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수퍼맨연대기-김정대칼럼니스트

영화감상평

[펌]수퍼맨연대기-김정대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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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수퍼맨의 연대기 수퍼맨의 모든 것 1
 
[필름 2.0 2006-07-03 23:00] 
 

 

무려 20년의 세월을 지나 <수퍼맨 리턴즈>가 개봉한다. 제리 시겔과 조 슈스터의 코믹스로부터 크리스토퍼 리브가 연기한 네 편의 <슈퍼맨>(1978-1987) 시리즈를 지나 <수퍼맨 리턴즈>에 이르기까지 수퍼맨은 현대사회를 지배해온 거대한 아이콘이었다. 수퍼맨 애호가인 영화 칼럼니스트 김정대가 수퍼맨에 관한 모든 것을 총망라하고, 영화평론가 최은영과 이정진이 공개된 <수퍼맨 리턴즈>를 해부한다.

경제대공황의 절정기였던 1933년, 미국은 ‘미래가 없는 나라’였다. 공장에는 재고품이 산더미처럼 쌓여갔고 실업자 수는 1,500만 명을 넘어섰으며, 뉴욕 등 대도시는 빈민들의 천국이 돼가고 있었다. 미국 역사상 최악의 암흑기였던 이때, 미국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허세 부리는 부자들의 쥐꼬리만한 성금도, 위선적인 정치인들의 헛된 공약도 아니었다. 그들은 절망의 나락에서 자신들을 구해줄 ‘메시아’를 과거 어느 때보다도 애타게 갈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어느 누구도, 클리블랜드의 고등학생 두 명이 바로 그 메시아를 만들어내고 있으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그들의 이름은 제리 시겔과 조 슈스터였다.
수퍼맨의 기원

시겔과 슈스터가 처음 만난 때는 그렌빌 고등학교 재학 시절인 1931년이었다. 동료 남학생들이 연애와 운동에 골몰하고 있을 때 이들은 교내 신문 ‘그렌빌 토치'에 온 에너지를 쏟아 붓고 있었다. 탁월한 그림솜씨를 자랑하던 슈스터는 이 신문을 위해 멋진 만화를 그렸으며, 뛰어난 글 솜씨의 소유자였던 시겔은 슈스터의 그림에 기막힌 대사를 삽입해 생명을 불어넣었다. 이들의 작품은 교내에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자신들의 실력을 주위 사람들이 인정해주자, 이들은 좀 더 높은 목표를 설정했다. 바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전문 잡지에 게재해 돈을 벌겠다는 것. 이 시기, 두 사람은 펄프 잡지의 인기 연재물이었던 <닥 사비지>에 심취해 있었다. 레스터 덴트가 쓴 이 단편소설의 주인공은 슈퍼 파워를 지녔으며 때때로 작가 자신이 ‘수퍼맨’이라 부르기도 했다. 이 작품은 바로 당시 시겔이 구상하던 슈퍼 영웅 이야기에 큰 영향을 줬다. 시겔과 슈스터가 슈퍼 영웅 이야기에 심취하게 된 이유는 그들의 성장배경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서민 자식들의 전형이었다. 게다가 운동에는 전혀 소질이 없었으며 남성의 판타지라 할 수 있는 육체적 매력과는 거리가 멀기도 했다. 이런 그들이 무한한 힘을 지닌 영웅을 동경하게 된 건 지극히 당연하다.


1933년 시겔은 <수퍼맨의 권세>라는 이야기를 썼다. 이것이 바로 수퍼맨 이야기의 첫 번째 버전이다. 흥미로운 점은 시겔이 이때부터 이미 '수퍼맨'이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 하고많은 단어 중 왜 하필 수퍼맨을 주인공의 이름으로 택했는지에 대해 시겔은 명확히 밝히진 않았다. 수퍼맨이라는 말을 처음 쓴 사람은 다름 아닌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다. ‘Superman’은 니체가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언급한 ‘초인 &Uuml;bermensch’의 영어식 번역에 해당한다. 하지만 시겔이 니체의 초인 사상에서 직접 수퍼맨이라는 말을 따왔다고 보는 만화사가는 드물다. 현재 통설은 그가 초인 사상의 영향을 받은 다른 SF작가가 쓴 용어를 빌려왔다는 것이다.

<수퍼맨의 권세>에 등장하는 수퍼맨은 지구인이며 (당황스럽게도) 악인이었다. 여기서 수퍼맨(이야기 중 이름은 ‘빌 던’)은 스몰리 교수의 실험 대상이 된 후 다른 사람의 의지를 조종할 수 있는 초능력을 얻게 된다. 그는 이 능력을 이용해 지구를 정복하려 하지만 마지막 순간 파워를 상실해 평범한 인간으로 되돌아가고 만다. <수퍼맨의 권세>는 시겔과 슈스터가 직접 만든 조잡한 잡지 ‘사이언스 픽션’에 게재됐다. 왜 다른 상업 잡지에 실리지 않았냐고? 간단하다. 그들의 이야기를 사겠다는 이가 전무했기 때문이다. ‘사이언스 픽션’은 5호를 끝으로 발행을 중단하고 만다. 이후 재정적 어려움을 겪던 두 사람은 하루빨리 자신들의 이야기를 잡지사에 팔아 돈을 벌어야 했다. 이들이 두 번째 수퍼맨 이야기 <수퍼맨>을 만들어낸 것은 바로 이 때였다. 흥미롭게도 이 이야기의 수퍼맨은 초능력이 없었다. 그는 단지 건장하고 힘 센 지구인에 불과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시겔은 이야기의 과학성을 매우 중시했다. 그는 과학적 해명이 불가능한 초능력을 무턱대고 주인공에게 부여하는 걸 원치 않았다. 이 이야기에서 또 한 가지 주목할 점은 ‘드디어’ 수퍼맨이 선인으로 그려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이야기 역시 끝내 어느 잡지에도 실리지 못했다.

