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죽기전에 꼭 해야할 것들...
#스키드 마크
우연히 체포된 킬러 안톤 쉬거는 수갑 찬 손으로
넋 놓은 채 전화 보고 하고 있던 경찰관의 목을 조른다.
느닷없는 공격에 본능적으로 발버둥 치며 애써 막아보려 하지만
삶에 대한 애착만큼의 구두 자국만을 남긴 채 어이없이 숨을 거둔다.
사고를 피하기 위해 급히 브레이크 밟을 때 노면 바닥에 생기는 스키드 마크.
필사적 몸부림으로 검게 그을린 그 흉측한 자국을 통해
왜, 어떻게 사고가 발생했는지 유추해 볼 수 있겠지만
백 번을 보고 천 번을 본다하더라도 늘 급작스런 ‘사고’라는 놈 앞에서
쉬이 피해 갈 수 있는 명쾌한 해결책을 내놓기란 너무나 힘든 일임을 우린 알고 있다.
텔 미의 부분 동작을 열심히 배우고도 실전에선 고장난 뻣뻣 로봇춤을 추고 있는
내 발랄한 춤 솜씨 마냥 이론을 넘어서는 지점에 다다라선
그 지식이란 것이 무용지물이 되기 쉽상이다.
주변 다른 이의 무수한 죽음을 보지만
장례식장에서 착잡함과 공허함으로 소주는 기울일 순 있어도
다 쓸려 내려간 인생의 모래시계를 기울일 수 없는 것처럼
이미 죽은 목숨을 불러올 수도 또한 허탈하게 남은 목숨을 늘릴 수도 없다.
코앞에 달려드는 트럭을 마주하고도 꼼짝없이 부딪히는 운명처럼
들이닥치는 죽음 앞에선 우리 누구도 사뿐히 건너 뛸 수 없게 된다.
누가 근심함으로 그 생명을 일초라도 늘일 수 있단 말인가?
다만 우리에겐 주어진 시간 내의 선택이 있을 뿐
그 시간 자체를 바꿀 순 없다.
삼대 째 보안관인 ‘에디 톰 벨(토미 리 존스)’은
사건 현장을 보면 범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그 경로를 단번에 알 수 있을 정도로
노련하고 유능한 보안관이다.
하지만 경험과 지식을 뛰어넘는 흉폭한 살인을 만날 때면
안개처럼 피어오르는 자신의 한계와 무력감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느낀다.
그 자신도 피해갈 수 없는 죽음 앞에선
사막과도 같은 쓸쓸함만 남을 뿐 어쩔 도리가 없다.
그 무력함에 삼촌을 찾아가지만 되돌아오는 옛이야기에 절망감만 더 커질 뿐...
돈 가방을 가진 채 도망하는 모스의 부인을 설득할 때
그 자신이 말하는 소에 관한 에피소드처럼
아무리 인생을 잘 안다하더라도
또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과 여건을 가졌다하더라도
그 너머를 타고 느닷없이 달려드는 죽음이란 놈은
그냥 두 손 들고 맞아들여야 하는 대책 없는 존재일 뿐이다.
난
창가의 스며드는 햇살에 눈 뜨게 되는 하루가
너무 당연하고도 지당한...
너무도 자연스러운,
주유 후의 사은품 휴지처럼
늘 따라오는 그런 것인 줄 알았다.
누가 의식조차도 못하는 “내일”을 오지 않으리라 걱정할까?
누가 매일 반복되는 “오늘”을 의심할 것인가?
하지만
젠장, 난 너무 건강했던 것이다.
운이 좋았던 것이다.
한 번의 숨을 쉬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이가 있음에도
그 수많은 귀한 숨을 인식하지 못한 채
개념 없이 상큼하게 살아버린 것이다.
전지가 달면 말끔하게 멈춰버리는 시계처럼
인생이라는 것이 언젠가 끝이 나고야마는 그 때가 있음을 앎에도
천방지축 세상모르고 뛰어 다니는 우리 아들 녀석들 같이
난 그렇게 철없이 살아왔다.
온통 멀쩡하고 건강한 사람들만 있는 나라에서 살던 나는
드라마에서나 나오던 암환자들이, 흩날리는 안타까운 삶들이
이리 지천에 깔렸는지 정말 알지 못했다.
“감사해야 했다.”
이 말 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펑펑 쓸 돈 위해 수많은 인생의 가치를 내다 팔며
삶을 펑펑 써 버린 난 정말 바보였다.
주사 맞는다면 4살 둘째 녀석처럼 호들갑 떨며 호떡 파는
겁 많은 아내가 그렇게도 용감했는지
수술실로 들어가는 침대위에서
소리 없는 파이팅으로 흔드는 그 손을 보고
눈물을 감추느라 정신없었던 내가 이리도 연약했는지
정말로 알지 못했던...난
그저 당연스럽게만 살아온 인생의 일상들이
감격스런 기적의 나날이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아무것도 몰랐던 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바보다.
밤2시까지 잦아들지 않는 두 아들의 장난기 넘치는 고함소리와
느려터진 내 행동꼬리에 불을 붙이는 아내의 자잘 잔소리가 이리도 소중한지
널찍한 빈자리를 보고서야,
확실하게 찍어 보고서야 어리석게 깨닫는다.
가야 할 시간 몇 개월을 남기고 나서야 쓰는 버킷리스트
어차피 언젠가는 가야 할 시한부 인생들인 이상
지금 당장이라도 고민하며 써야하지 않을까?
그리고 주어진 시간의 울타리 안에서
사랑하는 가족과의 눈부신 나날들로 그 목록을 채워가야 하는 것 아닌가?
“버킷 리스트”에서 잭 니컬슨과 모건 프리먼이 펼치는
돈으로 매우는 피상적인 MUST-HAVE가 아닌
무엇에도 구애받지 않는 본연의 MUST-HAVE를 꿈꿔야 하는 것 아닌가?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마지막 장면처럼 세상은 밝은 눈을 어지럽히고 있다.
순수하게 도와주려 셔츠를 벗었던 아이의 마음을
결국 욕심으로 바꾸는 킬러 안톤 쉬거 같이
억지로 쥐어준 돈 몇 푼으로
순결한 본래의 의도를 서로 자기의 것이라 싸우는 눈 먼 탐욕으로 변질시키는 그처럼
세상은 인간성을 밟는 물질지상주의를 들이대며
아내가 힘겹게 준 아름다운 깨달음을 더럽히려 한다.
삶 가운데 숨겨진 소중한 인생의 의미를 소재로 한 영화 “버킷 리스트”가
정작 돈으로 그것을 구현하려 하는 황당한 오류에 빠진 것처럼
물질만으로 삶의 의미를 찾으려는 허황된 착시현상에 빠지고 말 것인가?
몇 만 번을 다짐해도 힘없이 끌려가는 이 대책 없는 한심한 인생을 어찌할까?
나이 들면 더 명쾌해져야 할 인생이
무섭게 번식하는 욕심의 넝쿨만큼 어지럽게 흐트러져
이미 들고 있는 소중한 것들의 무게마저 힘들다 느끼게 한다.
그저 뛰어야 한다는 급한 마음만 요동친다.
난해한 세상, 정글 같은 세상은 결국 내 어지러운 마음에 있다.
쉽지 않은 세상은 내가 만든 것이다.
바른 길이 문제가 아니라 감긴 내 눈이 문제다.
이그~ 곰탱아!
삶이 명쾌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