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걸음걸이
일전에 외국에서 영화 공부를 하는 여대생이 찾아와서 자신이 만든 미술 전시회 홍보 영상을 한번 봐 달라 했습니다. 지인의 딸이라 예전부터 이래저래 영화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책도 자주 선물하고 같이 영화를 본 적이 있었기에 그런 부탁을 했나봅니다.
영상은 그 또래 아이들이 만든 것보다 나은 편이었지만 마음 한 구석이 내내 불편해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습니다. 배우의 걸음걸이가 어색하다는 것이 제가 잡은 흠이었습니다.
‘아... 네~’하고 돌아서는 모습에 불편함이 묻어있더군요. 아마 그 당시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의 <글로리아를 위하여>(2020)를 막 보고 난 뒤여서 걸음걸이가 눈에 더 띄었을 수도 있습니다. <글로리아를 위하여>를 보면 두 남자가 한 여자를 기다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두 사내는 여자의 예전 남편과 현재의 남편입니다. 예전 남편이 감옥에서 출소를 하고 집을 찾아오는데 아내는 없고 같이 살고 있는 새 남자가 있습니다. 두 사람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는데 창 밖에 아내가 저만치서 걸어오는 장면이 있습니다.
로베르 게디기앙 감독의 아내이자 배우인 아리안 아스카리드가 연기하는 여주인공의 걸음걸이는 숨이 멎을 지경으로 놀랍습니다. 최근 10년 사이에 영화에서 본 가장 멋진 걸음걸이였습니다.
삶에 찌들고 희망이 없어 보이는 걸음, 그녀의 발걸음에는 다른 대사나 설명이 필요가 없습니다. 그녀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가 그녀가 내딛는 하중에서 느껴지니 말입니다.
아마추어가 찍은 영화나 아마추어가 연기하는 영화를 보면 걸음걸이에서 부자연스러움이 느껴집니다. 속도가 너무 빠르거나 너무 느리기도 하고 카메라를 의식한 걸음걸이는 누군가의 시선이 발목을 잡고 있는 느낌마저 듭니다. 카메라로 걸음을 찍고 걸음을 연기한다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은 거라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습니다. 이제 막 영화를 시작하는 학생에게 이런 지적을 했으니 그게 제대로 받아들여졌을 리가 만무하죠.
어제 밤, 잠이 안와서 뒤척이다 서재에 꽂혀 있는 책을 하나 꺼내 읽었습니다. 일본 영화를 많이 보신 분은 아시겠지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에 자주 출연했던 나카다이 타츠야라는 배우가 있습니다. 그가 쓴 <일본영화의 황금시대>라는 책이 궁금해서 오래 전 해외직구로 주문했는데 갑자기 그 책이 보고 싶어졌습니다.
나카다이 타츠야와 구로사와 아키라와의 만남은 배우의 나이 스무살 때 <7인의 사무라이>(54)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였습니다. 영화 초반에 도적으로부터 마을을 지킬 목적으로 농민들이 사무라이를 고용하려고 거리를 헤매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한 떠돌이가 쓰윽하고 몇 초간 농민들 앞으로 지나가는데 그 사람이 나카다이 타츠야입니다(위의 사진 참조). 나카다이가 이 역을 하기 위해 수염도 달고 상투도 틀고 칼도 차고 이랬더니 구로사와 감독이 “야, 너 이리와서 앞장 서서 걸어봐”라고 하더랍니다. 그런데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야 임마, 그 걸음걸이가 뭐야!”하고 호통을 치는 겁니다. 지금까지 신극만 찍어 온 나카다이는 기모노를 입는 것도 처음인데 사극의 걸음걸이가 어떤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네요. 그것을 알려주는 사람도 없었구요.
촬영은 아홉시에 시작되었는데 이 엑스트라의 걸음걸이 하나 찍는데 오후 세 시까지 걸렸다고 하니 나카다이 타츠야는 단단히 혼쭐이 난 것입니다. 유명 배우들 뿐만 아니라 수백명의 배우와 스탭이 지켜보는 앞에서 계속 NG가 났으니까요. 엑스트라를 교체할 수 있었는데도 구로사와 감독은 끝까지 연기를 시키면서 사극의 걸음걸이를 철저하게 가르쳤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에 나카다이 타츠야에게는 굴욕의 시간이었습니다. 보고 있던 사람들이 “뭐야? 저 녀석은!”, “저 녀석에게 밥 주지마!” 이런 소리까지 들었다고 하네요.
