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6점] 하이-라이즈(High-Rise, 2015)

영화감상평

[리뷰: 6점] 하이-라이즈(High-Rise, 2015)

28 godELSA 1 2431 4

사회의 정신병리를 표면화하는 카오스의 현장

평점 ★★★


일단 대중적인 재미를 선호하는 관객이라면 이 영화는 피해가길 추천한다. 왜냐하면 흥미 위주로 관객을 몰입시키려는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불친절한 자세를 취함으로서 관객의 몰입을 일체도 허용하지 않는다. 이른바 강력한 소격 효과. 벤 웨틀리 감독이 자기 할 말만 하고 끝내고 마는 괘씸한 영화다. 아마 호불호가 갈리고 있는 곳은 (분명히) 그 지점이다. 하지만 감독으로서의 뚝심이 가장 잘 보이는 영화랄까. 관습을 깨는 형식들은 아름다운 지점에서 묘하게 엮이기도 한다.


소재와 설정 자체는 상당히 흥미롭고 신선하다. J. G. 발라드의 원작 SF 소설이 1975년에 출간된 것을 감안한다고 하면 고전 소설이라고 불릴 지는 몰라도 '구식이다'라는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물론 영화라는 예술로 옮겨지면서 시각적으로 표현되는 데에 있어 현대적인 모습으로 구현한 벤 웨틀리 감독의 공도 있겠다. 하지만 소설 자체의 '공상'은 현재에서 보면 지극히 현실적인 은유를 수반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배경이 되는 곳은 하이 테크놀로지를 기반으로 번영한 미래에서 세워진 최첨단 건물이다. 온갖 편의시설이 들어서 있고 각종 생활에 필요한 필수품들도 내부에 구비되어 있고 시스템들도 잘 구성되어 있다. 영화는 그곳에 정신병리학 박사 '랭'(톰 히들스턴)이 입주하게 되면서부터 시작된다. (영화 내의 표현을 빌리면) '하이 라이프'를 꿈꾸며 25층에 입주한 그는 우연히 윗층의 샬롯(시에나 밀러)를 만나게 되고 친목 파티에 초대를 받게 된다. 여기까지만 보면 말 그대로 '하이-라이즈'는 유토피아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점차 '하이-라이즈'의 결함이 점차 드러나기 시작한다. 고층에 집중되어 있는 권력은 남용되기 시작한다. 그 권력은 하층으로 향하게 되는데 건물 자체가 하층에서는 하층민들이 살고 고층일수록 상류층이 거주하는 모습은 마치 사회 계층의 구조를 연상케한다.


그 계급을 나누는 기준은 무엇인가. 건물로 상징되는 그 사이에는 자본주의적 경제 원리가 작용한다. 상대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은 전기도 제대로 공급받지 못하며 돈을 납부하지 못하면 무언가를 제대로 요구할 권리도 묵인당한다. 반면에 고층에 사는 사람들은 그것을 신경쓰지 않는다. 건물에 문제가 있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해결하려 들지 않으며 되려 19세기의 부르주아의 코스튬을 입으며 사치스러운 파티를 한다. 이러한 계급 간의 대립은 이미 많은 영화에서 다루어진 바가 있는 건 사실이다.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에서 다루어져 왔듯이 신선하지는 않다. 하지만 이 지점은 이 영화가 또다른 독창성을 가지게 되는 대목이기도 하다.