‘아메리칸 메시아’의 탄생

1934년의 어느 날 밤, 시겔의 머릿속에 기막힌 발상이 떠올랐다. 이 발상을 토대로 만들어진 이야기가 바로 세 번째,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 수퍼맨 버전이다. 이 버전에서 수퍼맨은 다시 초능력을 회복한다. 그러나 <수퍼맨의 권세> 때와는 달리 이번 수퍼맨의 능력은 육체적인 쪽에 집중돼 있었다. 이야기가 실릴 매체가 시각적인 매체인 만화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결정은 매우 합리적인 것이었다. ‘최종 수퍼맨’은 헤라클레스나 삼손과 같은 신화 영웅의 맥을 잇는 인물로, 건장한 체구에 괴력을 지녔으며 어떤 무기로도 상처를 낼 수 없는 ‘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아니, 과학성을 그토록 중시하던 시겔이 왜 이런 황당한 설정을 했냐고? 그러나 이번엔 그것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번 수퍼맨은 외계인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수퍼맨은 (훗날 ‘크립톤’이라 명명된) 파괴된 행성에서 왔다. 행성이 폭발하기 직전, 수퍼맨의 아버지는 아들을 로켓에 태워 지구로 보낸다. 수퍼맨을 외계인으로 설정함으로써 시겔은 무한한 창작상의 자유를 얻게 된다. 수퍼맨은 외계인이므로 인간이 가진 어떤 약점도 지니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는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초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한편으로, 수퍼맨이 하늘에서 떨어진 이방인이라는 점은 이야기에 신화적 무게를 부여하기도 했다. 수퍼맨 이야기는 흔히 모세 이야기의 변형으로 해석되고 있다. 모세가 나일 강에 버려진 뒤 다른 사람의 품에 길러져 고통 받던 히브리 민족을 해방시켰듯, 하늘에서 떨어진 수퍼맨은 지구인의 품에 길러져 고통 받는 메트로폴리스 시민들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친다. 또한 이보다 더 직설적으로, 아예 수퍼맨을 예수로 해석하는 이들도 많다. 즉, 수퍼맨의 아버지가 아들을 ‘내려 보내’ 지구인들을 돕게 한 것은 하나님이 예수를 지상으로 내려 보낸 것과 같은 맥락이며, 수퍼맨의 성장기 역시 예수의 그것과 매우 흡사하다는 것이다. 특히 시겔이 한때 수퍼맨의 양어머니 이름을 메리(Mary, 곧 성모 마리아)라 칭했다는 점은 이 주장을 강력하게 뒷받침한다(훗날 양어머니의 이름은 ‘마사’로 바뀐다). 물론 이런 해석들은 시겔과 슈스터의 당초 의도와는 거리가 좀 멀다. 두 사람은 ‘단지 수퍼맨을 하늘에서 떨어지게 만드는 것이 멋진 생각이라고 여겨져’ 이런 컨셉을 도입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와는 상관없이 경제대공황기의 미국인들에게 수퍼맨은 메시아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궁극적으로 수퍼맨은 역사가 200년밖에 안 된 미국에서 당시 어려움을 겪던 자국민들의 필요에 의해 탄생한 신화이기 때문이다. 외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수퍼맨은 지극히 미국적인 신화이기도 하다. 외계에서 온 이방인 수퍼맨이 불세출의 영웅이 된다는 설정은 과거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이주한 이방인들, 즉 미국인이 세계 평화의 수호자로 거듭난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슈스터는 ‘아메리칸 메시아’에게 화려한 특수의상을 입히고 가슴에 큰 ‘S'자를 새겨 넣음으로써 시각적으로 돋보이게 했다. 또, 복장 위에 붉은 망토를 걸쳐줌으로써 그의 동작이 더욱 커 보이도록 했다. 그러나 가장 주목할 점은 바로 이 인물의 이중 정체성이다. 물론 쾌걸 조로의 이야기에서 보듯 이중 정체성이라는 것은 수퍼맨에서 새롭게 도입된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수퍼맨의 이중 정체성은 조로나 조로의 영향을 받은 배트맨의 그것과는 성격이 다르다. 조로나 배트맨의 다른 자아 돈 디에고, 브루스 웨인은 근엄한 모습의 상류층 사람이다. 그러나 수퍼맨의 다른 자아인 클라크 켄트는 허점이 많은 노동자 계급 인물이다. 여기엔 다 이유가 있다. 클라크는 바로 시겔과 슈스터가 자신들의 모습을 그대로 투영해 만든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노동자 계급이며 안경을 썼고, 짝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말을 더듬고 쩔쩔 매는 클라크의 모습은 시겔과 슈스터의 학창시절 모습이라 보면 딱 맞다. 뒤집어 말하자면, 클라크의 다른 자아인 수퍼맨은 시겔과 슈스터의 남성 이상향이었던 것이다. 온순하기 짝이 없는 선한 신문 기자 클라크가 사실은 ‘더욱 위대한 선’의 상징인 수퍼맨이라는 설정은 이야기에 무한한 깊이를 부여했다. 이것은 ‘보통 사람도 초인이 될 수 있다’는 철학 사상이 시각적으로 발현된 형태며, 동시에 이야기에 사실성을 부여하기도 했다.

