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에 밀려있던 오드리 헵번의 연기가 선명하게 돋보인다.

영화감상평

<어두워질 때까지>아름다움에 밀려있던 오드리 헵번의 연기가 선명하게 돋보인다.

1 박천영 0 2443 1
영화사의 모든 여배우 중에서 최고라는 생각에 십여 년간 변함이 없으며, 미래에도 그녀 앞에 놓일만한 여배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나는 오드리 헵번을 아주 좋아한다. 이번에 다시 감상한 이 작품은 그녀의 주옥같은 출연작들 중에서도 영화의 완성도에서 세손가락 안에 포함된다고 할 수 있으며, 청순한 아름다움의 이미지가 너무 강렬하여 자칫 2순위로 밀려버릴 수 있는 그녀의 연기력이 가장 선명하게 드러나는 스릴러 영화의 걸작이기도 하다.

뷰티풀한 맹인 여성 수지의 남편 샘은 여행길에서 돌아오던 중 한 여인으로부터 인형을 얻게 된다. 여인은 사라져버리고, 샘이 집을 비운 사이 로트, 마이크, 칼리노 등이 수지의 집을 찾아온다. 그들은 인형 속에 숨겨진 밀수 마약을 찾던 무리들이었으며, 마이크는 샘의 친구인 것처럼 신분을 속이고 수지에게 접근하고, 킬러인 로트는 수지의 목숨까지 노리게 되는데…….

이 작품의 무대는 수지와 샘의 집으로 거의 한정되어 있어 다른 장소라고는 영화의 도입부에서만 잠시 비춰질 뿐이며, 화면에 담아낼 수 있는 공간이 극히 부족한 약점을 빈틈없이 치밀한 시나리오와 배우들의 눈 돌릴 사이가 없는 연기로 압도하고 있어서 시간이 흐를수록 그 닫히고 밀폐된 공간이 긴장감과 위협적인 요소로 압박해오는, 스릴러에서 가장 중요한 관객의 마음을 틀어쥐는 장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여기에 정말 리얼하고 섬세한 헵번의 맹인연기가 빛을 발하며 감상하는 사람의 마음을 불안하고 공포에 질려있는 그녀에게 동화시키고, 용기와 기지를 발휘하여 구사일생하게 되는 마지막 장면까지 팽팽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게 만드는 힘을 느끼게 한다.

헵번을 특별히 좋아하지는 않는 분이라도 완성도 높은 스릴러의 끈끈하고도 개운한 맛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꽤 오래전의 영화이기는 하지만 근래에 출시됐던 같은 장르의 어떤 영화보다도 잘 갈고 닦여진 깊은 내공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으며, 감상 후에는 아주 재미있고 뛰어난 연극을 한편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들게 되는 스릴러 영화의 명작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ps: 오드리 헵번


생일 : 1929년 05월 04일
사망일 : 1993년 01월 20일
성별 : 여자
출생 : 벨기에
공식 홈페이지 : www.audreyhepburn.com


1989 영혼은 그대 곁에 (Always) - 헵 역
1976 로빈과 마리안 (Robin and Marian) - 마리안 역
1967 언제나 둘이서 (Two For The Road)
1967 어두워질 때까지 (Wait Until Dark) - 수지 헨드릭스 역
1964 뜨거운 포옹 (Paris - When It Sizzles) - 가브리엘 심슨 역
1964 마이 페어 레이디 (My Fair Lady) - 엘리자 둘리틀 역
1963 샤레이드 (Charade) - 레지 램퍼트 역
1961 티파니에서 아침을 (Breakfast at Tiffany's) - 홀리 역
1959 파계 (Nun's Story, The) - 가브리엘 역
1957 화니 페이스 (Funny Face) - 조 역
1957 하오의 연정 (Love In The Afternoon)
1956 전쟁과 평화 (War and Peace) - 나타샤 로스토프 역
1954 사브리나 (Sabrina) - 사브리나 페어차일드 역
1953 로마의 휴일 (Roman Holiday) - 앤 공주 역


영화제 년도 관련영화 부문 구분
골든 글로브 시상식 1954년 로마의 휴일... 여우주연상(드라마)... 수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1954년 로마의 휴일... 여우주연상... 수상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1955년 사브리나...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1960년 수녀 이야기...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1962년 티파니에서 아침을...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1968년 어두워 질 때까지... 여우주연상... 노미네이트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 1993년 영혼은 그대곁에... 진 허숄트 박애상... 수상


'로마의 휴일'에서 신문기자와 함께 로마 시내를 맘껏 돌아다니던 어느 나라의 공주, '하오의 연정'의 중년남자와 사랑하는 젊은 연인, '전쟁과 평화'의 나타샤, '티파니의 아침'에서 가난한 남부여인 그리고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교수에게 개인수업을 받는 발랄한 여인으로 우리 관객들을 사로잡은 오드리 헵번은 커다란 눈에 마른 몸매로 온 세계 팬들의 사랑을 받던 스크린의 요정이었다. 1993년 2얼 20일 직장암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은 영원한 소녀 같던 그녀를 아끼던 많은 팬들에게 슬픔을 금치 못하게 했다. 더구나 1989년부터 세계아동기구의 친선사절로 헐벗고 가난한 어린이들 구호에 앞장서 수단, 에티오피아, 베트남, 소말리아를 방문하였고 만년을 어린이 구호에 앞장선 그녀의 인도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존경을 받게 했다.

