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는 피부 (The Skin I Live In, 2011)

자막자료실

내가 사는 피부 (The Skin I Live In, 2011)

http://cineaste.co.kr/bbs/board.php?bo_table=psd_caption&wr_id=742370
스페인 영화 '내가 사는 피부'의 자막을 작업해봤습니다.
굉장히 독특한 작품입니다. 내용도 조금 충격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노출신이라든가 내용 때문에 미국에서는 R등급(17세이상 관람가)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어떻게 될 지 모르겠네요.

- 줄거리 -
교통사고로 인한 화상으로 아내가 죽은 후
저명한 성형외과 의사인 로버트 박사는 12년간 그만의 비밀실험실에서 완벽한 인공피부를 만드는 데 집착한다. 로버트 박사의
비밀스런 실험대상인 베라는 박사의 대저택 안에 감금되어 그녀를 보호해주는 바디슈트만을 입은 채 생활하고, 로버트 박사의 오른팔인
하녀 마릴리아가 그녀를 돌본다. 어느 날, 로버트가 집을 비운 사이 자신을 마릴리아의 아들이라고 밝히는 손님이 저택에 찾아오게
되면서 로버트와 베라를 둘러싼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며 걷잡을 수 없는 파란이 시작되는데..


 

Comments

1 소푸리
흥미가 생기는 소재네요.
비밀이 무엇일까요? 공포영화는 역시 직접봐야 겠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1 인아크
잘 볼게요
27 써니와조쉬
우리나라 개봉이 늦은 거였군요.
자막 감사합니다 ^^
17 야릇한여신
수고많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
1 차가운태양
고맙습니다
23 슬픈깡패
감사합니다~~
1 박천호
감사합니다...
1 피터할아범
고맙습니다. 수고 많이 하셨습니다.
1 Promiseand
크~ 정말 고맙습니다(_  _)
23 티거
감사합니다
10 파란하늘o
즐감할게여~~~~~~
1 오유인
감사합니다.
GIVE 50 MP 24 경구리
고맙습니다. 영화 잘 볼게요~
18 컷과송
2019. 7. 21. 모임 후기


피부가 곧 '기표'다. 본편이 이 문장 밖으로 외출 가능한지 의문스럽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기표 뿐,
어디에도(설사 요가 수행을 한다고해도) 기의는 부재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부재가 아니라 기표들이
변이하는 동안에 기의는 그 속에 달라붙고자하는 바를 수행하고 이를 피부와 의상으로 과시하려 한다.

본편의 패착은 오히려 바로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부유해야할 기표들을 거부하고 기어이 그것의
기의를 고착시키고 완결된 장소로 복귀해야한다는 일념은 이야기의 두꺼움(수란잔 님)에도
본편을 오히려 얄팍하게한다. 게이 정체성이 이성애로 위장(소년독본 님)되었거나 종결의 자리에
레즈비어니즘이 승리한다해도 이는 본편의 혈맥과도 같았던 경계(무비럽웅 님)와 변이의 황홀경을
다시 고정된 모더니티로 퇴행시킨다. 하지만, 이 뒷걸음질에는 일말의 출구가 중첩되어 있다.

영화에 대한 영화 장르로서 본편은 프레임을 외부에서 관리('목격'이 아닌)한 이들을 필히 응징한다.
내부의 관리자가 외부의 목격자를 폐기하는 것과도 같이 환타지는 관리자들을 살해하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과거 속에서  방치(검댕묻은망토 님)와 부인으로서 현실을 지정함으로서 감히
환타지로의 가학을 허가되지 않음으로 귀결된다. 그러므로, 그들의 죽음은 피학의 외면화라기보다
이미 목격이 아닌 관리로 인해 이미 내재된 운명론이라 하겠다. 물론, 이것이 변명이 될 수는 없다.
현실이라는 프레임을 방치한 이들이 환타지라는 프레임으로 보상받고자할 때 이의 실패는 필연이다.

다른 프레임이야말로 그 출구다. 그들은 진짜 피부를 가지고 결코 환타지-프레임을 욕망하지 않는다.
계급적으로도 그들은 완연히 프레임 밖에 존재하고, 몇번의 시간 간극에서 달라진 외형과 주름,
노화를 드러낸다. 그들은 욕망-피부-기표로서의 의상을 판매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와 반대되는
뚱뚱하고 무거운 보이지 않는 옷과 흥정한다. 바로 그 순간은 시점숏과 비시점숏의 간극으로서의
피부로서의 영화(더듬더듬 님)가 아니라, 외부로서의 영화가 개입하고 보존해야만하는  출구다.

스크린으로서의 프레임 혹은 관리/욕망되는 프레임이 아니라, 오직 정물로서의 프레임이 정중앙에
위치할 때 그것은 어머니의 프레임이 된다. 그녀는 아들의 실종신고를 위해 경찰에 찾아갈 때를
제외하면 거의 프레임 내부 시설에서 외출하지 않고, 결코 방치의 좌표로도 완전히 옮겨가지 않는다.
그녀로부터 비롯되었을 실종 기사는 유일하게 기의가 장착된 기표로서 기표를 기의로 복귀시킨다.
말하자면, 여기는 이전의 기표의 공간이 아니라 정체된 기의의 공간/어머니의 장소가 된다.
어머니-레즈비언-여성 의류의 공간에서 애당초 남성은 허락되지 않고, 그는 변이되어야만한다.
( 손님조차도 그들이 가출한 여성의 의류를 소지해야 방문가능하지만, 매매는 확정되지 않는다.)

이 장소는 분명히 감독의 오래된 관리 구역이다. 마치 게이 정체성과도 같이 이 공간은 신성불가침,
일률화된 기의의 장소다. 바로 그 순간 피부로서의 기표는 흐름을 멈추고 최종적인 기의의 장소에서
자신을 새로운 피부(의상)으로 인증받으려한다. 하지만, 영화는 바로 그 순간에 머뭇거리고 중지된다.
모성의 기의는 가해/피해의 환타지의 귀환을 기꺼이 프레임 밖으로 뛰쳐나와 맞이하지만, 그에게
더 이상의 기의(뜻/시간)을 청취함 거부한다. 의상에도 불구하고 내피는 완전히 수용될 수 없다.
이 중단이 윤리적으로 적정할 수는 있지만, 고정된 기의가 변이로서의 기표를 환대할 정도는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