최종 수퍼맨 이야기에는 이전 버전에 없었던 새로운 인물이 한 명 등장한다. 바로 로이스 레인이다. 흥미로운 건 로이스는 당시 미국사회가 권장하던 가정적인 여성상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라는 점이다(1930년대는 활발한 여권운동이 펼쳐지기 훨씬 전이었다). 로이스는 직설적이고 고집이 세며 야심 찬 커리어우먼이다. 그녀는 ‘남성미의 상징’인 수퍼맨에게 푹 빠지지만 클라크는 끊임없이 무시하며 푸대접한다. 로이스는 시겔 자신이 흠모했던 여러 여성들을 참조해 만든 캐릭터다. 그중에는 시겔이 학창시절 짝사랑했던 여학생 로이스 암스터와 슈스터의 그림 모델이 된 조안 카터(그녀는 훗날 시겔과 결혼한다), 당찬 커리어우먼 연기를 했던 배우 글렌다 파렐 등이 포함돼 있다. 로이스가 구현한 새로운 여성상은 당시 독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1938년 6월, 액션 코믹스 창간호

출판사로부터 몇 차례나 거절당한 시겔과 슈스터는 1937년에야 '감격적인’ 원고 청탁을 받게 된다. 만화업계의 개척자였던 M.C.게인은 수퍼맨 이야기에서 가능성을 엿보고, 당시 새로운 만화잡지를 출간하려 하고 있던 DC 코믹스 발행인 해리 도넨필드와 잭 리보비츠에게 시겔과 슈스터를 소개한다. 곧이어 새로 창간될 잡지의 편집장 빈 설리반이 시겔과 슈스터에게 ‘잡지 창간호에 실릴 13페이지짜리 만화’를 그려줄 것을 요청한다. 그리고 1938년 6월, 수퍼맨 이야기가 실린 DC 코믹스의 새 만화잡지 창간호가 드디어 가판대에 풀렸다. 바로 ‘액션 코믹스 1호'였다. 액션 코믹스 1호는 기록적인 판매고를 올리며 DC 코믹스를 기쁘게 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DC 코믹스는 잡지의 인기 요인이 수퍼맨 때문인지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다. DC 코믹스는 몇 차례의 발행이 거듭된 후에야 액션 코믹스가 잘 나가는 이유를 알게 됐다. 잡지의 애독자들은 놀랍게도 가판대에서 “액션 코믹스 주세요” 대신 “수퍼맨 실린 책 주세요”를 외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고무된 DC 코믹스는 잡지 12호 이후론 아예 표지에 수퍼맨이 쇠사슬을 끊는 그림과 함께 ‘여기에는 수퍼맨이 실려 있습니다’라는 문구를 고정적으로 박아 넣었다. 경제 침체에도 불구, 당시 액션 코믹스의 판매고는 무려 50만 부에 달했으며, 이 수치는 순식간에 두 배로 불어났다. 그리고 곧 ‘최초의 수퍼 영웅’ 수퍼맨은 젊은이들의 우상이 됐다.

액션 코믹스 1호에 실린 수퍼맨 이야기에는 현재 알려진 것과는 다른 설정이 몇 가지 있다. 첫째, 수퍼맨은 하늘을 나는 대신 고공 점프를 하는 인물이다. 둘째, 클라크가 근무하는 신문사의 이름은 ‘데일리 스타’다(훗날 토론토에 있는 실제 데일리 스타 신문사와의 혼동을 막기 위해 이름은 ‘데일리 플래닛’으로 바뀌었다). 셋째, 수퍼맨은 ‘이름 모를’ 파괴된 행성에서 왔으며, 고아원에서 길러진다. 초창기 수퍼맨 이야기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수퍼맨이 지극히 ‘개인적인’ 봉사활동을 하는 경우가 잦았다는 것이다. 이런 봉사활동은 당시의 사회적 이슈와도 관련이 깊다. 예컨대 액션 코믹스 1호에서는 부패한 정치인 문제, 누명을 쓴 재소자 문제 등이 다뤄졌으며, 7호에는 파산 직전의 서커스단 단장을 수퍼맨이 도와주는 일화도 소개된다. 시겔과 슈스터는 이런 민감한 이슈를 다룸으로써 대중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수퍼맨이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도와준다는 내용은 누구 못지않은 경제적 곤란을 겪었던 시겔과 슈스터의 초인에 대한 오랜 갈구가 직접적으로 반영된 부분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수퍼맨 이야기에서 가장 불쌍해 보이는 인물은 바로 클라크다. 수퍼맨이 보잘 것 없는 모습으로 대중들 사이에 섞여 살며 그들의 고통을 함께한다는 설정은 동서양에 널리 퍼져 있는 민중 영웅 신화와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수퍼맨 신화가 지극히 미국적인 것임에도 국경을 초월한 호소력을 지닌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야기의 발전