'로마의 휴일'에서 그레고리펙에 이끌려 미장원에 들러 짧게 깎은 '헵번스타일'의 숏컷트, <사브리나>에선 맘보바지를 세계에 유행시킨 오드리는 두 번 결혼했지만 요란한 스캔들은 없었다. 54년 영화배우 멜 파라와 첫 번째 결혼했다. 그리고 68년에 이혼하고 2년 뒤 40살에 이태리 정신과 의사 안드레아 도티와 재혼했다. 그러나 81년 이혼하여 혼자 살면서 인도주의적인 구호 활동에 앞장섰다. 오드리는 1993년 3월 29일의 아카데미상 시상식에서 '인도주의상'을 수상할 예정 이었으나 이 영광을 안지 못하고 세상을 뜬 것이다.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젊은 날의 청초함은 눈가의 주름으로 변해갔지만, 그녀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뷰티풀한 고결함이 깃들여 있었다. 소식까지 해가며 아프리카의 피골이 상접한 아이들과 함께 지내던 말년의 모습은 패션업체의 광고를 위한 일회성 이벤트로 혹은 자신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누그러뜨리기 위한 면죄부용으로 이루어지는 아프리카 방문과는 그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어서 더욱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다.

오드리 헵번은 1929년 5월 4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아일랜드계 영국인 제임스 A. 헵번 레스톤과 네덜란드의 유서 깊은 남작가문 출신의 폴란드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4살 때 영국으로 건너갔고, 6살 때 런던 교외의 기숙학교에 입학했다. 2차 대전이 일어나자마자 얼마안있어 부모가 이혼하여 어머니의 고국 폴란드에서 지냈다. 그러나 나치점령 하에서 오드리는 전쟁의 공포와 굶주림등 온갖 고초를 겪었다. 이것 때문에 그녀는 평생하고 싶었던 역할이 '안네 프랑크'역할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시절의 수난과 가난이 그녀로 하여금 세계의 정상에 올라간 뒤 어린이들의 가난 구호에 앞장서게 한 것이다.

19살 때 단신으로 런던으로 가서 발레리나 수업을 받다가 1950년 마리오 덴비 감독의 눈에 띠어 <낙원의 웃음>에 단역으로 데뷔했다. 이후 <젊은 아내의 이야기>, <첫사랑>등 6개의 작품에 단역으로 출연했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프랑스 몽테 카를로에 체류 중 'The Lavender Hill Mob' 에 출연하는데 이곳에서 만난 '지지'의 작가 꼴레트의 눈에 뛰어 그녀의 작품'키키'의 브로드웨이 무대에 일약 주연으로 출연케 되었다. 공연은 성공이었고 이 작품을 본 명장 윌리엄 와일러가 그녀를 '로마의 휴일'에 여주인공으로 캐스팅 하여 그녀에게 화려한 스크린의 문을 열게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적시에 흥행타를 날리면서 그녀의 청순하고 여린 이미지는 벌집 쑤셔놓듯이 흥행 가를 석권했다.

그녀는 53년 로마의 휴일에서 첫 오스카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신인 여배우의 첫 출연이 이렇게 커다란 영광을 그녀에게 안겨준 것이다. 이후 화려하게 스크린을 누벼온 오드리는 64년 <마이 페어 레이디>로 사상 처음 개런티 백만 달러 스타가 되는 영광도 누렸다. 또한 12년 동안 15편의 영화에 등장하면서 비평가와 흥행 가를 동시에 석권하여 인기가도를 달렸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연인 상대자가 그녀보다 나이가 어린 배우가 몇몇 있었지만 그녀의 연약한 체형으로 인해 이것이 무사히 눈속임이 됐다는 것이다.
가난하고 수난 받던 소녀시절로 부터 최고의 영화배우로 정상에 올라 마침내 어린 시절의 쓰라린 추억을 더듬으며 어린이 난민 구호에 앞장서다 사라진 이 별은 수많은 팬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아 빛날 것이다.


"스타일이란 단어는 목적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자주 사용됩니다. 나의 어머니인 오드리헵번에게 있어서 그것은 타인에 대한 존중과 인간에 대한 희망, 그리고 삶의 훈련에 의해 지탱된 내적인 아름다움의 연장이었습니다.
그녀의 라인이 퓨어하고 우아했다면 이는 그녀가 단순함의 힘을 믿었기 때문이며, 세월에 구애받지 않은 영속성이 있었다면 이는 그녀가 그 가치를 알았기 때문이며, 그녀가 오늘날까지도 스타일의 아이콘이라면 이는 그녀가 한번 자신의 룩을 발견한 이래 그녀의 삶을 통해 그것을 쭉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한 번도 트렌드를 쫓은 적이 없으며, 매 시즌 자신을 새롭게 바꿔야 한다고 생각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패션을 사랑했지만 이는 자신의 룩을 보완해주는 도구로 서였습니다.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특별하다거나 평범하지 않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그게 바로 그녀가 항상 열심히 일하고 밝았으며 프로페셔널했던 까닭입니다.
그녀의 스타일은 그녀 자신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녀를 존경하는 것은 우리가 본 그녀가 그럴싸하게 포장된 무엇이 아니라 정직하고 100% 순수한 인간이었기 때문입니다."
-헵번의 아들 Sean Ferrer


"그녀를 만난 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라웠던 내게 그녀는 <사브리나>의 의상을 맡아 달라고 부탁함으로써 나를 더욱 놀라게 했다. 사실 그 일을 하기에 너무도 바빴지만 그녀의 매력적인 태도에 승낙하고 말았고 그 이후 현대물에 출연할 때면 언제나 내게 의상을 부탁했다.
오드리는 매사에 정확했으며 완벽한 프로였다.
일에 늦는 법이 없었으며 화를 내는 일도 없었다. 다른 배우들과는 달리 버릇없는 스타행세를 하지 않았다."
-디자이너 지방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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