이후 고바야시 마사키 감독의 <인간의 조건>(59)으로 유명해진 나카다이 타츠야에게 구로사와 아키라의 <요짐보>(61)의 악역 우노스케 역이 들어옵니다. <7인의 사무라이> 때 혼줄이 난 나카다이는 그 역할을 거절했는데 그럴수록 구로사와 감독은 포기하지 않더랍니다. 결국 시부야의 한 여관에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됩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대본이 마음에 들지 않던가?”하고 묻자 젊은 혈기의 이 배우는 세계적 감독인 구로사와에게 대듭니다. <7인의 사무라이>에서 굴욕을 잊을 수가 없어서 당신의 영화에는 절대 출연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입니다. 그 말을 듣자 구로사와는 웃으며 “그 일이야 기억하고 있지, 그렇기 때문에 너를 쓰려고 하는 거야”. 이렇게 되자 나카다이 타츠야는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서 <요짐보>에 출연하기로 했다고 합니다.
이게 무슨 말일까요? 아마 구로사와 아키라는 <7인의 사무라이>를 찍던 시절 엑스트라였던 나카다이의 능력을 꿰뚫어봤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많은 사람 앞에서 사극의 걸음걸이를 단단히 훈련시켰고 먼 훗날 <요짐보>에서 이 배우를 다시 쓸려고 큰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겠지요.
나카다이 타츠야의 책을 읽을 때, 갑자기 어린 여대생이 보여 준 그 동영상이 생각났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내가 영상의 걸음걸이를 지적했는데 마음 다치지 말고 묵묵히 영화의 길을 걸어갔으면 합니다. 제가 이 에피소드를 조금 일찍 알았다면 근사하게 돌려 이야기 해줄 수 있었을텐데하는 아쉬움으로 잠을 설쳤습니다.
하지만 그 친구는 자신의 영화를 볼 때마다 하스미님의 말씀을 떠올리겠죠.
처음엔 '저게 뭐 어때서?', '뭐가 이상한데?' 그렇게 생각하겠죠. 자신이 만든 영화니 또 보게 될겁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배우의 걸음걸이가 이상하구나...뭐가 잘못된거지?'라고 생각이 들었을 때 감독으로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른이 항상 옳은(맞는)건 아니지만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게 해주지 않나 싶습니다.
걸음걸이 이야기가 나와서 조금 더 보충하자면 댓글에 언급한 이치카와 곤의 <타오름>은 각각 말더듬이와 소아미비를 앓는 두 인물의 컴플렉스에 가득찬 삶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나카다이 타츠야는 여기서 삐딱한 성격의 소아마비 환자를 연기하지요. 영화 촬영 전에 나카다이는 소아마비 환자를 몰래 연구를 해서 걸음걸이와 말투를 준비를 하고 촬영장에 나갔다네요.
나카다이 타츠야가 처음 등장하는 운동장 씬을 찍는데, 이치가와 곤 감독이 '나카타이 군, 이리와 보게. 한쪽 발의 반, 그러니까 무릎 아래가 없는 것처럼 걸어봐'라고 주문을 하더랍니다. 자신이 생각했던 주인공의 걸음걸이와 다른 것을 주문한 것인데, 영화를 보면 이 기괴한 걸음걸이가 리얼리즘을 넘어선 이치가와 곤만의 독특한 세계를 만들어내고 있지요.
그래서 그의 외모가 먹히는 역할이...카리스마 작렬하는 무사역이나...광기어리거나 비열하고 정상적이지 않은 사고방식의 사람 등등에 최적화되었고..
감독들도 주로 그런 역에 캐스팅했고 본인도 그런 역할에 충실한듯 합니다...
"인간의 조건"에서의 심지곧은 군발역할은 안어울리더군요...
젊은 시절의 그에게서 모리 마사유키 같은 낭만적이지만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사랑꾼(모리가 아주 과격하고 무식하게 나오는 영화도 있습니다..)이나 우에하라 켄 같은 건들건들 뺀질이 역을 기대하는 건 도저히 어울리지가 않는듯요...
이미 그의 강렬한 외모에서 풍기는 맛 때문에 팔색조 연기보다는 강렬한 연기에 특화되었다고 생각되네요..
상남자 외모의 미후네 도시로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그의 연기폭도 선굵은 남성상에 국한되니깐요...
"그 어르신의 말씀이 지나고 나니 이런 깊은 뜻이었더라..." 하는 이야기들은 너무나 많으나
저는 그걸 믿지 않습니다. 그건 그걸 자신에 맞게 잘 적용하고 활용한 그 젊은이의 능력이지요.
저의 경우 제가 매우 중요했던 윗 사람들의 조언은, 장황하고 모호하며 때론 실랄하며 모욕적이고 비인격적이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자기과시와 모순에 빠져 있었죠. 저도 이제 이미 변변찮은 인격으로 그들의 나이까지 먹어버린 지금은
젊은 친구들, 심지어 아들에게도 어떠한 마음으로의 고언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은 그들의 것이고, 우리가 그래 왔듯이
그들이 판단하고 결정해야 할 몫이며 그들의 책임 입니다. 한번도 할 일에 충실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우리와
스스로 헤쳐 나가야할 일들이 산적한 그들 사이에 서로 존중하는 일만 남은거죠. 그러니 너무 괘념치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