액션 코믹스의 판매고가 급증하자, 시겔과 슈스터는 일간신문에도 수퍼맨 이야기를 연재한다. 1939년 1월에 실린 일간신문 만화에서는 수퍼맨의 탄생배경이 보다 자세히 소개된다. 수퍼맨의 고향 행성에는 크립톤이라는 이름이 붙여졌고, 수퍼맨의 아버지 조엘(당시에는 ‘Jor-L’로 표기)이 칼엘(수퍼맨의 크립톤명)을 지구로 보내는 과정도 더욱 자세히 묘사됐다. 한편 M.C. 게인스는 수퍼맨 이야기만을 담은 단행본도 시리즈로 발행하기로 했다. 게인스는 시겔에게 이 단행본의 첫머리에서 수퍼맨의 초능력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곁들여줄 것을 요구했다(이전까지는 크립톤인이 원래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설정됐다). 이에 따라 시겔이 고안해낸 컨셉은 이렇다. “지구는 크립톤보다 훨씬 작기 때문에 중력도 상대적으로 약하다. 따라서 인간보다 훨씬 진화한 종족인 크립톤인은 지구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근력을 얻게 된다.” 또, 여기서는 지구로 떨어진 수퍼맨이 켄트 부부에 의해 길러지는 설정이 도입됐다. 이 내용이 담긴 ‘수퍼맨 1호’는 39년 여름에 간행됐다. 한편 액션 코믹스 13호에서 시겔은 수퍼맨을 집요하게 괴롭히는 악당을 최초로 소개한다. 여기에 등장한 악당은 ‘울트라-휴머나이트’라는 대머리 사나이였다. 초창기 수퍼맨의 악당은 대부분 미친 과학자들이었는데, 이 컨셉은 꽤 오랫동안 유지된다. 1940년 액션 코믹스 23호에서 시겔은 드디어 역사상 길이 남을 악당 캐릭터를 소개한다. 바로 렉스 루터였다. 처음 등장하는 이야기에서부터 루터는 전쟁을 조장하고 세계를 정복하려 하는 등 ‘스케일이 큰’ 활동을 보여준다.


수퍼맨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닫자 시겔과 슈스터는 점점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문하생을 고용해 작업에 대한 부담을 덜기로 했다. 이때부터 수퍼맨의 이야기에는 다른 이의 손길이 가미되기 시작한다. 1945년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해 잠시 펜을 놓았던 시겔이 만화계에 복귀했을 때 이미 수퍼맨은 그만의 작품이 아니었다. 그러나 종전 후 시겔과 슈스터를 가장 당황하게 한 건 DC 코믹스가 자신들에게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은 채 <수퍼보이>의 연재를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수퍼보이는 수퍼맨의 유년기를 다룬 이야기로, 본래 시겔과 슈스터가 1941년부터 구상하던 것이었다. 여기선 수퍼맨이 유년기를 보낸 가상의 마을 스몰빌과 그의 어린 시절 친구들인 라나 랭, 피트 로스 등이 소개된다. 당황스러운 점은, 이 이야기에서 수퍼맨은 이미 유년기부터 쫄쫄이 의상을 입고 활약했다는 것이다. 수퍼보이가 어른 버전 수퍼맨에 버금가는 인기를 끌자, 1949년에는 <수퍼보이>라는 별도의 코믹북 시리즈도 발간됐다. 시겔과 슈스터는 자신들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1947년 DC 코믹스를 고소했다. 그러나 이 재판에서 시겔과 슈스터는 불리한 위치에 놓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1937년에 DC 코믹스와 첫 계약을 할 때 치명적인 실수를 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단돈 130달러에 수퍼맨의 첫 이야기를 팔면서 캐릭터의 판권도 함께 팔아버린 것이다. 결국 1948년 법정은 “10년 전의 계약이 유효하기 때문에 시겔과 슈스터는 수퍼맨의 판권을 가지지 못 한다”라고 판결했다. 세인들의 주목을 끈 이 재판은 결국 DC 코믹스가 콤비에게 10만 달러를 화해금 명목으로 지불하면서 마무리됐다. 재판 결과에 따라 수퍼맨과 수퍼보이의 판권을 독점하게 된 DC 코믹스는 이후 만화의 저자 크레딧에서 시겔-슈스터의 이름을 아예 빼버렸다. 판권료만으로도 부자가 될 수 있었던 시겔과 슈스터는 이 황당한 사건으로 인해 여생을 가난하게 보내야 했다.

이야기의 확장

수퍼맨 이야기는 곧 다른 매체로도 확산됐다. 우선 1940년 2월 <수퍼맨의 모험>이라는 라디오 드라마 시리즈가 전파를 타기 시작했다. 이 드라마에서는 버드 콜리어가 수퍼맨/클라크의 목소리를 맡았는데, 제작자들이 신비성을 최대화하기 위해 수퍼맨 목소리를 녹음한 이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 드라마는 또한 전설적인 수퍼맨 소개 문구인 “하늘을 보라! 새다! 비행기다! 아니 수퍼맨이다!”를 대히트시켰다. 무려 11년에 걸쳐 절찬리에 방송된 이 드라마는 수퍼맨 신화에 네 가지 결정적 기여를 했다. 첫째, 이 드라마로 인해 성인들까지도 수퍼맨을 사랑하게 됐다. 둘째, 인기 캐릭터인 지미 올슨과 페리 화이트(데일리 플래닛 편집장)가 바로 이 드라마를 통해 처음 소개됐다. 특히 코믹 캐릭터로 고안된 지미 올슨(본래 원고담당 사환이었으나 후에 사진기자가 된다)은 예상을 뛰어넘는 인기를 끌어 나중엔 그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책까지 나왔다. 셋째, 1943년 방송분에서 ‘크립토나이트’를 최초로 소개했다. 수퍼맨이 지구로 떨어질 때 함께 온 이 크립톤 운석 파편은 수퍼맨에게 치명적인 위협이 된다. 크립토나이트의 소개로 신에 가까운 존재인 수퍼맨도 생명에 위협을 받을 수 있다는 컨셉이 가미되면서, 이야기에는 전에 없던 긴장감이 부여됐다. 크립토나이트는 1949년 이후엔 만화에서도 정식 컨셉으로 채택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드라마는 수퍼맨이 고공 점프를 하는 대신 하늘을 난다는 컨셉을 선택, 정설로 굳어지게 했다. 바야흐로 수퍼맨은 중력을 완전히 무시할 수 있는 경지에 이른 것이다.

