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는 오직 거울에만 봉사한다. 건조한 용의자 체포 과정에서 카메라의 제 몫은 인물이
자신의 방에 난입한 경찰을 거울을 통해 응시하여 확인할 때만 유의미하다.
혹은 누군가는 여기에 경찰을 향해 외부에서 던져진 물체로 인해 파손된 유리창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비춰지거나 투명한 용도의 그것은 현실에 대한 어떤 은유적인 저항을 폐기시키고야만다.
이에 반해 본편을 휘감는 회화의 공격성은 내내 거울/유리의 얄팍함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설사 찢겨나가더라도 회화는 거기 그대로 히치콕적인 여성을 끝내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이것이 남성/거울 - 여성/회화의 차이인지는 확정될 수 없지만, 오히려 이를 남성의 가난한
강박으로 폄하하는 것은 가능하다. 말하자면, 남성/거울은 고정되고 그 밖이 사실상 없다.
실제로 협박범은 유리창을 부수고 도망치지만, 유리지붕이 파손되어 추락(사)하지 않던가.
물론, 관객은 어느 편이나 지지할 수 있지만, 과연 어느 쪽이 더 실존적인가라는 시선에서
남성-거울이 대영박물관이라는 시간의 미로 사이에서 범인으로 히치콕적으로 오인됨과
여성-회화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우고 종국까지 진실을 은폐하는 불안에 놓일 때
관객은 살인 사건의 현장이 커텐 너머로 보여지지 않는 것을 윤리라고만 단정하면 안된다.
더더욱 이 모두를 여성 육체의 욕망이나 서툰 예술에의 도전에 대한 징벌로 고착할 수 없다.
차라리 예술이 도피나 체포의 자리가 아닌 욕망의 자리에 지정됨으로 위로함이 마땅하다.
단평 : 예술은 진실을 직언한 적이 없다.
프롤로그는 오직 거울에만 봉사한다. 건조한 용의자 체포 과정에서 카메라의 제 몫은 인물이
자신의 방에 난입한 경찰을 거울을 통해 응시하여 확인할 때만 유의미하다.
혹은 누군가는 여기에 경찰을 향해 외부에서 던져진 물체로 인해 파손된 유리창을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비춰지거나 투명한 용도의 그것은 현실에 대한 어떤 은유적인 저항을 폐기시키고야만다.
이에 반해 본편을 휘감는 회화의 공격성은 내내 거울/유리의 얄팍함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설사 찢겨나가더라도 회화는 거기 그대로 히치콕적인 여성을 끝내 불안으로 몰아넣는다.
이것이 남성/거울 - 여성/회화의 차이인지는 확정될 수 없지만, 오히려 이를 남성의 가난한
강박으로 폄하하는 것은 가능하다. 말하자면, 남성/거울은 고정되고 그 밖이 사실상 없다.
실제로 협박범은 유리창을 부수고 도망치지만, 유리지붕이 파손되어 추락(사)하지 않던가.
물론, 관객은 어느 편이나 지지할 수 있지만, 과연 어느 쪽이 더 실존적인가라는 시선에서
남성-거울이 대영박물관이라는 시간의 미로 사이에서 범인으로 히치콕적으로 오인됨과
여성-회화가 자신의 이름을 스스로 지우고 종국까지 진실을 은폐하는 불안에 놓일 때
관객은 살인 사건의 현장이 커텐 너머로 보여지지 않는 것을 윤리라고만 단정하면 안된다.
더더욱 이 모두를 여성 육체의 욕망이나 서툰 예술에의 도전에 대한 징벌로 고착할 수 없다.
차라리 예술이 도피나 체포의 자리가 아닌 욕망의 자리에 지정됨으로 위로함이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