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스포: 3점] 잡아야 산다(2015)

영화감상평

[리뷰-스포: 3점] 잡아야 산다(2015)

28 godELSA 0 1868 1

이 글은 떨어지는 작품이라도 끼워맞추면 해석은 나올 수 있다는 걸 실험해 본 글입니다.



녹슨 칼로 꿩도 닭도 못 잡는 법. 그래서 이 영화는 죽었다.

평점 ★☆

 

<잡아야 산다>. “2016년 첫 새해코미디”라는 카피를 포스터에 떡하니 내세우고 개봉한 작품이다.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몇몇 작품 포스터에 따라붙는, 식상하지 그지 없는 카피다.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명시 없이 장르명을 대놓고 드러낸다는 것은 아마 관객이 영화 제작진들의 의도를 무의식적으로 따라가게 만들기 위한 상술적일 수 있는 트릭일 것이다. “이 영화는 코미디이니 마구 웃어달라”는 상징적인 표시인 것이다. 그것을 본 대부분의 관객은 그러한 의도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포스터를 본 순간부터 그 영화에 대한 기대감을 자극당하게 된다. 그런데 영화가 기대감을 어필하는 것까지는 좋지만 만약 영화가 그 영화에 대한 관객의 기대감을 채워주진 못한다면 이미지가 나빠질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되면 <잡아야 산다>에서 사용된 저 ‘식상한’ 카피마저도 사치로 다가온다. 취향과 개성의 차이는 있겠지만 영화의 ‘코미디’가 기대했던 ‘코미디’가 아니었으면 상당히 어색하다. 아마 <잡아야 산다>가 그렇지 않았을까. 여러 포털 사이트에서 올라오는 <잡아야 산다>에 쏟아지는 혹평이 아마 그것을 대변하지 않을까 싶다.

 

일단 그 얘기를 떠나고 영화에 대해서 얘기를 해보자면, 영화는 몇몇 철부지 고등학생에게 각자 총과 핸드폰을 뺏긴 중년 남성 두 명이 그것을 되찾기 위해 추적한다는 이야기다. 대한민국 형사물에 있어서 흥미로운 각본과 기획이다. 물론 악당을 추적하는 데 있어 인물에 대한 현실적 한계를 가미하며 추적자의 역할과 기능을 최소화시킨다. 도정택 형사는 ‘김승주’의 핸드폰을 위치추적하다가 말 그대로 ‘작살’나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 그 예다. 과학적인 수사 없이 오로지 직감으로 추적하는데 어찌보면 고전 형사물의 회귀로 볼 수 있다. 여기서 ‘어떻게 쫓는가’보다 ‘왜 쫓는가’에 대한 이야기의 공간이 발생한다. 경찰이라고 하기에는 상당히 어리버리한 ‘도정택 형사’는 그 쫓는다는 행위에 대한 사연이 분명하다. 만약 뺏긴 총을 회수하지 못하면 형사 직급에서 파면될 위기에 처하는 난감한 상황이다. 그런데 경비회사의 사장 ‘김승주’ 캐릭터는 그러한 사연이 부족하다. ‘핸드폰’ 하나를 찾는 사연이 철저히 가려져 있다. 체면을 중요시해서 직원들을 풀지도 못하는 처지에 빠져 사장의 이미지를 되찾기 위함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근거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따라서 관객은 ‘왜?’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어찌보면 ‘겨우’ 핸드폰 하나를 되찾기 위해 힘들게 싸움을 하고 밤새 뛰어다니는 것이다. 그러한 육체적인 고통의 희생을 납득시킬만한 사연이 불분명하다. 후반부에 가서는 죽은 딸에 대한 사연을 밝히며 관객을 설득시키지만 그 전까지는 ‘왜?’라는 질문에 머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추적극에 있어 이야기의 몰입을 방해한다.

 

