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형제여어디있는가..보신분있나요?

영화이야기

오형제여어디있는가..보신분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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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참재미있게본영화입니다.이영화에나오는풍경들이아주멋지죠
음악들도 좋고 한번보고반해 3번본영화입니다 유쾌한영화죠

<퍼온글>
O Auteur, Where R U Going?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이토록 재기발랄하고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코엔 형제의 상상력은 분명 소재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 영화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야기꾼으로써의 본질적 위치를 다시금 알려준다. 진정한 이야기꾼은 아무리 진부한 소재일지라도, 항상 듣는 이를 몰입시키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다. 이처럼, 헐리웃에서 코엔 형제가 차지하고 있는 이름값은 바로 이 강박증에 걸린 이야기꾼으로써의 위치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를 본다는 건 언제나 즐거운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웃음의 본질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는 억지로 웃음을 주조해 내지도, 웃음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웃음을 만들어 내는 방식은 황당하고 기괴한 상황과 행동의 연속이 아니라, 그저 우리 옆에서 언제든지 발견할 수 있는 사소한 행동들, 아니 우리 스스로 하루에도 몇 번씩 저지르는 행동들을 익숙하지 않은 상황과 결합시키는 일이다. 그리고 그 상황이 코엔 영화에서 그토록 독특하게 느껴지는 건, 그것이 철저하게 영화적이기 때문이다.
코엔 형제의 영화들이 만들어 내는 영화적 상황의 대부분은 온갖 쟝르적 뒤집기로부터 돌출한다. 액션 스릴러의 전형적인 추격 장면은 돈 한푼 없는 애비의 하기스 쟁탈전으로 탈바꿈하고(<아리조나 유괴사건>, 소도시의 치정극은 아줌마 경찰의 손에 여지없이 해결된다.(<파고>) 이런 뒤틀림은 분명 현실을 왜곡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 코엔 형제의 주된 관심사는 현실보다 더 익숙한 영화적 전형들과 관습들을 비틀어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익숙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 코엔 형제는 그 경계를 둔 두 가지 영역을 모두 기존의 영화 안에서 찾는다. 어떻게 보면, 코엔 형제는 자기들을 20세기에 사는 방랑 시인으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인지, 코엔 형제가 21세기의 첫번째 해에 도전한 <오 형제여 어디 있는가? O Brother, Where Art Thou?>가 고대 그리스의 고전인 호머의 <오딧세이>를 원전으로 하고 있다는 점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실존인물인지 조차 확인되지 않은 ‘저자’인 호머가 이곳 저곳을 떠돌며 마치 퀼트를 짜듯 <오딧세이>라는 대 서사시를 만들었듯, 코엔 형제 역시 마찬가지다. 단지 호머가 지중해 지역을 돌아다녔다면, 코엔 형제는 헐리웃을 헤메다닌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마치 자신들의 원조를 찾은 마냥, 코엔 형제는 선배의 이야기틀을 자신들의 방식으로 마구 수선하고 재단한다. 그 결과는 과연 전혀 새로운 것일까, 아니면 이야기가 역사에 등장한 바로 그때부터 이어온 여타의 이야기들과 다를 바 없는 것일까?
에버렛 율리시즈(조지 클루니), 델마(팀 블레이크 넬슨), 피트(존 터투로)는 쇠사슬에 묶인 채 시골 농장에서 노역을 하고 있는 죄수이다. 에버렛은 두고온 아내 페니(홀리 헌터)가 자신을 버리고 재혼한다는 소문을 듣고 이를 막기위해 탈출을 결심한다. 하지만 탈출하기 위해서는 같은 쇠사슬에 묶여 동고동락해야만 하는 델마와 피트를 설득해야 한다. 결국 에버렛은 자신이 감옥에 오기 전에 묻어둔 보물이 있는데 발전소가 설치되면서 보물이 물에 잠길 위험이 있으므로 빨리 보물을 찾으러 가자고 거짓 말로 두 사람을 유혹하고, 어딘가 멍청함이 주르르 흐르는 듯한 두 사람은 에버렛의 제안에 넘어간다. 이렇게 3인의 죄수들은 (너무도 쉽게) 탈출에 성공하고, 방랑길에서 우연히 만난 흑인 맹인은 그들이 인생을 바꿔 놓을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예언을 해준다.
