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아래 어디까지 시추를 해야할까? 그 시작을 구식의 전후 여성의 위치에 대한 재정립으로 한다면
본편은 매우 갸날픈 좌표를 부여받게된다. 이는 엔딩의 바닥 청소를 하는 여인들로 정점이 된다.
하지만, 이같은 허울은 본편에서 남성의 위치를 상기할 때 무력해지는데, 성인 남성 3인은 모두
무직과 탐욕 사이를 오가면서 관객으로부터 이입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즉, 본편은 전후 복귀한
남성의 자리를 지정하기 위한 작업으로 충족적일 수 없다. 그들은 끝내 가족 시네마의 밖에 있다.
두번째 시선은 자본주의로 향할 것이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은 자본주의의 경제 그래프를
단순화시키고, 딸의 계급적 욕망은 공간을 이동 형성시키면서 천박함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기능적 측면에서 딸의 본질주의는 본편을 이화시키면서 오히려 환타지로 추락시킬 위험을 노정한다.
근친상간적 코드와 여성의 다리에 대한 시선 등은 이같은 이념적 장치와 중층적으로 포개질 수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편은 전체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 지점의 실종 혹은 부재라는 비가역성을 지향한다.
관객은 도입부의 첫 발성인 '밀드레드'가 무엇일 수 있는지를 질의하는 것이 오프닝 타이틀의 거품으로
산화된 파도와 동일함을 인지한다. 더욱더 친절하게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거울 효과를 프레임 내부로
초대하여 거울에 누구도 명시될 수 없음을 진술한다. 진범이 누구인지 은폐하려는 장르의 규정에서
진범 자체가 규정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명시한다. 밀드레드의 첫째 딸에 대한 비합리적인
욕망의 대상화에는 그 자신의 자본가적 성장이 실상 무효임을 자백한다. 장르 안에서 최종적인 범인의
실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본편에서도 범인은 '어떻게든 되겠죠'로 상황을 형해화시킨다.
전후 최초의 가족 시네마라는 측면에서 본편은 모두가 텅 빈 채로 버려진 상황을 직시하도록 유도한다.
억척같은 어머니 (우리의 김혜자 님같은)
딸과의 갈등속에서도 꿋꿋이 사랑을 지켜가는 우리의 어머니...
추카추카 6 Lucky Point!
추카추카 50 Lucky Point!
단 평 : 바닥을 닦아야한다.
저 아래 어디까지 시추를 해야할까? 그 시작을 구식의 전후 여성의 위치에 대한 재정립으로 한다면
본편은 매우 갸날픈 좌표를 부여받게된다. 이는 엔딩의 바닥 청소를 하는 여인들로 정점이 된다.
하지만, 이같은 허울은 본편에서 남성의 위치를 상기할 때 무력해지는데, 성인 남성 3인은 모두
무직과 탐욕 사이를 오가면서 관객으로부터 이입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즉, 본편은 전후 복귀한
남성의 자리를 지정하기 위한 작업으로 충족적일 수 없다. 그들은 끝내 가족 시네마의 밖에 있다.
두번째 시선은 자본주의로 향할 것이다. 여성의 경제적 지위 향상은 자본주의의 경제 그래프를
단순화시키고, 딸의 계급적 욕망은 공간을 이동 형성시키면서 천박함을 결코 넘어서지 못한다.
기능적 측면에서 딸의 본질주의는 본편을 이화시키면서 오히려 환타지로 추락시킬 위험을 노정한다.
근친상간적 코드와 여성의 다리에 대한 시선 등은 이같은 이념적 장치와 중층적으로 포개질 수 있다.
이같은 맥락에서 본편은 전체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 지점의 실종 혹은 부재라는 비가역성을 지향한다.
관객은 도입부의 첫 발성인 '밀드레드'가 무엇일 수 있는지를 질의하는 것이 오프닝 타이틀의 거품으로
산화된 파도와 동일함을 인지한다. 더욱더 친절하게 카메라는 노골적으로 거울 효과를 프레임 내부로
초대하여 거울에 누구도 명시될 수 없음을 진술한다. 진범이 누구인지 은폐하려는 장르의 규정에서
진범 자체가 규정될 수 없음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서 명시한다. 밀드레드의 첫째 딸에 대한 비합리적인
욕망의 대상화에는 그 자신의 자본가적 성장이 실상 무효임을 자백한다. 장르 안에서 최종적인 범인의
실체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본편에서도 범인은 '어떻게든 되겠죠'로 상황을 형해화시킨다.
전후 최초의 가족 시네마라는 측면에서 본편은 모두가 텅 빈 채로 버려진 상황을 직시하도록 유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