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혹은 물레방아 도는 마을(구로자와 아키라)

영화감상평

꿈, 혹은 물레방아 도는 마을(구로자와 아키라)

2 칼도 0 2257 3


1. 꿈에 대하여

그런 마을은 이전에도 없었고 지금도 없고 앞으로도 있기 힘들 것 같다는 의미에서, 그러나 그럼에도 바람직한 것으로 제시되고 있다는 의미에서 영화는 제목 그대로 꿈이다.

있기 힘든 것의 가상이 있기 힘든 것의 가상이라고 해서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현재 있는 것을 그 있기 힘든 것으로 조금이라도 더 끌어올리는데 기동력이 될 수 있는 사소한 반성이라도 자극하면 된다.

2. 있기 힘듬에 대하여

누가, 왜 있기 힘들다고 생각하는가? 그런 마을이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을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마음 먹는 순간 '있기 힘들다는 사실'은 별 의미가 없어진다. 따라서 있기 힘듬을 강조하는 마음은 별로 그 마을에 매혹되지 않은 마음이다.

3. 예술작품의 힘에 대하여

자연친화적 생태 공동체적 삶에 대하여 잘 모르거나 별 매력을 못느끼는 이들에게도 일말이나마 감동을 주지 않는다면 '물레방아 도는 마을'은 실패한 것이다.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만 끌어당기는 예술작품은 훌륭하지 않다.

4. 진부함 또는 식상함에 대하여

메시지가 진부하다거나 식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미 자주 보고 들어온 메시지라고. 그러나 자주 보고 들어왔다는 것과 진부하다는 것은 동의어가 아니다. 내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 누군가의 모습과 목소리를 아무리 자주 보고 듣는다 한들 나는 그 모습과 목소리를 진부하다고 느끼지 않으며 그 모습과 목소리에 식상해 하지도 않는다.

영화가 늘어나서, 메시지도 어디서 이미 보고 들어본 것 같은 경구보다는 더 논증적인 주장이 되었어야 했을까? 오히려 그 단순한 메시지는 자연친화적인 생태 공동체적 삶의 단순함에 어울리지 않는가? 수많은 경전들에서 최고의 진리는 언제나 경구처럼 표현되지 않았던가? 어디선가 이미 보고 들어본 것 같다고 해서 불경이나 성경의 어떤 경구들이 진부하거나 식상한 것이 되는가?

아니, 정말로 그 메시지, 특히 노인의 말들은 어디서 이미 보고 들어본 것 같은가? '밤이라는 것은 별이 안보일 정도로 밝아서는 안되지'라는 말은 정말로 진부한가? 대낮같이 밝은 밤에서 아무런 문제도 못느끼는 이들에게만 진부하게 느껴지는 것은 아닌가?

실로 대사가, 말이 앞서는 것도 아니다. 말의 의미작용에 직접적으로든 상징적으로든 어울리는 '침묵하는' 시퀀스 - 자연풍광이든 물레방아같은 인공물이든 장례 행렬이든 - 와 음악도 있다.

5. 없는 것에 대하여

전기가, 경운기가 없다는 것까지는 참을 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마을에는 이름도 없다. 마을에는 목사와 스님도 없다. 이름을 붙이는 것은 이름 붙여진 것과 그 이름을 부르는 이 사이게 거리를 만들고, 이름 붙여진 것을 반성과 평가와 의심과 규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그 와중에서 그 이름붙여진 것의 실체성 - 우리를, 나를 완전히 장악하는 힘은 사라진다. 마을에는 그런 이름이 없다. 아니, 아예 없지는 않다. 남들이 부르는 이름은 있다. 물레방앗골.

스님과 목사는 무슨 일을 하는 이들인가? 그들은 개개인들이 자족적으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을 빼앗아 가는 사람들이다. 구원이든 초월이든 죽은 자를 잘 보내는 일이든 그들은 그것들에 개인들이 자신들의 다리(매개)가 없이는 들어설 수 없는 영역을 만들어 내고 그럼으로써 삶을 더 분화된 것으로, 덜 원초적인 것으로 만든다. 마을에는 그런 스님과 목사가 없다. 그래서 이를테면 장례식에도 '어린이들'을 포함해 마을 사람 모두가 참여한다.