그들이 처음으로 만난 사람은 자신의 영혼을 악마에게 팔아 기타를 배웠다는 흑인 연주자인 토미. 그들은 돈을 벌기 위하여 토미와 함께 우연히 찾아간 작은 라디오 방송국에서 녹음을 허고 사라진다. 하지만 그들이 녹음한 노래는 우연치 않게 공전의 히트를 치고, 사람들은 그들의 정체를 쫓게 된다. 하지만 이런 사실을 모르는 그들은 경찰에게 계속 추적을 당하고, 이상하고 재미있는 사람들을 만나 신비한 경험을 하게 된다. 그러던 중 계곡에서 아리따운 세명의 사이렌을 만나 유혹을 당하고, 피트는 그들 중 하나에게 끌려가 간수에게 붙잡히고 만다. 에버렛과 델마는 그들의 친형제와 같은 피트를 다시 감옥에서 구해내고, 그들은 결국 에버렛의 고향에 도착한다. 하지만 그 곳에는 보물보다 더욱 커다란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러시아의 민담학자인 블라디미르 프롭(Vladmir Propp)의 형태론을 증명이라도 하듯, 엉뚱하게만 보이는 이 세 사람의 탈출기는 고집스럽게도 율리시즈의 여행기를 따라간다. 탈출과 함께 만난 흑인 맹인은 예언자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고, 강가에서 이들을 유혹하는 세 명의 여인들은 율리시즈를 유혹하는 세 명의 사이렌을 몽환적인 화면 안에 그대로 옮겨 놓는다. 거기에 방랑 시인(토미)과 시가꾼 사이클롭(빅 댄)은 세 명의 율리시즈를 도와주기도 하고, 방해하기도 하는 조력자/방해꾼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들이 전부 <오딧세이>와 같은 것은 아니다. 착하디 착한 아내 페넬로페(페니)는 줄줄이 낳아 놓은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 돈 많은 남자와 재혼을 서두르는 악바리이며, 율리시즈를 애태우는 괴물들은 KKK단의 모습으로 둔갑한다. 이렇게 코엔 형제는 울리시즈의 지중해를 에버렛의 공황기 남부 미국으로 가져오면서 기상천외한 변주를 보여준다. 마치 율리시즈의 노래가 우스꽝스러운 컨트리 넘버로 탈바꿈하는 것처럼 말이다.
전형적인 로드 무비의 플롯과 <오딧세이>를 결합한다는 기발한 착상에도 불구하고, 코엔 형제가 놓치지 않고 있는 일관성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의 영화를 관통하고 있는 ‘미국’이라는 존재다. 데뷔작인 <분노의 저격자 Bllod Simple>에서 가장 최근 작인 <위대한 레보스키 Big Lebowsky>까지 코엔 형제의 쟝르 변주에는 미국이 그 중앙에 떡 자리를 잡고 있다. 아이 유괴극에서는 미국 중산층의 가치가 조롱되고(<아리조나 유괴사건>), 한 시나리오 작가의 딜레마는 헐리웃에서 이야기한다는 것에 대한 작가적 고민을 담고 있으며(<바톤 핑크>), 아무 것도 성취 못하는 액션 느와르의 주인공은 아메리칸 히어로의 전지전능함을 비웃는다.(<밀러스 크로싱>). 헐리웃 영화의 역사를 복습이라도 하듯, 헐리웃의 쟝르들을 짜르고 나누어 다시 조합해 온 코엔 형제는 그 안에 있는 미국적 가치들, 미국적 기호들 역시 조롱하고 또 동정한다. 클라크 게이블을 흉내낸 것이 지극히 명백해 보이는 조지 클루니의 ‘뽀마드’ 기름이나, 미국 소도시의 전형적인 가치들을 대변하는 정치인과 종교집단의 우스꽝스러운 행동들은, 당시 영화를 지배하던 가족 이데올로기, 뉴 딜 이데올로기 등의 미국적 가치들을 비웃기 위한 ‘변형’들인 것이다. 이렇게 율리시즈의 신탁과 신성은 부르주아 가족 이데올로기와 미국의 진보 이데올로기로 바뀌었지만, 그것들이 관객에게 말을 거는 방식은 전혀 다르다.
이토록 재기발랄하고 천진난만하기까지 한 코엔 형제의 상상력은 분명 소재주의에 빠져 있는 우리 영화의 현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이야기꾼으로써의 본질적 위치를 다시금 알려준다. 이야기꾼의 딜레마는 소재의 참신성이나 주제의 명백함보다는 이야기 하는 방법에 있다. 진정한 이야기꾼은 아무리 진부한 소재일지라도, 항상 듣는 이를 몰입시키는 자신만의 방법을 찾는다. 또 그거야말로 이야기꾼이 끊임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 선제 조건이기도 하다. 이처럼, 헐리웃에서 코엔 형제가 차지하고 있는 이름값은 바로 이 강박증에 걸린 이야기꾼으로써의 위치이다. 그들은 똑 같은 시스템을 통해 무늬만 다른 이야기를 만드는 데에도, 또 전혀 새로운 이야기를 창조해야 한다는 고민에도 도통 관심이 없어 보인다. 그들은 항상 다른 작품, 다른 이야기에 기생하여 그것들을 분해하고 조립하여 또 다른 어떤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데에만 집착한다. 마치 호머의 이름이 저자의 존재만을 의미하는 것이지, 그 저자의 어떤 컨텍스트도 텍스트에 부여하지 못하는 것처럼, 코엔 형제의 이름 역시 저자로서의 전지전능한 권위를 박탈당해 버린다. 아니 어쩌면 그들 스스로 저자의 권위를 버려버리는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호머의 궤적을 밟아온 지 20여년이 다 되어가는 이들 악동 방랑 시인 형제의 작업은 이제 재기발랄함과 참신함 이외에는 아무 것도 소구 하지 못하는 게 아닌가 하는 혐의를 지우기 어렵다. 변주도 4악장이 넘어가면 졸음이 오기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지루할 정도로 같은 일을 반복하고 있는 이 골 때리는 형제들을 탓할 생각은 없다. 어쩌면 문제는 그들이 아니라 이야기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린 우리들에게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은자 nicole@joycin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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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1 박지훈  
  DVD로 소장중임다...
1 정성교  
  바톤핑크도 코엔형재였군요.. 그남나는거기없었다..도 재밌더군요.
1 정성교  
  남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