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의 황혼 (東京暮色, Tokyo Twilight, 1957)

자막자료실

동경의 황혼 (東京暮色, Tokyo Twilight, 1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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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의 황혼 (東京暮色, Tokyo Twilight, 1957)


오즈 야스지로


NH택이님이 올려주신 자막으로 릴에 맞게 조정만 햇습니다.


원제작자아 택이님에게 감사하다는 말씀 올립니다.




"위 출처는 커뮤니티 '씨네스트'입니다. https://cineaste.co.kr 이곳에 오시면 다양한 피드백과 관련 자료가 있습니다. 아울러 스크립트를 이용한 불펌을 금합니다.

그리고 타 사이트 업로더 여러분께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저작권 문제로 삭제되더라도 가급적이면 퍼가시는 것보다는 링크로 연결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Comments

4 발타자르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37 Rookie
감사합니다
29 불량아이
감사합니다
27 십이야월
감사합니다
15 쭈우니
감사합니다
S dreammaker
고맙습니다.
23 십리바우
감사합니다
1 소마5151
감사드립니다.
10 넘조아
고맙습니다
4 CINEASTE사랑해
S 컷과송
2022. 12. 8. 재감상


단 평 : 늦겨울


겨울이고 눈이 '온다'. 여기서 온다는 우리말 표현은 내린다와는 다른 어감을 전달한다. 특히, 본편에

한정해서 온다라는 단어를 선택한 이유를 확장하자면 전작과 더불어 돌아온다의 축약이라할 수 있다.

언급하지 않았지만, 전작 <이른 봄>에서 2층에서 보는 시선과 더불어 오즈의 30년대로부터 복귀한

또다른 축은 어지럽히는 것과 때리는 것이 있다. 본편에서 2층은 시선의 장소라기보다는 과거와의

대면으로서의 공간으로 배정된다. 자매의 친모가 운영하는 마작방은 언제나 계단을 통해 연결된다.


이와 더불어 인물이 죽음에 이를 때 거리에는 마치 서부극처럼 굴러다니는 물체들이 보이는데,

이는 잠시 대화를 나누는 방의 화투패의 어지럽힘을 황급히 감추는 손짓과 조응된다. 이보다 더

진하게 재귀한 것은 뺨을 수회 때리는 행위인데, 이는 의외로 성찰을 배출시킨다. 이같은 맥락에서

눈은 돌아'왔다'라고 해야한다면, 이는 곧 오즈의 세계 내 겨울이라는 계절적 위치에 대한 평문을

소환시킨다. 이로 인해 본편의 조명이 대개 어두우며, 유일하게 아기가 실내를 걸을 때와 엔딩에

이르러 보수적인 관성으로의 출근에 배정된 밝은 햇살에 주목함은 피할 수 없다. 겨울은 어둑하다.


더불어 본편에서 가장 기이한 숏은 고모가 인물들의 집으로 들어설 때 그녀의 얼굴이 문의 투명한

내부 사각에 굳이 배정되는 것에 있다. 관객은 이미 인물의 아버지가 귀가할 때 동일한 프레임 숏을

주시한 바 있는데, 왜 고모가 여기에 가담되어야하는지 모호해진다. 자매가 귀가할 때 그녀들은

결코 사각에 얼굴이 제한되지 않음을 상기하면 이같은 의문은 더욱 괴이해진다. 그러나, 이같은

프레임 내 프레임이라는 장치의 끝에 결말부 기차 내부에서 직사각형의 유리창을 닦아내는

친모의 행위를 연결한다면 이중액자 프레임에 일종의 세대론적 책임을 부가시킬 수도 있겠다.


전작 <이른 봄>에 이어진 본편의 또다른 특이점은 사운드의 요망한 개입일 것이다. 극중에서

경찰서 내 취조 장면에서 등장하는 노년 남성이 여성음색을 낼 때 그의 여성 속옷 절도와 더불어

상징적 전복을 드러내는 시퀀스 등도 있지만, 이와는 별개로 그것이 극 내외 어디에서 정확히

유래하는지를 굳이 구분하지 않는 상태에서 별도의 감정적 응축을 위해 배음되기보다는 오히려

극 내부 서사를 방해하기 위한 소음으로 단편적인 반영화의 좌표에 가깝다. 그러므로, 관객은

엔딩의 기차가 출발하지 않았거나, 맏딸이 남편 집으로 귀가하는 장면이 제시되지 않았음을

간단히 에필로그의 아버지의 출근으로 망각해서는 안된다. 시간은 제자리 회전일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