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는나의것 감상평

영화감상평

복수는나의것 감상평

1 성게맛 0 2920 1

 

박찬욱 감독은 ‘올드 보이’로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감독이다. 칸 영화제 심사 위원 대상까지 받은 이 작품이 한국 영화계에 길이 남을 위대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 이다.  그 후에 나온 ‘친절한 금자씨’ 라던가 ‘박쥐’같은 작품 역시 완벽한 영화라는 평을 듣는다. 최근에는 헐리우드에 ‘스토커’라는 작품을 통해 기록할만한 성과를 내었다. 그리고 그의 출세작 ‘공동 경비 구역 jsa’라는 영화 역시 많은 대중들과 평단에게 큰 호응을 받았다. 그에 비해 2002년애 그가 감독한 ‘복수는 나의 것’이라는 작품은 그 작품의 가치에 비해 사람들에게 잘 안 알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이 영화를 병적으로 싫어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주연 배우가 송강호, 신하균, 배두나 라는 지금 생각해보면 엄청난 캐스팅임에도 불구하고 흥행에 실패하고 이 영화가 이런 취급을 받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먼저, 불편하다라는 점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불편함의 내용으로만 본다면 ‘올드 보이’가 ‘복수는 나의 것’보다 한 수 위라는 점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복수는 나의 것’이 ‘올드 보이’ 보다 불편한 이유는 우리 생활에 좀더 가깝게 접근해 있다는 점이다. ‘올드 보이’에 나오는 불편함 들, 그러니까 ‘근친 상간’, ‘원조 교제’, ‘감금’등의 내용은 사실 우리 삶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올드 보이’ 영화 내에서 조차도 이러한 내용들을 묘사할 때에는 꽤나 판타지적으로 묘사한다. 반면 ‘복수는 나의 것’에 나오는 불편 함들, ‘장기 밀매’, ‘구조조정으로 인한 퇴직’, ‘계약직’, ‘사회주의 단체’같은 것들은 우리일상에 깊이 들어와 있다고 얘기할 수 있으며 매체나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장기밀매만 해도 그렇다. 고속도로 휴게소 에서 볼일을 보고 마음 편히 뒷정리를 하고 있을 때에 화장실 문짝에 붙어 있는 장기밀매 관련 스티커를 보면 괜시리 등골이 오싹해 진다. 그것을 때어내어 보려는 시도 역시 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우리도 일상 속에서 '장기밀매'나 '구조 조정'같은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는 있지만 깊이 생각해보지는 않는다. 그러다 스티커 같은 것들을 보게 되면 괜히 등골이 오싹해 지고 잠깐이나마 그러한 문제들에 대해 생각 한다 '복수는 나의 것'은 그런 스티커 같은 영화이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편함을 잘 표현해 우리로 하여금 등골이 오싹해지고 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것이다. 마치 벽에 붙은 스티커를 껌 칼로 떼어내는 것처럼 사람들은 이 영화를 단순한 쓰레기 슬래셔 영화로 명명해 버리고는 불편함을 거세해 버린다. 두 번째 이유로는 그 표현의 수위를 말하고 싶다. 매우 잔인하고 엽기적인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한다. 하지만 폭력의 수위를 말한다면 '올드 보이'의 장도리 신이나 이빨 신 혹은 클라이맥스 부분을 이길 수 있을까? 또 선전 성이나 엽기적인 측면에서 바라 본다면 '친절한 금자씨'의 여 죄수들의 커널링구스 장면, 혹은 ‘박쥐’의 정사 신들을 뛰어 넘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이 작품이 박찬욱의 다른 작품들 보다 더욱 잔인 하다고 생각 되는 이유는 이 영화의 제목에 있다. 내가 지금 말하자고 하는 것은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에 대한 존경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복수는 나의 것’이란 제목이 아니라 영제인 ‘Sympathy For Mr. vengeance’이다. 국어로 번역하자면 ‘복수하는 사람에게 동정을..’정도가 될 터인데 이 동정이란 뜻을 가진 sympathy의 동의어 혹은 유사어인 compassion란 단어에 대해 밀란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흥미롭게 서술하고 있다. “라틴어에서 파생된 모든 언어에서 동정(compassion)이라는 단어는 접두사 com과 원래 고통을 의미하는 어간 passio로 구성된다. (중략)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타인의 불행을 함께 겪을 뿐 아니라 환희, 고통, 행복, 고민과 같은 다른 모든 감정도 함께 느낄 수 있다는 것을 말한다.” 아까 말했듯이 이 영화의 인물들은 정말 한없이 불쌍하다. 그래서 우리는 compassion을 느낀다. 그에 따라 우리 역시 등장인물들의 불행과 고통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간접 체험하게 되고 더욱 잔혹하게만 느껴진다.

이러한 이유 들로 인해 개봉 당시 이 영화는 흥행에 참패하고 말았으며 최근에야 dvd등의 판매로 손익 분기점을 넘겼다고 한다. 이 영화를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에서는 물론 한국 영화 중 가장 최고로 여기는 내 입장에서는 이러한 사실이 안타깝기만 하다.

청각 장애인인 류(신하균 分), 사회주의자인 영미(배두나 分), 중소기업의 사장인 동진(송강호 分)까지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3명 모두 정말 평범한 사람들 이였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 될수록 이들은 잔인해지며 파국을 향해 질주한다. 이 영화에서 누가 피해자고 가해자인지, 누가 선이고 누가 악인지는 불명확하다. 아니 이들을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로 나눈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다. 과연 누가 이런 파국을 불러 일으켰을까? 류에게 사기를 친 장기 밀매단? 정리 해고를 지시한 동진? 류에게 유괴를 제안한 영미? 불행히도 한 인물 또는 집단에게 이 모든 상황의 책임을 전가 하고 나몰라라할 수는 없다. 이 모든 일의 범인은 결국 IMF이후 짙게 드리워진 우리 사회의 신 자유주의의 그림자들이다.  그 증거를 박찬욱은 영화 전반에 걸쳐서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가장 잔인한 장면이라고 생각하는 정리해고 당한 사람의 할복 장면, 가족들의 동반자살 등 자본주의의 발달이 불러 일으킬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을 박찬욱은 영화 중간 중간에 넣었다. 장기 거래나 유괴 등도 신 자유주의와 빈부격차가 극에 달한 남미 일부 국가에서 거의 유일한 부의 이동 수단이라고 한다. 그리고 조금 뜬금 없다고 느껴질 수 있는 영화 종반부의 복수가 누구의 것이었는지 생각해보자. 바로 신 자유주의라는 자유 방임주의의 변종의 가장 반대편에 있다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 단체가 이 복수의 주인공 이였다.

이 영화가 나온지 벌써 12년이 흘렀지만 이 영화에서 우려하고 있는 부분들이 줄었긴 커녕 더욱 악화되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평범하게 살기에는 어려운 부분들이 더욱 많아져 버렸다. 언제쯤 사회가 사람들을 극단적인 상황에 내몰지 않고 그들을 보호해 줄까? 영화 산업이 시작된 이후로 이 ‘복수는 나의 것’과 같은 사회 고발영화가 끝 없이 나오는 것을 보아하니 영원히 이룰 수 없는 꿈처럼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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