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문의 여자(噂の女).1954

자막자료실

소문의 여자(噂の女).1954

https://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971530

2a3ee965b696b7b19323acba6f178ed7_1484953640_5293.jpg
감독: 미조구찌 겐지

교또의 한 기생집을 중심으로

여주인인 어머니와 대학생인 딸 사이의 갈등과

그곳에서 일하는 여성들의 애환을 그린 작품

 

영자막을 옮깁니다
 

 

Comments

14 cowboy
감사합니다.^^
S 궁금맨
고맙습니다.
20 pupukim
감사합니다.
S rayphie
고맙습니다.
S 컷과송
2021. 8. 10. 재감상


단 평 : 발은 무겁다

젠더적으로 뒤집어진 서사로서의 웨스턴이라는 단정은 불가하다. 단순히 들어가는 이와 나가는 이가 서로 다른 수미의 상관이
이같은 부정 언술의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낮과 밤, 자동차와 종종 걸음, 고용주와 노동자라는 이분법을 이토록 자욱하게
채색시킬 때 관객이 여전히 여성 비극에만 차이없이 몰두하는 것은 비겁할 수 있다. 여기에는 엄연히 계약관계가 작용한다.
'다른 곳에서는 쉬게 놔두지 않아요', '우리를 싫어하는 줄 알았어요'라는 대사들을 허울의 연대로 가볍게 폐기시키는 것은
단일성 내부를 응시하지 않으려는 자기부정의 쾌감에서 비롯된다. 이 맥락이라면 2년후 나루세 미키오의 <흐르다>가 옳다.

모녀가 치유 직무의 의사를 동시에 사랑한다는 서사는 기이하다기보다는 왜곡된 은유에 가깝다. 그들의 연대가 외부 남근을
처단-차단할 수 있다는 자존감은 외려 그들이 내부에서만 존속한다는 지점에 이르러 자기 위무의 위장된 공격성을 반증한다.
물론, 본편이 오직 실내에만 거처하는 것은 아니다. 전통 연희극을 관람하거나, 입주할 건물에 방문할 때 인물은 외출하지만
그 곳조차도 동행한 남성을 기표로 하는 자기 환상이 옥죄어온다는 의미에서 진실한 '나들이'라고 할 수 없다. 무엇보다
나갈 수 있는 인물, 즉 예약받아 나가는 것조차 완전한 밖과 조우할 수 없는 여성들을 상정한다면 본편에 참된 밖은 없다.

초반부에 넓은 내부를 온전히 담으려고하는 노골적인 프레임들은 이같은 맥락 위에 장소성을 지시한다기보다는 내부 안의
인물에 대한 포옹하려는 정서에 가깝다. 문제는 이같은 촬영의 진정성을 관객이 어디까지 동의할 수 있는가인데, 전작에 이어
공동체라는 단어를 개입시키는 순간 그만큼 도리어 암연은 깊어진다. 본편에서 가장 이질적이지만 그래서 가장 따뜻한
숏은 골목길에서 당대 유행가를 부르며 끝내 장소의 내부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앞에 서서 연주하는 지점에서 발견된다.
전후 시퀀스와 별개로 해당 장면은 사라져야할 여성 성매매노동에 대한 배웅처럼 들린다. 그래서 그들은 집 밖에서 노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