1942년에는 조지 로더의 소설판 <수퍼맨의 모험>도 출간됐다(로더는 라디오 드라마의 대본과 내레이션을 맡은 바 있다). 이 소설에선 수퍼맨의 친부와 친모의 이름 철자가 오늘날 알려진 Jor-El과 Lara로 각각 수정됐다. 한편 1941년에는 애니메이션판 <수퍼맨>도 제작됐다. 이 애니메이션 시리즈의 처음 9개 에피소드를 제작한 이는 바로 월트디즈니와 함께 애니메이션의 개척자로 평가받는 막스 플레이셔였다. 배급을 맡은 파라마운트는 당시 전 미국을 휩쓸던 수퍼맨의 열풍을 감안해 편당 10만 달러의 파격적인 제작비를 투입하기로 했다. 덕분에 플레이셔는 역사상 최고 수준의 작화를 선보일 수 있었다. 의인화된 동물을 주인공으로 한 애니메이션이 대세였던 당시, 이 작품이 선보인 리얼한 작화와 생동감 넘치는 움직임은 관객들에게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도 애니메이션 사상 최고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다.

1948년에는 드디어 최초의 실사영화판 <수퍼맨>이 등장한다. 시리얼(짤막한 단편으로 구성된 시리즈로 주말마다 극장에 걸림) 형태로 제작된 이 <수퍼맨>에서 주연을 맡은 이는 커크 알린이었다. 하지만 제작을 맡은 샘 카츠만이 지나치게 적은 제작비를 책정했던 탓에 영화의 특수효과나 미술은 형편없는 수준이었다. 특히 수퍼맨이 하늘을 나는 장면은 실소가 나올 정도로 엉성한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졌다(우습게도 이 전통은 1978년 <수퍼맨: 더 무비>가 등장하기 전까지 지겹게 이어졌다!) 이 시리즈는 비록 성인 관객들의 외면을 받았지만, 어린 관객들의 열렬한 지원사격 덕분에 흥행에는 크게 성공했다. TV 수상기가 본격적으로 보급될 무렵인 1952년에는 수퍼맨이 안방극장까지 점령했다. 문제의 작품은 바로 TV 시리즈 <수퍼맨의 모험>이었다. 이 작품은 DC 코믹스 편집위원이었던 휘트니 엘스워스가 직접 제작했는데, 덕분에 파일럿 에피소드에 묘사된 수퍼맨의 지구 도착과정이나 캐릭터들의 면모 등에 만화의 설정이 충실히 반영됐다. 예외가 있다면 클라크 켄트의 모습과 행동이었다. 만화에서 클라크는 어수룩한 인물로 묘사돼왔는데, 이 작품에서 수퍼맨/클라크 역을 맡은 조지 리브스는 이 컨셉을 과감히 무시했다. 여기에서 클라크는 ‘안경을 낀 차분하고 품위 있는 중년 신사’로 묘사된다(이것은 훗날 크리스토퍼 리브가 시리즈 최대의 맹점으로 지적한 부분이다). 그러나 이 시리즈 역시 적은 제작비로 만들어졌기에, 미술과 특수효과 수준은 기대 이하였다. 하지만 이런 맹점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눈부신 연기와 재치 넘치는 각본 덕에 시리즈는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1966년에는 수퍼맨을 소재로 한 브로드웨이 뮤지컬도 등장했다. <새다, 비행기다, 수퍼맨이다>라는 제목의 이 뮤지컬은 놀랍게도 무대 연출의 거장 해롤드 프린스가 제작과 연출을 맡았으며,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각본가로도 잘 알려진 로버트 벤튼과 데이비드 뉴먼이 각본을 맡았다. 이 뮤지컬은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대중들의 주목을 끄는 데는 실패해 아쉽게도 128회의 공연을 마친 후 막을 내려야 했다. 준비에만 수년이 걸린 이 야심작이 흥행에 실패한 이유는 뮤지컬이 초연되기 바로 몇 달 전부터 방영돼 큰 인기를 끈 <배트맨> TV 시리즈와 본의 아니게 경쟁을 하게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되기도 한다. 아담 웨스트가 주연한 <배트맨> TV 시리즈는 대중들에게 슈퍼 영웅물에 대한 결정적 편견을 심어줬다. 바로 ‘슈퍼 영웅물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유치하다’라는 것이다. 이 시리즈가 대중 정서에 끼친 악영향은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것은 향후 몇 년간 메이저 스튜디오가 슈퍼 영웅을 소재로 한 영화 만들기를 기피한 결정적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이 시기, 만화에서는 주목할 만한 컨셉이 몇 가지 더 추가됐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바로 액션 코믹스 241호에서 소개된 ‘고독의 요새’(북극에 있는 수퍼맨의 안식처)다. 어드벤처 코믹스 210호에서는 수퍼보이의 애완견인 수퍼독 크립토(우습게도 이 개는 붉은 망토를 걸치고 있다!)가 소개됐고 액션 코믹스 252호에서는 크립톤 행성의 또 다른 생존자인 카라, 즉 ‘수퍼걸’이 소개됐다. 또, 시겔은 어드벤처 코믹스 271호에서 렉스 루터의 스몰빌에서의 과거사를 소개했다. 이 이야기에 따르면, 루터는 본래 선인이었으나 수퍼보이의 실수로 대머리가 되고 나선 악인이 된다. 한편 1970년대에 줄리어스 슈와르츠가 DC 코믹스 편집장으로 오면서 수퍼맨 이야기는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이야기에 참신함을 부여하기 위해 슈와르츠는 크립토나이트를 제거했고 클라크에게 항상 걸치던 우중충한 정장 대신 화려한 현대식 복장을 입혔으며, 그의 직업도 TV 리포터로 바꿔버렸다. 그러나 이 과감한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독자들의 반응이 미적지근하자 슈와르츠는 크립토나이트를 이야기에 다시 등장시키고, 클라크를 슬쩍 신문기자로 복직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철의 사나이’(수퍼맨의 공식 별명)의 인기가 주춤해질 무렵, 수퍼맨 신화의 일대 전환점이 된 대형 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슈퍼맨: 더 무비>(이하 <슈퍼맨>)의 등장이었다.

