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에서 천국으로 - 자크 드미 감독의 <천사들의 해안>(1963)
아녜스 바르다가 올해 3월에 세상을 뜨자 여지저기서 추모전을 열었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1990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자크 드미 감독의 회고전도 덩달아 열렸다.
이번에 자크 드미의 영화들을 다시 보면서 그의 최고 걸작이 <도심 속의 방>(1982)이라는데는 변함이 없다.
다만 다른 영화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언급되는 <천사들의 해안>(1963)을 스크린으로 본 것은 올해의 수확이었다.
영화는 뜻밖에도 아름다운 아이리스 달리 쇼트와 함께 시작한다.
재키(잔느 모로)가 니스의 아름다운 해변을 천천히 걸어오면 (자동차에 실린) 카메라는 뒤로 빠지고 아이리스가 사라지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이 아이리스 효과가 운명에 갇힌 여자가 거기서 벗어나려는 느낌을 준다.
사실 자크 드미의 영화는 초기작 <롤라>(1961) 이후 인간을 짓누르고 있는 운명에서 벗어난 적이 없다.
자크 드미의 영화 중 대중적으로 가장 성공한 <쉘부르의 우산>(1964)은 비내리는 장면에서 시작해서 눈내리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다.
하지만 영화 속 두 남녀는 정작 아무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그들은 운명처럼 쏟아지는 비와 눈을 맞으며 담담하게 세상을 살아갈 뿐이다.
<천사들의 해안>의 마지막은 떠나는 장을 쫓아 도박장을 뛰쳐나온 잔느를 보여준다.
운명의 도박을 그만 둔 재키는 장(클로드 만)을 껴안는다.
마지막 장면은 도입부와 유사하게 카메라는 달리 아웃을 한다.
사랑과 도.박의 유사성과 차이점을 다룬 이 작품은 카메라의 지속적인 움직임으로 지옥에 빠진 여자가 어떻게 거기서 벗어나는지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영화는 우연히 카.지노를 찾은 순진한 남자 장이 도.박 중독자인 재키와 사랑에 빠지는 이야기다.
도박 중독자인 재키와 달리 장은 친구의 꾀임에 빠져 카.지노를 찾게 되는 케이스다.
그래서 영화가 시작할 때 장과 그의 친구를 따로 찍다가 점점 도.박에 빠져들면서 두 사람의 투 쇼트가 많아지는 것도 인상적이다.
두 사람을 나란히 놓음으로써 장은 그의 친구처럼 노름꾼이 된 것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
장이 혼자서 카.지노를 찾아가는 장면을 보자.
도박장 입구의 거울에 장의 모습이 비친다.
마치 이것은 그의 자아가 분리되어 통제력을 상실할 것 같은 아찔한 장면이다.
같은 장면이 재키가 도박장을 탈출하는 장면에 반복된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꾸로다.
카지.노를 뛰쳐나간 장을 쫓아 거울 저 끝 쪽부터 재키가 달려올 때, 거울에 비친 그녀의 이미지들이 분리되었다가 다시 결합되는 느낌을 준다.
마치 지옥에 빠진 도스토예프스키적 인물들의 수난극을 그린 이 영화는 꼭 봐야할 걸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