캐릭터의 세밀하지 못한 구현도 미뤄두고 이 영화가 장르의 본질적인 쾌감을 주느냐를 생각해보자. 이 영화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코미디’다. 김정태와 김승우 이 두 배우의 호들갑떠는 연기로 유머를 만들고 연출은 추적극의 해프닝을 멀리 떨어져 관찰하며 상황의 아이러니를 만든다. 이것은 블랙코미디다. 그리고 추적극의 긴장감을 같이 만들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연출의 차이에서 오는 괴리감이다. 찰리 채플린은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라고 했다. 이것은 블랙코미디를 제작하는 데 있어 연출의 지침을 제시한다. 카메라는 인물을 가까이 두지 않음으로서 상황을 관찰하며 생기는 아이러니포착하는 것이다. 물론 의도적인 연출도 자연스럽게 녹아들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잡아야 산다>는 카메라(관객)과 인물들을 가까이 둔다. 이것은 추적극의 장면에서 주로 드러난다. 밤길을 질주하는 고등학생들과 주인공들을 화면에 잡는 카메라는 상황에 빠진 인물 사이의 갈등을 그려내는데 핸드 헬드 기법이 사용되는 등 그 장면이 화려하다. 게다가 의도적으로 연출된 유머도 찾기 어렵다. 한 마디로, 안 웃긴다. 이쯤에서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 정리가 된다. <잡아야 산다>는 ‘스릴러’와 ‘코미디’의 부조화가 크다. 카메라는 피사체와의 거리감에 있어 획일적이지 않으며 ‘블랙코미디’ 연출에 있어 그것은 치명적이다. 주인공의 드라마를 구현하는데 인물과 상당히 가까운 카메라는 희극처럼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게다가 유머를 만들어내기 위한 연출의 호흡도 부자연스럽고 만들어진 유머도 구식이다. 배우는 웃기려고 하는데 감독이 안 웃긴 셈이랄까.

 

최근에 고등학생들의 폭행 사건이 몇몇 있었다. 빗자루로 교사를 폭행한 사건도 그렇다. 그러한 사건들의 부류가 아마 <잡아야 산다>의 모티브일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가 무의식적으로 ‘어른들의 청소년 선도의 역할’를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에서 고등학생들은 범죄자와 비슷하게 그려진다. 엄밀히 말하자면 조폭 같다. 야구부로 위장한 고등학생 폭력 써클이 있는 반면 소규모 집단은 지나가는 아저씨(여기서는 김승주 캐릭터)에게 반말하고 시비를 걸기도 한다. 어쩌면 사춘기의 과장된 형태로서 어른 세대와 현 사회에 대한 방항심이 가득 묻어난다. 다른 말로 하면 약육강식의 형태로 굴러가는 그들만의 사회다. 여기서 "왜 그들이 어른 세대에 반항하는가?"라는 질문이 생긴다. 영화는 김승주 캐릭터의 “아무 이유 없이 어른에게 반항하는 거 별로 멋있지 않아”라는 대사에서 의견을 드러낸다. 영화는 청소년 세대를 단지 어리광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이 대사에는 영화는 또다른 것을 암시한다. 고등학생들이 어리광으로 약육강식으로 패를 이루고 다니고 협박을 하지만 그런데 두 중년이 그 고등학생들을 모두 쓰러뜨린다. 그런데 그 중년들은 거의 무적이다시피하다. 이것은 현 어른 세대에 반항하지 말라는 청소년 세대에 대한 상징적 협박으로 보일 정도다. 정리하면 “어리광에 빠져사는 청소년들을 선도할 수 있는 건 어른이다”라는 메시지가 도출된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도 그 방식이 정당한지는 의문이다. 두 중년들(어른)은 고등학생(청소년)을 잡기 위해 법 위반마저 개의치 않는다. 도정택 형사가 위치추적을 못하는 것은 개인적 이유일뿐 주인공들은 교무실에 몰래 들어가 생활기록부 정보를 빼오거나 구급차를 훔치기도 한다. 그런데 영화는 그것을 정당화하는 듯이 두 중년에게는 아무런 책임이 떨어지지 않는다. 학교에서는 경비업체가 따라붙긴 하지만 일시적이며 경찰이 따라붙지도 않는다. 그러한 아무런 제제도 없는 상황에서 두 중년은 거의 무대뽀다. 이것은 "어른들의 선도 방식에 있어서 폭력을 정당화하기 위함인가?"라는 질문까지 귀결된다. 영화에서 두 중년들은 물건들을 돌려받으며 고등학생들과 화해하며 훈훈한 메시지를 표방하지만 그것은 무책임한 추적 방법의 결과일 뿐 과정은 아니다. 과연 “어른들이 청소년들을 폭력으로 선도해야 한다”는 이 영화의 상징적인 메시지가 사회적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그건 논란이 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하지만 클라이막스 부분에서는 기밀정보를 빼가려는 음모론를 삽입하며 악에 대한 처단을 내세운다. 여기서 음모의 주체가 어른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그 전에 고등학생들에 대한 태도가 다르다. 같은 범법자임에도 불구하고 성년이 되냐 되지 않냐에 따라 주인공들의 태도가 다른 것은 '어른에 대한 책임감'을 부각하고 드러내는 의도적인 장치다. 그런데 여전히 미란다 원칙을 말하지 않고 폭력으로 해결한다는 것은 역시나 논란일 것이다. 어쩌면 애초에 이런 고찰 없이 초경량으로 만든 작품일지도.


개인적 후기) 이 감독에게서 뭘 기대했을까요...

이 글은 쓰레기 작품이라도 끼어맞추면 해석은 나올 수 있다는 걸 실험해 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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