 


1978년 <슈퍼맨: 더 무비>

할리우드의 메이저 영화사들도 감히 손대지 못하고 있던 수퍼맨 신화를 영화화하겠다 나선 이는 유럽을 무대로 활동하던 독립제작자 알렉산더 솔카인드와 일야 솔카인드 부자였다. 일찌감치 <슈퍼맨>을 초대형 영화로 만들기로 결심한 이들은 영화를 두 편으로 나눠 동시에 찍는다는 모험적인 계획도 세웠다. 그리고 얼마 후 이들은 수퍼맨 영화화 판권을 소유하고 있던 워너와 판권 및 배급계약을 맺는 데 성공한다.

제작자들은 <슈퍼맨>을 기존 TV 시리즈와는 차별되는 심각한 드라마로 만들려 했다. 그들은 이것이 미국 최고의 영웅에 대한 당연한 예우라 생각했다. 하지만 동시에 이것은 엄청난 모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까지 나온 만화의 내용 자체가 심각한 드라마의 재료론 부적당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떤 관객이 쫄쫄이 위에 팬티를 입은 보이스카웃이 하늘을 나는 드라마를 심각하게 받아들일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작자들은 특급 각본가를 기용해야 했다. 그리하여 선택된 이가 바로 <대부>의 작가 마리오 푸조였다. 제작자들이 지금껏 나온 수퍼맨 이야기의 집대성판에 해당하는 각본을 원했기 때문에 푸조는 제재의 취사선택에도 상당한 공을 들였다. 예컨대 푸조는 최근 만화와는 달리 대중들이 클라크를 신문기자로 더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는 점에 착안, 그를 신문기자로 복직시켰다. 수퍼맨의 유년기 역시 만화의 흐름을 따르고 있으나, 비현실적인 요소들을 최대한 배제해 현실감을 강조했다. 또 크립톤 행성 부분은 마치 그리스 신화의 한 대목처럼 무게감 넘치게 그렸다. 한편, 수퍼맨이 영화화되고 있다는 소문을 접한 시겔과 슈스터는 활발한 복권 운동을 전개하게 된다. 언론과 동료 만화가들은 수퍼맨의 판권을 박탈당한 이 불쌍한 작가들의 편을 들어주었고, DC 코믹스와 그 소유주인 워너커뮤니케이션은 시간이 갈수록 집중 비난의 대상이 됐다. 영화를 개봉하기 전에 이 골치 아픈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겠다고 여긴 워너는 결국 시겔과 슈스터를 수퍼맨의 원작자 크레딧에 다시 올리고, 그들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하기로 한다.

푸조가 2차에 걸쳐 쓴 각본에는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분량이 너무나 방대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각본이라기보다 대하소설에 가까웠다. 이것을 그대로 영상화하려면 영화의 상영시간은 족히 6시간은 돼야 할 듯했다. 또, 영화에는 어울리지 않는 대사와 장면 묘사도 적지 않았다. 결국 제작자들은 이전에 뮤지컬 <새다, 비행기다, 수퍼맨이다>의 각본을 썼던 로버트 벤튼과 데이비드 뉴먼에게 각본 손질을 의뢰한다. 한편 제작자들은 이즈음 감독 선정 문제로 또 한 차례 골머리를 앓았다. 스티븐 스필버그, 윌리엄 프리드킨,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 등 후보로 내정한 이들의 영입에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최근 <오멘>을 대히트시킨 리처드 도너를 감독으로 영입하는 데 성공한다. 도너는 직접 각본을 손본다는 조건으로 메가폰을 잡았다. 그가 무엇보다 중시한 건 바로 영화의 사실성이었다. 벤튼-뉴먼 콤비가 손본 각본이 너무 유치하다 생각한 그는 베테랑 각본가 톰 멘키비츠를 영입해 다시 각본을 손보도록 했다. 이 부분은 영화 제작과정에서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멘키비츠의 손을 거친 각본에서는 성경의 한 구절을 보는 듯한 엄숙한 분위기와 실감나는 현대 도시의 생활상, 코믹한 요소들이 완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도너와 멘키비츠의 노력에 의해 <슈퍼맨>은 위대한 미국의 현대 신화에 어울리는 품격을 지니게 됐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 인물이 또 하나 있으니, 바로 수퍼맨 역을 맡은 크리스토퍼 리브다.

리브는 수퍼맨을 3차원적인 현실의 인물로 재탄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그는 “로이스는 수십 년간 클라크가 수퍼맨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다. 이것은 둘 중 하나를 의미한다. 수퍼맨의 위장이 완벽했거나, 로이스가 바보였거나. 수퍼맨이 로이스를 속일 수 있다면 관객도 완벽하게 속여야 한다. 조지 리브스의 TV 극에서처럼 클라크가 단지 안경을 벗으면 수퍼맨이 된다는 억지 설정은 더 이상 요즘 관객에겐 먹히지 않는다”라고 말하곤 수퍼맨과 클라크를 180도 다른 인물로 구현했다. 또한 그는 클라크가 사랑하는 여인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못하는 묘한 상황 설정에서 오는 긴장감과 수퍼맨이 로이스를 다룰 때의 미묘한 감정상태도 기막히게 구현해냈다. 그의 빛나는 인물 해석 덕분에 대중들은 비로소 수퍼맨을 ‘현실의 인물’로 받아들였고, 리브 역시 대중들에게 ‘영원한 수퍼맨’으로 기억됐다. 1978년 12월 개봉한 <슈퍼맨>은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하며 수퍼맨 신화를 다른 나라에 널리 알리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1980년대 변혁의 시대

