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장 매체의 물성을 그리워하며
예전에 소장했던 비디오들이다.
이 글쓰기 란의 분류가 '추천비디오'라 반가운 마음에 쓴다.
운영자님의 말씀대로 사적이든 비평적이든 더 많은 영화글이 여기에 올려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집'에 HDD, SSD 보조 기억장치가 20여개 53TB 소장 중이다.
연말이 되면 각 경로에 담긴 자료를 위 장치에 이동시키는 '꽁냥꽁냥'을 행한다.
본체 단자에 선을 연결하고, 전원을 주입하는 경로는 자료를 손으로 이동시킨다는
귀여운 착각을 생성시킨다. 마치 그 선의 주행 어딘가에 자료가 이미지와 서사를 쏟아내는 것 같다.
89년 천안문과 90-91년 소련 붕괴 당시 하루에도 몇 편의 논문이 학교 앞 서점에 쌓였다.
푸코와 들뢰즈가 소개되긴 했지만, 여전히 발리바르의 독야와 알튀세르의 유언이 흩날렸다.
국가 사회주의의 균열과 민중 항쟁이라는 모순은 사회과학이 해제해야할 절대 과제였다.
손에 미학 이론서를 들고 있으면, 아직은 권의 선배들이 눈을 흘기는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진보 월간지 [말]조차 후미에 문화란을 만들고 정성일의 영화글이 실리기 시작했다.
그의 비디오 소개글은 선동조로 조악했지만, 이후 [키노]의 비디오 천일야화로 승계되었다.
실제로 칼럼에서 소개된 비디오들은 출시사 사정으로 인해 시중에 유통되지 않은 사례가 많았다.
부산 지역에서 코엔 형제 <분노의 저격자>, 안토니오니 <욕망>, 헤어조그의 <위대한 휫츠카랄도>를
비디오대여점에서 찾기란 거의 불가능한 것은 이와는 별도의 문화 불모지를 반증했다.
에드워드 양의 <해탄적일천> 상,하 2권의 비디오를 영화 <친구>, <하류인생> 등에서 배경으로
사용된 부산 보림극장 근처 고물상에서 발견하고 그것을 먼지 가득한 천장에서 꺼냈을 때
그 비디오케이스의 감촉은 마치 영화라는 매체의 신비로운 물성을 묘지에서 개장하는 느낌이었다.
90년대 초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15년동안 비디오를 수집했을 때 이는 단순히 컬렉터의
쾌감을 벗어나 그 비디오에 담긴 영화의 본체를 누군가와 나눌 수 있다는 공산주의가 있었다.
극장주의나 필름에의 신봉과 더불어 영화는 파일이 되어 드라이브로 저장되는 경로에 이르렀다.
영화가 이같은 역사적 자기형태의 변용을 편하게 받아들였을지는 의문이지만,
그간의 흔적들을 흘려버리지 않고 붙들고 있는 이들이 있다.
‘호모 시네마쿠스’의 비디오테이프 5만 점…‘영화’로운 결말 꿈꾸다 - 주간경향 (khan.co.kr)
얼마전 관람한 <킴스비디오> 다큐와도 같은 미국적 승리와는 달리, 이 땅 부산에서
오래전 개인적으로 비디오를 기증했던 영화마을 남천점, 초량점, 대신점은 모두 폐업했고
소장했던 비디오들도 모두 처분했지만, 서울 회기역의 미래영상도 어디론가 사라졌다.
저 기사 속 지인처럼 나 역시 비디오테이프와 케이스의 감촉을 통해 전달되었던
90년대초 비디오키드가 누렸던 영화 매체의 물성을 망각하기는 어렵다.
언젠가 HDD, SSD가 하나둘씩 고장나면 혹은 드라이브보다 더 편리한 매체가 생성되면
비디오테이프 VHS가 비디오떼끄에 집어넣었을 때의 초조한 기다림이 생의 기억이 되었다.
블루레이, 4k 블루레이가 대략 3천장 정도 되네요.
비디오 테입만큼의 감촉은 아니고 훨씬 딱딱하고 단조로운 느낌이지만 아직도 물리매체만의 감촉은 남아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이 기생충 4k 블루레이를 출시하면서 영화 기생충은 내 서재에 있다고 한 게 기억에 남습니다.
물론 시대는 또 흘러 이제는 블루레이 시대마저 막을 내리려는 분위기입니다만 불법, 합법을 차치하더라도 아직까지는 최고의 퀄리티(A/V적으로)는 물리매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