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가운 열대어, 절망의 진앙지

영화감상평

차가운 열대어, 절망의 진앙지

2 인간의힘 0 4765 1
1. 그 남자, 소노 시온
 
소노 시온 이야기의 중심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사람이 다루고자 하는 것은 결국 공동체에 있는 것 같다. 공동체의 기본 단위가 가족이니까. 이 사람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 특히 일본의 공동체가 맞닥뜨린 문제에 대해 몹시나 심각한 위기 의식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이야기는 늘 괴이하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괴이함에 대하여 늘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며 너스레를 떤다. 너스레라기보다는 괴이하게만 날 보지마시라 나는 사실 정말로 심각하다구 항변하는 느낌이다.
 
나의 위기의식은 늘 현실을 향해 있다, 는 식이다.
 
차가운 열대어 역시 사실에 근거한 이야기라며 영화를 시작한다.
 
전작 러브 익스포져에서는 좀더 활기와 유머를 품고 있었다. 나는 전작에 몹시 감명을 받았다. 그리고 전작에 못지 않은 즐거움을 주리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그러나 이 영화는 심각하다. 러브 익스포져 이전의 심각함으로 돌아가버렸다. 심각할 정도로 진지하고 위기감이 느껴진다. 나의 기대감은 내팽개쳐졌다. 따지고 보면, 사랑이 최고야를 설파하던 전작이 오히려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의 특이점이 아니었을까.
 
늘 우울하던 소노 시온. 전작의 유쾌함은 터닝 포인트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하나의 변곡점일 뿐이었다.
 
그는 다시 우울해졌고 희망을 잃었고, 쓸쓸하고 슬퍼졌으며 회의가 만연해졌다. 회의와 우울이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소노 시온은 결국 그런 사람인 걸까.
 
2. 가족
 
이 영화의 중심엔 가족이 있다. 소노 시온의 가족. 겨우겨우 관계를 지탱하는 가족. 지탱하기에도 힘겨워 언젠가 흩어져버릴 아슬아슬함. 그들을 과연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걸까? 나약한 개개인. 에반게리온적인, 세기말의 감성. 모두가 따로 노는 가족. 그건 곧 공동체 전체의 문제.
 
러브 익스포져는 가족이 문제가 되긴 했었지만 포인트는 개인의 구원에 있었다. 우리가 어떻게 절망적인 가족사로부터 비롯되는 개인의 왜곡에도 불구하고 구원될 수 있는가를 사랑의 관점에서 풀었다면 그래서 그건 개인의 문제이니 나름 희망의 빛을 볼 수 있었다면, 공동체의 문제는 좀더 전체적인 비전을 필요로 한다. 이건 내가 아무리 나의 공동체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전체가 함께 움직이지 않으면 구원되기 힘든 문제다. 혼자만의 발악에 그칠 뿐이다.
 
차가운 열대어에서는 그 발악을 느껴볼 수 있다. 그러나 그 발악 자체도 처참하다.
 
사태가 지닌 무게감 때문인지 발악으로도 해결이 잘 되지 않는다.
 
3. 흔적
 
러브 익스포져를 잠시 떠올려보자. 그 영화는 기적을 향해 달려 가고 있었다. 기적까지 몇 초전 이런 식으로 흥미를 자아낸다. 그리고 그건 사실 진짜 기적이었다. 주인공이 마침내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랑을 만나는 순간을 향해 달려가는 영화였다.
 
재밌는 건 이 영화 열대어에서도 몇 초전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순간에 도달했을 때 이 창백한 가장의 심리는 변해버린다. 기적은 아니었지만 분명한 변화이기는 했다.
 
핵심적으로 말해, 이 영화는 도저히 어찌해 볼 수 없는 가정을 가진 가장이 어떻게 변화되는가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자신의 변화로 어떻게 자신의 가정을 구원하려고 하는가가 포인트다.
 
4. 심연
 
열대어의 가장은 무력하기 짝이 없다. 모든 것이 망신창이가 되어 가고 있는데도 뭘 어떻게 해볼 생각을 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그는 눈 앞에서 살인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무력하고, 자신이 걸린 덫에서 허우적거릴 따름이다.
 