1980년 일야 솔카인드는 <슈퍼맨 2>를 공개한다. 그런데 그는 놀랍게도 1편을 히트시킨 도너를 해고하고(그와 도너의 관계는 1편 제작과정 후반에 극도로 악화됐다) 리처드 레스터를 새 감독으로 고용하는 모험을 했다. 대부분의 장면들이 1편 제작 당시 함께 촬영됐으므로 레스터가 할 일은 이 장면들을 매끄럽게 연결하고 영화에 몇 가지 코믹 요소를 부여하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슈퍼맨 2>는 전편에 버금가는 히트를 기록하며 ‘철의 사나이’의 인기를 최고조에 이르게 했다. 하지만 <슈퍼맨 3>에 이르러 모든 것들이 뒤틀어지기 시작했다. 당장 각본부터가 문제였다. 데이비드-레슬리 뉴먼 부부가 쓴 <슈퍼맨 3>의 각본은 지나치게 코믹한 요소를 강조하고 있었다. 수퍼맨을 괴롭히는 말썽꾸러기 거스 고먼 역으로 캐스팅된 코미디언 리처드 프라이어의 입김이 너무 강하게 작용한 것도 큰 문제였다. 그 결과 어처구니없게도 <슈퍼맨 3>에서는 도너가 애써 부여한 신화적 품격과 리얼리티가 모조리 제거되고 말았다. 1987년 공개된 <슈퍼맨 4: 최강의 적>에 이르러 상황은 더욱 악화됐다. 이 시점에서 수퍼맨의 영화화 판권은 중소 제작사 캐논 그룹에 팔렸는데, 이로 인해 영화의 규모도 1,2편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으로 쪼그라들었다. 리브는 ‘각본 작업에 관여한다’는 조건으로 4편 출연에 합의했고 ‘수퍼맨이 세계 비핵화에 앞장선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영화의 테마가 됐다. 그러나 로렌스 코너와 마크 로젠탈이 쓴 각본은 무게감과 리얼리티를 여전히 결여하고 있었다. 게다가 예산이 대폭 삭감되는 바람에 특수효과 신이 졸속 제작되고, 최종 편집본마저 본래 의도보다 40분가량이나 삭제되는 황당한 사태도 발생했다. 결국 <슈퍼맨 4: 최강의 적>은 ‘최악의 영화’라는 평가를 받으며 흥행에도 참패했다.

한편 이 무렵 DC 코믹스 편집장 슈와르츠는 쇼킹한 기획을 하고 있었다. 얽힐 대로 얽힌 DC 코믹스 캐릭터들의 과거사를 날려버리고 그들의 커리어를 처음부터 다시 쓰겠다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1985년 작 <무한지구의 위기>와 1986년 <내일의 사나이(수퍼맨의 또 다른 별명)에게 무슨 일이?>(수퍼맨이 파워를 상실하고 보통 인간이 되는 것으로 끝나는 이 만화는 <브이 포 벤데타>와 <와치맨>의 작가 알란 무어의 작품이다)로 구체화됐다. 경천동지의 이 사건 이후 만화작가 존 번은 수퍼맨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썼다. 번의 이야기에선 켄트 부부가 생존해 수퍼맨을 도와주는 것으로 설정이 바뀌었다. 또, 수퍼맨이 어린 시절부터 쫄쫄이를 입고 활약했다는 수퍼보이의 설정이 제거되고 대신 그가 성장 과정에서 점차 자신의 능력을 발견해 간다는 컨셉이 채택됐다. 렉스 루터는 억만장자 사업가로 변신했으며, 로이스는 페미니스트에 가까운 여성으로 변모했다. 한편 번과 함께 수퍼맨 혁명을 주도했던 DC 코믹스의 신임 편집장 마이크 칼린은 80년대 후반엔 다른 매체로 자신의 활동영역을 넓히게 된다. 바로 새로운 수퍼맨 TV 시리즈였다.

 


신화의 부활

<슈퍼맨> 영화 시리즈의 몰락 후 제작자 일야 솔카인드는 TV 시리즈를 통해 재도약을 꿈꾸게 된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 바로 <수퍼보이>(1988~1992)다. 이 작품은 수퍼맨 관련 TV 시리즈로선 매우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마이크 칼린을 비롯한 실제 DC 코믹스 주축 인사들이 대거 제작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또 이 작품은 당시 DC 코믹스의 조류와는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매우 흥미롭다(당시 만화의 설정과는 달리 이 시리즈에서는 수퍼맨이 유년기에 쫄쫄이를 입게 된다). 이 작품에서 수퍼보이/클라크 역은 존 헤임스 뉴톤과 제라드 크리스토퍼(시즌 2 이후)가 맡았는데, 특히 제라드 크리스토퍼는 젊은 층에게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덕분에 시리즈는 시종일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며 순항했지만, 시즌 4의 제작 도중 워너가 저작권 소송을 걸면서 제작이 중단되고 말았다. 워너가 소송을 건 진짜 이유는 훗날에야 밝혀졌다. 워너 역시 ABC를 통해 방영할 새로운 수퍼맨 TV 시리즈를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로이스 앤 클라크>(1993~1997)였다.