6. 죽음에 대하여

노인은 '일 잘하고 살만큼 살다가 죽는 것은 경사'라고 한다. 전형적인 현대인들은 그렇게 안느끼는 것이 맞는가? 현대인들은 일 잘하고 살만큼 살다가 죽는 것도 두려워 하고 무서워하고 멀리하고 슬퍼하는가?

노인은 또 삶을 고역이라고 말하는 것은 허영이라고 말한다. 확실히 '자족'하는 삶은, 일잘하고 살만큼 살다 죽는 삶은 즐거울 것 같다. 욕망으로 들끓는 이들에게 행복은 늘 부족하고 지연되며 죽음은 갑작스러운 단절로, 깜깜한 절벽으로 느껴진다.

7. 꽃 놓아두기에 대하여

객사한 이를 물가에 묻어 바위를 얹어두고 그 옆을 지날 때마다 그 위에 꽃을 놓는다. 어쩌면 노인만이 백년이 넘었을 그 관습의 기원을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집단적 관행은 기원을 갖고 있지만 그 관행을 따르는 이들이 그 기원을 묻지 않을 때, 그러면서도 그 관습을 자연스럽고 의미있는 것으로 받아들일 때, 혹은 그 관습에 의미심장한 상상적 기원을 부여할 때, 가장 문화적이다. 우리는 그 문화를 실체적인 문화라고 부를 수 있다.

현대인은 그런 문화를 갖고 있는가? 계몽으로서의 문명은 우리에게서 실체적인 문화를 앗아가지 않았나? 우리는 모든 것들의 기원과 원인과 조건과 의미를 과학적으로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이 아닌가? 어두운 것, 애매한 것, 신비한 것, 희미한 것, 특별한 것, 초월적인 것, 불가사의 한 것을 개념적 투명성 속에 풀어헤쳐 일상을 명명백백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우리가 가진 문명이 아닌가? 우리는 우리의 집단적인 문화적 관행을 그저 형식적으로만, 관성적으로만 따르고 있지 않은가?

이것이 과도한 해석이라면, 또는 실체적인 문화가 전적으로 좋은 것일 수만은 없다면, 적어도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타지 사람의 쓸쓸한 죽음을 안타까이 여기는 상냥한 마음이 문화적 관행의 옷까지 입은 것이라고.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것처럼 보이면서도 실로 그 마을이 낮선 것에 열려있으며 차이에 충분히 관용적인 곳임을 나타내는 기호라고. 이는 장례행렬에서 연주되는 악기들에 서구의 악기들이 끼여있는 것으로도 짐작될 수 있다.

8. 노인의 위치에 대하여

노인은 말을 너무 잘한다. 노인은 계몽주의자는 아니지만 계몽주의에 대해 너무 잘 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 노인은 계몽주의자이다. 철저하게 반성적인 자기의식을 갖고 있으므로, 자신의 생각에 지고지순한 확신을 갖고 있으므로. 그러므로 노인은 그 마을의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주인공이 그 마을에 가한 해석이 의인화된 모습으로 등장한 것이다. 왜냐하면 주인공은, 혹은 감독은, 우리, 매사를 이해해야 하고 납득해야 하는 우리를 대변하기 때문이고 이 영화는 그 주인공이 꾼 꿈이기 때문이다.

9. 마지막 장면에 대하여

다리를 건너 마을에 들어온 주인공은 다시 다리를 건너 마을을 나간다. 나가기 전에 바위 위에 꽃을 얹어둔다. 그는 마을에 남을 수는 없었겠지만 대신 마을이 그의 가슴에 남아있다. 그 다음 장면을 여러분은 기억하는가? 흐르는 물 속에 뿌리를 내린채 물결따라 조용히 몸을 일렁이는 그 수초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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