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설득할 수 있는 영화

영화이야기

아내를 설득할 수 있는 영화

15 하스미시계있고 13 1240 0

배우자를 설득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안다. 나랑 피한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배우자는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존재다. 집사람도 그렇다. 내 눈빛만 봐도 오늘 뭘 먹었는지, 돈은 얼마나 지불했는지, 직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내는 초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요즘은 집에 같이 있을 때도 눈을 자주 안마주치거나 표정은 가능한한 무표정으로 할려고 노력한다. 뭔가 탄로날 짓도 안했는데 쫄리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거 갱년기 증상인가?


최대한 부처님 염화미소 표정을 짓고 TV를 보고 있으면, 이 아줌마가 눈으로 내 몸 전체를 스캔을 하는데 하루에 두 세번은 하는 것 같다. 지이잉~ 하고 시선이 훓고 지나가면 식은 땀이 나는데.. '셔츠 뒤집어 입었네', '양말이 짝짝이네..' 따위의 지적을 한다. 진짜 놀라운 거는 다음과 같은 거다. 침실에서 휴대폰으로 좀 괜찮은 토트백을 고르고 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이번 달은 돈을 좀 아껴쓰야 할 것 같네. 목돈 나갈게 생겼거던!'


사전에 뭔가를 설득할 의지를 꺾어버리는 공격적인 스캔 전술. 그렇다고 모든게 이 아줌마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간혹 내 설득이 통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신혼 무렵 꽤 비싼 오디오에 내가 뻑가있을 때였다.

백화점에 진열된 오디오를 보고 입이 마르도록 저걸 구입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하고 있는데 아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냥, 눈으로만 봐. 꼭 필요하지도 않는 걸 다 가지려고 하지말고'.

어찌나 화가 나던지 내 입에서 툭 튀어 나온 말. "당신도 그냥 눈으로만 볼 수 있었는데.. 어느 놈이 데려갈까 봐 불안해서 내가 청혼한거야. 저 오디오도 마찬가지라구!" 이 등신스러운 말이 통했다. 아내는 뒤도 안돌아보고 그 자리에서 결제를 했다.


단가가 더 높은 것인데 별 말도 안하고 자연스럽게 설득한 적도 있다. 레이싱 카가 너무 타고 싶어서 한 달째 지나가는 말로 휴대폰 사진을 보여주며 '이 차 멋있지~'를 노래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가 무슨 일이 있어 집에 늦게 들어왔는데 내가 저녁도 안먹고 어두운 거실에 누워있는 걸 본 거다. 전 날 마신 술 때문에 만사가 귀찮아서 누워 있는 것인데.. 내 얼굴은 하얗게 되어 있고 손에 쥔 휴대폰에는 레이싱 카 사진이 나와있었고.. 울 마눌님 '이거 안 사주면 남편이 죽을지도 몰라'라고 머리가 돌아갔는지 며칠 뒤 바로 허락 받고 새 차를 구입하게 되었다는 우리 집에 전해오는 전설같은 이야기.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중에 <다크 워터스>(2019)라는 영화가 있다. 전세계에 독성 물질을 유출시킨 화학 기업인 뒤폰사와 그 사실을 고발한 변호사 롭 빌런의 실화를 토대로 한 영화다. 이 변호사 역을 헐크의 마크 버팔로가 연기하는데 나는 도무지 실감이 안나는 거다. 좀 있으면 롭 변호사가 분노 게이지가 상승해서 헐크로 변해서 뒤폰사 간부를 건물 창 밖으로 던지겠구나 등의 생각이 자꾸 영화 몰입을 방해하였다.

그러다가 놀라운 장면이 등장하는데.. 뒤폰사가 사용하는 폐기물은 가정용 프라이팬에도 사용이 되었다. 롭 변호사가 한밤 중에 일어나 부엌에서 식기구를 하나 씩 하나 씩 검토하고 있는 장면이 있다. 딸그락거리는 소리에 놀란 롭의 아내가 일어나서 '당신 밤에 잠 안자고 뭐하냐?'고 물으니 롭이 더듬거리면서 그간 사정을 설명하는데 아내한테 설명하는 장면이 법정 장면으로 디졸브 되어 넘어간다. 그러니까 토드 헤인즈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아내를 설득하면 법정도 설득할 수 있다는 것을.


내가 별것도 아닌 이 이야기를 이렇게 너저분하게 길게 쓴 이유. 최근에 아내를 설득하다가 실퍠한 경험 때문이다. 올 초에 이상하게 영화를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연출을 맡지는 않지만 근사한 각본을 하나 써보고 싶어서였다. 공을 들여 시놉시스를 쓰고 드라마 시청의 여왕이신 아내 앞에 다가가 쑥스럽게 읽었다. 그동안 봐왔던 드라마 내공을 토대로 제 데뷔작을 어여삐 봐주시옵소서. 마음 속으로 간단한 기도후 또랑또랑 글을 읽어내려갔다. 내 낭독이 끝나자 아내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한참동안 쓰윽 스캔하면서 내뱉은 말.

"하지마~ 사람들에게 비웃음 당하기 쉽상이야. 쯧쯧". 

들고 있던 시놉시스가 손끝에서 떨어져 나갔고, 내 꿈이 깨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찬란한 슬픔이 밀려오겠지…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작을 생각해내야 아내를 설득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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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Comments
15 Harrum  
17 달새울음  
영화화 되지 못한 한국영화 시나리오를 수 백여편 읽어본 사람으로서 시계있고님의 시나리오가 읽고 싶어지네요...
15 Harrum  
미 투.
34 금과옥  
3333333333
S Cannabiss  
저는 아내를 설득할 수 있는 비법을 압니다
3 쉐도엘프  
첫 술에 배부를 순 없지요.
8 늪지  
"당신도 그냥 눈으로만 볼 수 있었는데.. 어느 놈이 데려갈까 봐 불안해서 내가 청혼한거야!"
와이프님께 시전했으나....
그냥 두지 그랬어!!! 라고 하셨습니다....
ㅎㅎㅎ
3 무구유언  
ㅋㅋㅋㅋㅋㅋㅋㅋ
15 Harrum  
곰곰히 생각하니 시계님 내추럴본선수였군요.
흠~
눈치 채셨군요~ ㅎㅎ

추카추카 70 Lucky Point!

1 일상  
아내를 설득하면 그게 바로 걸작입니다 ㅎㅎ
3 무구유언  
오랫만에 글 읽다가 대차게 웃었습니다.

저에게 큰 웃음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 시나리오 포기하지 마시고 계속 수정해 나가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