그리고 영화가 도달하고자 하는 그 때에 도달했을 때 그는 도저히 과거의 그라 할 수 없을 만큼의 과감함을 보인다. 그는 뛰어넘기 힘들어 보였던 어떤 지점을 뛰어넘어버린다. 그는 그 어떤 심연을 넘어버렸다. 돌아올 수 없는 저 너머로. 그곳은 이상과 영혼이 실종된 세계. 폭력과 야만 만이 살아 숨쉬는 세계. 질서의 반대는 카오스이다.
 
이 영화는 종종 혼란스럽다. 도무지 제정신인가 싶을 정도의 상황을 계속 설정해버린다. 그러나 이건 다분히 의도적이었으며 그래야만 카오스의 심연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그는 카오스의 힘을 빌려 망가져버린 자신의 가정을 회복해보려 한다.
 
이 영화에는 악마적인 인간이 나온다. 그는 냉혹하지만 한 가지 미덕이 있다. 그는 말한다. 나는 내 앞 길은 내가 처리한다고. 그렇다. 그는 무수한 사람을 죽였지만 지금껏 문제없이 살아왔다. 그는 나약한 인간의 심리를 그대로 꿰뚫어보고 이용한다. 그런 점에서 그는 강한 인간이긴 하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카오스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우리는 강해질 수 있는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마침내 무력해보였던 안경잽이는 무지막지하게 폭력적으로 변해버린다. 그는 자신의 무력함을 위악으로 둔갑시켜 현실에의 개입을 열어보고자 한다. 그는 고함을 지르고 주먹을 휘두르며 자신의 가정을 조율해보고자 한다. 어떻게 보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생각했다. 이건, 마치, 러브 익스포져의 제로 교회다.
 
소노 시온은 생각한다. 내가 발 딛고 있는 이 현실에서 해결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저 너머로 넘어 가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세계에는 답이 있을까? 
 
5. 욕망
 
그러니까 다시 욕망으로 돌아온다. 이 안경잽이 가장은 후처를 들인다. 그는 섹스가 하고 싶다. 하지만 후처로 인해 자식과의 관계가 파탄나고 후처 또한 무력한 자신에 대해 염증이 나 있다.
 
다시 러브 익스포져가 오버랩 된다. 처가 죽은 후 후처를 들인 신부. 그리고 그로부터 시작되는 왜곡, 균열, 혼돈. 그렇다면 문제는 욕망에 있는가.
 
하지만 결국 아무리 생각해봐도 욕망은 죄가 없다. 다만, 그 욕망에 휘둘리지 않게끔 욕망의 담지자인 인간 자신도 강해져야 한다.
 
이 영화는 무력함과 나약함으로부터의 탈출인데, 그 방식이 심하게 잘못되어 버렸다. 그는 심연을 건너지 않고 해결해야 했다. 하지만 그 길은 너무 멀어버렸다.
 
그는 영원한 샌님도 되지 못했고, 심연을 건넌 후에 영원한 악마도 되지 못했다. 되돌아온 자리에는 역시 무력감과 허무, 공포와 절망 불라불라불라. 그는 자신의 목을 긋고 카오스의 종말을 보여준다. 아무 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딸은 그의 죽음을 두고 괴상하게 웃는다.
 
사실 이 영화에서 무력한 인간은 그 만이 아니었다. 그의 후처도 팔짱 낀 채 바라만 보고 있었고, 딸은 모두 네 탓이요 반항에 어리광만 피우기에 바빴다. 그런 가운데 그가 제 정신으로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카오스의 힘이라도 빌리지 않고 어떻게 자신의 현실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6. 마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현실에 기반한다. 구체적인 사건이 없어도 현실에 기반한다. 자신의 욕망을 컨트롤 하지 못할 만큼 강하지도 않으면서, 욕망만을 좇다 사건이 터지면 무심함과 무력감으로 가만히 앉아 바라보기만 하고 타인을 원망하기만 하다 급기야 절망의 힘을 빌려 폭력으로 상징되는 비타협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상황은 그리 드물지 않게 목격되고 있다. 그건 단순한 사회적인 사건에 국한되지 않고 일상의 내 안에서도 목격되고, 그 어딘가의 당신에게도 목격되는 현실이다.
 
그리고 이것이 개인을 흔들고 공동체를 흔들고 있다고, 유난히 세계에 촉각을 곤두 세우고 있는, 유난히 섬세한 위기 의식이라는 안테나에 포착된, 소노 시온이라는 감독이 관계망의 지진을 파고든 끝에 찾아낸 절망 전파의 진앙지이다.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 신고
 
0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