오릅니다. 카메라는 세 사람 중 누구도 따라가지 않습니다. 그것이 관객이 이들 세 사람에게 취해야 할 태도라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사진3~10]: 최종 선고를 미루고 끝나는 법정 씬. 사람들이 법정을 빠져나가자 세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카메라는 어느 한 명도 따라 가지 않는다.
영화의 맨 처음 장면으로 돌아갑시다. 청소부 할머니가 그래이엄 부부의 비밀을 ‘침범’하듯이 염탐합니다. 그것은 관객(= 청소부)이 이 영화의 주제를 따라가야 할 방편적인 설정입니다. 영화가 끝을 맺을 때 관객이 이들의 문제에 더 이상 개입할 수 없도록 거리를 두게 만듭니다.
아이다 루피노는 공권력을 포함한 사회적 시선이 개인의 영역을 넘지 말아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중혼의 문제는 법적으로 해결해야 할 부분도 있지만 개인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도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섣불리 법으로 유무죄를 논하기보다 개인의 영역으로 남겨둬야 할 부분이 있다는 문제를 제기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 방법은 훌륭합니다. <중혼자>에 대해 제가 첫 번째 쓴 글은 영화 포스터에 대한 내용이었습니다. 영화 포스터에 해리의 잘못을 지적하는 그 손가락을 기억하십니까. <중혼자>를 독해하고 나면 이제 손가락이 상징하는 사회적 관습이나 법률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게끔 합니다. 우리 사회는 법률과 관습으로 일괄적으로 적용될 수 없는 다양한 변수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실제 사회의 모습이고 아이다 루피노가 첫 메가폰을 잡으면서 했던 목표가 '실제 미국 사회의 모습을 그리고 싶다'는 생각과 상통합니다. 필름 누아르 왜곡된 시각과 관습이나 법의 압박에서 벗어난 벌거벗은 미국 사회를 그리면서 루피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개인의 영역입니다.
남편 콜리어 영은 루피노의 영화의 제작자이면서 공동 각본가였다가 그녀와 이혼을 하고 이 영화에서 이브 역을 맡은 조앤 폰테인과 재혼을 했습니다(게다가 폰테인의 어머니까지 이 영화에 출연을 합니다). 아이다 루피노가 콜리어 영과 중혼 관계에 있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영화와 유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사랑한 사람이 다른 여자를 찾아가도 비즈니스 관계는 유지할 수 있다는 그런 대범함이 있었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영화 속에서 아이다 루피노는 자신의 입으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는) 아이가 아니잖아요’.
아이다 루피노는 여성 영화 감독 중에 좋은 감독이 아니라, 1950년대 출중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감독이었습니다. 하지만 할리우드는 그녀가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아이다 루피노의 나머지 영화들도 씨네스트에 많이 소개되었으면 합니다.
지나치게 긴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p.s. 영화 <중혼자>는 Harrum님의 정성스런 번역으로 자료실에 올라와 있습니다. 아래 주소를 클릭해서 꼭 보시길 바랍니다.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2062619&sfl=mb_i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