이 무렵, DC 코믹스는 또 하나의 깜짝 기획을 하게 된다. 바로 로이스와 클라크를 결혼시킨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ABC가 이 컨셉을 사들이면서 기획은 잠시 보류돼야 했다. ABC는 바로 이 컨셉(시리즈 말미에 로이스와 클라크를 결혼시킨다는)으로 <로이스 앤 클라크>를 만들 생각이었다. 결국 DC 코믹스는 <로이스 앤 클라크>의 진행 상태에 발맞춰 만화를 전개하기로 한다. 1993년 9월부터 방영된 <로이스 앤 클라크>는 기존 수퍼맨 이야기의 정형성을 탈피한 참신한 로맨스 코미디물로 평가받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 작품에서 로이스와 클라크는 과거의 어떤 작품에서보다 젊고 매력적이며 섹시한 커플로 묘사됐다. 수퍼맨/클라크 역은 딘 케인이 맡았는데, 그는 기존의 실수투성이 모범생 이미지에서 탈피한 세련된 클라크의 모습을 구현해냈다. 클라크가 오히려 수퍼맨보다 멋진 인물로 그려진 이 기묘한 시리즈는 팬들에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이 작품이 낳은 진짜 스타는 바로 로이스 역 테리 해처였다. 역사상 가장 귀엽고 섹시한 로이스의 이미지를 구현해낸 해처는 이후 1급 TV 스타 자리에 올랐다. 결합될 듯 말 듯 시청자들의 애간장을 끊임없이 태우던 로이스와 클라크는 1996년 10월 방영된 에피소드에서 결국 결혼하게 되는데, 이 에피소드의 제목은 ‘신에게 맹세하건데, 이번에는 농담이 아닙니다!(진짜 결혼한다는 뜻)’였다. 물론 DC 코믹스는 이 에피소드의 방영 직후 로이스와 클라크의 결혼식을 다룬 만화를 발표했다.

<로이스 앤 클라크>의 종영 후 워너는 수퍼맨의 유년기를 다룬 또 다른 TV 시리즈를 제작했다. 바로 <스몰빌>(2001~)이다. 이 작품은 80년대 후반 만화에 도입된 설정(수퍼맨이 유년기에 쫄쫄이를 입지 않았으며, 능력을 서서히 개발해간다는)을 과감히 채택했다. 또한 이 작품은 수퍼맨이 아닌 클라크에게만 초점을 맞춘 첫 번째 수퍼맨 이야기이기도 하다. <스몰빌>은 젊은 층의 폭발적인 호응을 얻으며 지금까지도 방영되고 있다.

2006년 <수퍼맨 리턴즈>

1990년대 초, 워너가 영화 버전 <슈퍼맨>을 부활하기로 결정한 후 그 결실을 보기까지는 많은 우여곡절이 있었다. 90년대 중반에는 팀 버튼이 니콜라스 케이지에게 쫄쫄이를 입혀 새로운 <슈퍼맨>을 찍으려 했고, 이어 볼프강 페터슨이 <수퍼맨 대 배트맨>을 찍으려했으나 모두 불발에 그쳤다. 몇 년 전에는 <로스트>와 <앨리어스>의 작가 JJ 에이브람스가 다소 황당한 내용의 <슈퍼맨> 각본을 쓰기도 했다(여기서는 크립톤 행성이 폭발하지 않은 것으로 묘사됐다). 그리고 근래에는 <미녀 삼총사 2: 맥시멈 스피드>의 감독 McG가 새 <슈퍼맨>의 메가폰을 잡을 뻔한 아찔한 사건도 있었다. 결국 다행스럽게도 새 <슈퍼맨>의 감독은 검증된 재주꾼 브라이언 싱어가 맡게 됐다. 싱어는 자신이 만든 이야기로 영화를 찍는다는 조건으로 <수퍼맨 리턴즈>의 감독 자리에 앉았다.

<수퍼맨 리턴즈>는 <슈퍼맨> 1,2편의 잠정적 속편에 해당한다. 즉 싱어는 이 작품을 통해 <슈퍼맨> 3,4편 이후의 암울한 역사를 지워버리고 새로운 수퍼맨의 연대기를 시작하려는 것이다. 싱어는 도너의 <슈퍼맨>을 ‘클래식’이라고 격찬하며 <수퍼맨 리턴즈>에 도너의 작품과 같은 신화적 품격과 리얼리티를 부여하려 했다. 또 싱어는 여기서 더 나아가 도너의 작품과는 차별되는 특질을 <수퍼맨 리턴즈>에 심기로 했다. 바로 ‘로맨틱 에픽’으로 수퍼맨 신화를 재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실연을 당한 <수퍼맨 리턴즈>의 수퍼맨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외롭고 슬픈 존재다. 한때 위대함의 상징이었던 붉은 망토와 의상이 이 영화에서는 마치 고독한 영웅을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화끈한 액션 극을 기대한 관객들이 실망할 필요는 없다. 싱어는 ‘<수퍼맨 리턴즈>에는 초강력 액션 신도 넘쳐날 것' 역시 자신 있게 보장했기 때문이다. 그 액션 신의 중심에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공중 액션 신과 속도감 넘치는 수퍼맨의 360도 입체 비행 신이 있다.

저명한 SF작가 리처드 A. 루포프는 이렇게 말했다. “영어권에서 길이 기억되는 가상 영웅은 딱 세 명밖에 없다. 코난 도일의 셜록 홈즈와 에드가 라이스 버로우즈의 타잔, 그리고 시겔-슈스터의 수퍼맨이 바로 그들이다.” <수퍼맨 리턴즈>가 우리시대 가장 위대한 영웅을 성공적으로 부활시킬 것임을 의심하는 이는 거의 없다. 2006년은 ‘철의 사나이’의 새로운 원년이 될 것이다.


김정대(영화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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