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가슴 벅찼던 시절 한 번은 있었다. - 써니

영화감상평

누구나 가슴 벅찼던 시절 한 번은 있었다. - 써니

1 락시네마 0 3638 1
 
 
 
누구나 심장 터지도록 벅찼던, 찬란했던 시절 한 두 번은 있었다.
단지 살다보니까, 그러니까 졸업부터 취업이며, 결혼자금에 전세 대란, 분유 값 벌다보니 학원비 걱정, 학원비 졸업하면 대폭 인상된 등록금 파도가 휘몰아치는, 요즘은 너무나 심하게 가혹해져서 마치 미드 ‘크리미널 마인드’의 사이코 패스들처럼 죽어라고 몰아 세우는 세상풍파에 정신줄 놓다 보니 잠시 잊고 있었을 뿐, 당신과 나를 비롯한 누구에게나 심장 터지도록 벅차고 찬란했던 시절 한 두 번은 반드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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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해 봐. 너의 그 시절.’
 

500원짜리 커피 한 잔으로 서너 시간 넘게 죽칠 수 있던 음악다방과 (부드러운 목 넘김 따윈 뒷집 개나 주라던) 1000cc 짜리 맥주 한 잔에 각자의 청춘별곡이 녹아 들끓던 생맥주집에서, 그리고 곰보빵 몇 개를 앞에 두고 제발 저 하얀 손이 빨간색 나이키 열쇠고리를 뽑아달라고 빌고 또 빌었던 프랑스 제과점 2층에서도 어김 없이 레드 제플린과 조용필, 핑크 플로이드와 다섯손가락의 노래를 LP 판으로 들을 수 있던 시절,
데모하다 전경으로 군대간 녀석이 친구들을 향해 곤봉을 휘두르고, 1루 보던 김성한이 구원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삼진을 잡아대며, 올림픽 끝나면 금새 미국처럼 선진국 되리라 철썩 같이 믿고 살았던 그 시절.
아무래도 나의 그 찬란했던 '시절'의 대부분은 80년대 어디쯤에서 정점을 찍고 있었나 보다.
이렇다보니 그 시절을 기억해보란 영화 <써니>의 속삭임이 다크 초콜릿처럼 달콤 쌉싸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누구라서, 나처럼 80년대 어느 시절에 인생 살아낼 대부분의 자양분을 얻은 사람으로서,
<써니>의 알싸한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을 것인가.
 
 
영화 <써니>는 이렇듯 실제 80년대를 살아 본 이들에겐 모처럼 찬란한 회귀의 짜릿함을, 그렇지 못한 이들에겐 엄마, 아빠, 삼촌의 청춘시절을 오롯하게 들여다 볼 수 있는 호기심의 재미를 선사한다. 그런데 그 즐거움과 재미가 만만찮다. 가공된 통속의 연결이 계속되지만, 시시하고 뻔한 지루함 보다는 울컥 사람을 건드리는 감정선의 날이 제대로 서 있고, 에피소드의 이어짐도 유려 하고 탄탄하다.
 
 
꽤 많은 캐릭터가 나오기 때문에 자칫 시선이 분산되어 극이 산만해 질 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등장인물의 과거와 현재를 박진감 있게 넘나드는 전개로 '쟤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쟤는 완전 내 친구랑 똑같네. 어쩜, 어쩜 좋아' 란 식의 깨알같은 재미와 감동을 펑펑 터뜨려가며 시종일관 관객의 시선부터 마음까지 다잡는데 성공했다. 더구나 적재적소 기막힌 타이밍에 흘러 나오는 주옥 같은 노래들 하며, 빼어난 캐스팅으로 배우들을 캐릭터에 꼭 맞춰 넣은 솜씨에, 전작의 흥행에 기대어 '이야기' 보다 유명한 '얼굴' 만 의지하는 맥빠진 영화로 안주하지 않는 뚝심까지, 재기발랄한 '영리 영특' 강형철 감독이다.
 
 
세계가 인정하는 작가주의 감독이 모국 영화계를 까대야 하는 뒤숭숭한 현실에서, 강형철 감독이 그려내는 대중들과의 커다란 교집합 써클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무엇이 진정한 예술이고, 통속이란 것의 실체는 정확히 어떤 것일까, 작가의 작품관과 대중과의 타협은 어디까지가 예술적인 것이고, 통속적인 것일까. 쉽게 답을 찾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필름 속에 진심을 담아 많은 대중들과 교감하며 웃기고 울릴 수 있는 능력은 그 어떤 대단한 '작가주의' 감독들의 능력보다도 더 대단하고 비범해 보인다.
영화가 끝나고 엔딩 스크롤이 올라갈 때 꽤 많은 여성관객들이 울고 있었다. 걸핏하면 마누라에게 '여자들이 무슨 우정이 있다고, 만날 질투에 시기나 하고 그렇지' 라고 했던 나도 코끝이 시큰하게 젖어 있었다. 남자들 우정이 진짜라고 박박 우기던 나는 친구들에게 몇 백만원씩 돈이나 떼이고, 몇 년 동안 소식 한 번 없는 현실이다. 그런데 마누라 친구들은 20년 가까이 변함 없는 만남을 이어오며, 좋은 일 있으면 자신들 일처럼 기뻐해주고, 슬픈 일이 생기면 서로서로 더 나누려고 애쓴다. 마누라 친구들의 우정이 그랬는지, 아니면 80년대 찬란했던 어느 날의 추억이 그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나도 한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애써 쏟아지는 눈물을 참고 있었다. 오랫 만에 머리와 가슴으로 끄덕일 수 있는, 기분 좋은 영화 <써니>였다.
 
 
P.S
톱 클래스 배우가 없어도 영화는 얼마든지 잘 만들 수 있고, 또 잘 될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출연료 비싼 톱 클래스 배우가 아니라도 연기 잘 하는 배우는 얼마든지 많으니까.
<불신지옥>에서 인상 깊었던 심은경(주인공 나미역)은 정말, 차세대 한국 여배우의 계보를 이을만한 보석으로 보인다.
'쟤가 지금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저 역할 속으로 주화입마 했구나' 란 느낌이 착착 달라붙는다.
다양한 경험을 쌓는다면, 어디에 내놔도 자랑할 수 있는 심도 깊은 배우로 성장할 수 있을 것.
또한 악역인 상미역의 천우희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개성 강한 연기자로 성장할 또 하나의 재목인 듯.
성인 역할의 주, 조연들 모두 안정된 연기력으로 아역들을 받치며 극을 잘 살려가는데,
특히 유호정은 여러 씬에서 '울컥' 하게 만든다.
 
'아, 역시 여배우는 나이 들수록 예뻐지는구나' 라고 느껴지기도...
 
 
 

 
 
임나미 역의 심은경


 
 
이상미 역의 천우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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