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뤽 고다르와 존 카사베츠: 현대 영화의 두 거목 5부

영화이야기

장뤽 고다르와 존 카사베츠: 현대 영화의 두 거목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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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글에서는 장뤽 고다르와 존 카사베츠의 

 주요 차이점에 대해서 논해보겠다. 이전 글에서 필자는 

에이젠슈타인의 몽타주 강점은 보는 이로 하여금 

불완전한 묘사의 이미지들을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이는 에이젠슈타인의 견해와는 어느 정도 거리가 있다.)


    완전한 묘사의 이미지에 대한 로베르 브레송의 견해를 보자


    “......한 이미지를 따로 떼어놓고 봤을 때 

그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표현한다면, 

그리고 이미지가 해석을 포함하고 있다면, 

이 이미지는 다른 이미지와 접촉하여 변화될 수 없다. 

다른 이미지는 이 이미지에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으며, 

이 이미지 또한 다른 이미지에 어떤 힘도 행사할 수 없다. 

이미지는 작용도 없고 반응도 없으리라. 

이런 이미지는 시네마토그라프의 체계에서 제한적일 뿐만 아니라 무용하다.” 


  브레송의 이 견해는 정확하지 않다. 

어떤 묘사를 분명하게 한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되는 관계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브레송의 견해에서 드러나듯이 분명한 것은 

불완전한 이미지들끼리의 결합은 (완전한 묘사가 들어간 이미지들의 결합보다) 상호 간에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는 것이다. 

마치 퍼즐(불완전한 모양의)을 맞추는 것처럼 말이다. 

         

    아마 고다르는 그러한 강점을 가장 잘 살린 인물일 것이다.

  “A woman is a woman”의 아래 씬을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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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씬에서는 애인의 친구와 바람났던 여 주인공이 애인에게 실토하는 

 과정을 특이하게 묘사한다. 여 주인공이 남 주인공과의 시선을 

 마주치다 피하는 과정이 반복적으로 나온다. 

 더욱 중요한 것은 여 주인공이 남 주인공을 쳐다보는 모습이

 정면 방향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캐릭터의 시선이 정면을 향하면, 보는 이는 캐릭터가 

마치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것과 같은 착시 현상을 느낀다. 

 비록 보는 이는 이 씬에서 여 주인공의 시선이 

남 주인공에게 향해있다는 것을 인식하지만, 그 시선 자체는 

보는 이 자신에게도 향하기에 대체, 감독이 무슨 의도를 갖고 저러는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씬의 묘사는 불완전하다. 

그러나 이 씬의 이미지 관계를 재구성하면 마치 완성 된 퍼즐을 

보는 것처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다.  


   고다르는 이 씬에서 여 주인공이 남 주인공에게 진실을 

실토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드는데 중점을 뒀을 것이다. 

그래서 여 주인공이 남 주인공과 눈을 마주치다 피하는 모습이 계속 나온다. 마치, 더 이상 눈을 마주치는 상황이 피할 수 없을 때까지 반복된다. 

그렇다면 왜 굳이 여 주인공의 시선 처리를 정면으로 보였을까? 

여 주인공은 남 주인공을 쳐다보는 동시에 보는 이에게도 시선이 향한다.

남 주인공과 달리 보는 이는 이미 여 주인공이 바람났다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여 주인공이 시선을 정면으로 응시하고 피하는 것을 반복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은 남 주인공 때문이 아니라 보는 이 때문으로 보일 수도 있다. 여 주인공은 보는 이를 속일 수 없기 때문이다. 


  이 씬은 보는 이와 시선을 마주치고 피하는 여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서 남 주인공에게 진실을 고백해야만 하는 

여 주인공의 상황을 강력하게 표현한다. 


   1960년대 고다르의 영화는 철저하게 숏에 기반을 둔 것이다. 

  숏에 기반을 뒀다는 것은 전통적인 영화처럼 각 숏 들 안에 

  어떠한 미적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앞선 씬에서 분석한 것처럼 말이다.

   전통적인 영화와 고다르의 차이점은 고다르 영화가 앞서 언급한 대로

 숏에 불완전하거나 미스테리한 묘사가 매우 많아서 보는 이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다르의 영화는 이미지의 관계를 능동적으로 재구성하면 각 씬의 전반적인 면을 파악할 수 있다. 각 숏안에 어떠한 미적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반면, 카사베츠의 영화는 숏 안에 그러한 미적 목적이 없다. 


       “무엇보다 주목할 것은, 디지털 시네마에서 테이크는 

       가능하지만 숏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로도웍의 말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숏의 의미론적/형태론적 

       경계와 분절 단위로서의 효용성이 상당 부분 

       의미를 상실했다는 점이다. 현재의 디지털 몽타주에서 

       숏은 절단과 접속의 단위라기보다는 데이터베이스의

        전자정보처럼 처리된다

           ......숏이 의미론적/형태론적 관점에서 

       더 이상 단일한 분절 단위로 기능하지 않을 때, 

     숏의 경계와 실효성은 어떻게 규정될 수 있을까?“


        존 카사베츠의 영화는 숏이 아니라 테이크의 영화다. 

      카사베츠의 영화는 숏의 분절과 접속이 아니라 테이크의 

      시간 관계로 이뤄진다. 실제로 카사베츠는 영화를 만들 때

      아주 짧은 씬이 아니라면 거의 모든 것을 10분 짜리 테이크로

      찍는다고 했다. 


         영화를 롱테이크의 미적 목적이 아니라 

       차후 편집을 위한 롱테이크로 찍는다면 

       시간이라는 개념이 매우 중요하다. 

       영화에서 시간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아마 가장 본질적인 것은 템포일 것이다. 

       같은 테이크 안의 이미지라도 그 안에 어떤 이미지를 

       편집 하냐에 따라서 어떤 액션이 부드럽게 이어질 수도 있고 

       비약할 수도 있다.


          존 카사베츠 영화는 템포 때문에 캐릭터들이 

      무심결에 행동하거나 자동 반사적으로 행동하는 상황이 

      매우 흥미롭게 펼쳐진다.


            다음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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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Comments
3 킹오뚜기  
11 oO지온Oo  
으음.. 이 글은 후반부를 조금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다음편에서 해소될까 기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