중반부 1시간을 넘어들면서는 영화는 점차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한다. 계층 간의 충돌을 본격적으로 다룸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왜 충돌하게 되었고 격정적으로 변하게 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복선과 암시가 설치되어 있어 유추는 할 수 있게 하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없어보인다. 심지어 입주민들 모두가 집단 히스테리에 빠진 상태는 분노가 아니라 광기로 보인다. (상류층도 하층의 폭동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서로 간에 대한 무차별 폭력과 섹스, 강간으로 도배된 그러한 공간을 영화는 이해하려 들려고 하지도 않는 것 같다. 아니, 애초에 복잡다단한 사회 균열의 원인을 찾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25층이라는 숫자가 암시하듯) 사태의 중간자의 역할로 관찰자의 입장을 지닌 '랭'의 시선으로 사태를 바라보자면 그 현장은 사회가 수반하는 정신적 질환의 모습으로 해석된다. 지적인 이성보다 원시적인 본능이 더 중요시되게 만드는 사회 계층 구조의 '디스토피아'적인 묘사는 생생하고 섬뜩하게 다가오기도 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설정들이 마치 1970년대 영국의 사회적 모습과 어느 정도 겹친다는 점이다. (원작자 J. G. 발라드는 영국인이다.) 부자들이 동경하는 19세기(명확하게 말할 순 없지만 정신병리학적 메타포로 본다면 그렇게 해석된다.)때는 영국이 사상 최고의 강대국이라고 불려질 때다. 하지만 2차 대전을 겪은 이후 영국의 국세는 지속적으로 침체되기 시작했다. 고복지 고부담 정책으로 인해 중산층이 쇠퇴하기 시작하였고 1970년대에 들어서서는 경제에도 악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러한 배경들이 작품에서 메타포로 나타난다. 소설의 기본적 틀만으로 사회적 배경이 완벽하게 묘사되었다고는 할 수는 없지만 <하이-라이즈>는 당대 영국의 비관적인 전망을 드러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 끝에 도달하고 나서도 영화의 내용은 쉽사리 정리되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나서 스토리를 정리할려고 하면 되려 시퀀스의 순서가 헷갈리기도 한다. 말 그대로 카오스의 현장을 바라봄으로서 관객의 두뇌 속에는 또다른 카오스가 생긴다. 스토리를 진행되는 지점이 되는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만 보기에는) 시대가 언제이고, 배경이 언제인지 알 수가 없고, (분명한 것은 어떠한 시간과 장소에 '하이-라이즈'라는 최첨단 건물이 있다는 것 밖에 없다.) 아주 기초적인 정보를 제외하고는 이 영화는 어떠한 설명도 해주지 않으며 모든 것이 모호하게 만든다. '내러티브와 쇼트가 서로 연결되는 지점을 찾기도 어렵고 연속적으로 '점프'하는 것으로 보여지는데, 이것은 연출의 실수로 보이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일종의 시적인 리듬감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다분히 의도적으로 정보를 부재시키는 것으로 보인다.


모든 것이 파편화되어 있고 산만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어쩌면 이 지점에서 점수를 얻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병리학적 메타포로 해석될 여지가 많은 가운데에서 혼란이 가중된 사회의 모습 그 자체를 정서적으로 구현한 트릭으로 읽을 수도 있다. 즉 혼란을 연출한 대목이라면 이 영화는 성공이라고 할 수도 있다. 불친절함의 매력이랄까. 체험의 현장으로 관객을 몰입시키고 끌어들이기보다는 체험의 에너지를 발산하는 기괴한 영화다. 물론 이미지가 파편화되어 산만함을 가중시키고 이유 없는 광기의 현장을 오랫동안 지켜보자니 지치기도 하는 따름이다. 이건 불친절함의 짜증으로 표현하는 것이 맞겠다. 호불호의 지점도 여기다. 장점과 단점이 골고루 공존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벤 웨틀리 감독이 원작 소설 어디에서 매력을 느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카메라가 머무는 지점은 추측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한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카메라는 '하이-라이즈'에 자의적으로 포박당한 듯 건물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바깥 세상은 완전히 등한시되는, 어쩌면 존재하지 않는 세상처럼 보일 정도다. 폐쇄되고 고립되어 있으며 모든 카오스가 내재되어 있는 그 명확하고도 모호한 지점을 카메라는 끈질기게 머문다. 바로 이러한 공간감이 큰 주축이다. 실제로 그러한 건물 특유의 공간감을 구축하기 위하여 세트를 다양한 컨셉으로 지었다고 한다. 어떻게 보면 <하이-라이즈>는 공간 없이는 존재할 수가 없는 일종의 '공간의 영화'이며, 공간 그 자체로 주인공이고 메타포를 지니는 시적 매력도 겸비한 영화다. '공간-사회'를 연동하는 그 메타포와 미장센이 인상적인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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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27 블루와인  
그야말로 벤 웨틀리 답다고 해야할만한 영화인가보네요? 볼까말까를 한참 망설이던 중이었는데,
요즘 세상이 시끄러워서인지 영화만이라도 따뜻하고 이쁜걸로만 자꾸 보게 되네요.
이런 영화를 봐야 세상을 보는 눈도 넓어지는 법이라고 옆에서 잔소리하던 사람이 그리워지는^^

마음에 여유가 생기면 (그땐 놀고 싶겠죠? ㅎㅎ) 챙겨봐야겠네요... 과감히 하드에서 지울까... 고민 조금 더 해볼렵니다^^

항상 영화에 대한 감상 고맙습니다. 좋은 가이드가 된다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