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라스트 사무라이]벚꽃과 칼의 매혹이 주는 허실

영화감상평

[펌][라스트 사무라이]벚꽃과 칼의 매혹이 주는 허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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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사무라이]벚꽃과 칼의 매혹이 주는 허실
 
 
관련 영화 : 라스트 사무라이(2003)

[라스트 사무라이] 벚꽃과 칼의 매혹이 주는 허실

1. 무사도-중세 양식미의 매혹
예전에 전대통령 박정희씨가 사무라이영화를 무척 좋아해서, 일본에서 최신 사무라이영화가 나오면 바로 청와대로 공수하곤 했다는 얘길 들었더랬습니다. 일본문화에 많이 심취해서인지 박정희의 ‘10월유신’ 역시 일본의 ‘메이지유신’의 판박이란 얘기들이 많았고, 모든 학교들마다 바깥벽에 크게 붙여놓았던 ‘충’‘효’ 강조는 무사도와 군국주의교육의 유물이라 했었죠.
미국 등 서구에도 박정희씨가 심취했던 이 무사도에 매혹된 이들이 많았던 모양입니다. 이미 100여년전에 쓰여진 니토베 이나조의 [무사도]가 지금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이나 톰 크루즈에게도 필독서였다니까요. 서양의 그네들이 보기에 기껏 ‘매너’로 타락한 기사도에는 없는, ‘죽이는 기술’을 이렇게 격식을 갖추어 ‘도’로 승화시켜 놓은게 매혹적으로 보일 수 있겠죠.
사실, 일본 무사도 역시 명예와 정신수련을 강조하지만, 그 매혹의 바탕은 ‘중세의 양식미’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널리 알려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전국을 통일하고 막부체제를 만들면서 가장 최우선 목적으로 한 것은 ‘안정’이었죠. 그래서 사무라이 외에는 칼을 갖지 못하게 하고, 싸움집단인 사무라이에게도 ‘전사의 본능’ 대신 ‘격식과 양식’을 중시하는 각종 예의규범들을 강요했죠. 복장과 집, 칼과 검술, 다도 등 사무라이들의 문화를 윤리(충의, 명예)와 형식(미의식)면으로 집약시켰고, 거기서 이탈하는 자들은 막부에서 가차없이 제거시키면서 200여년간 세밀한 봉건통제체제를 구축했던 거죠.
규정된 봉급외에는 재산도 못불려, 말이 지배계층이지 맨날 상인들에게 빚을 지면서 불만을 품은 사무라이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고(아마 영화 [사무라이픽션]의 낭인무사들이 대표적 예이겠죠), 19세기 중엽 서구의 힘에 강제 개국당하자 제대로 대응못했던 막부에 대한 하급사무라이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그동안 허수아비였던 천황을 내세워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만들고자 했던게 메이지유신이었죠. 그러나 사무라이들의 바램과는 달리, 성립된 메이지정권이 빠른 근대화로 가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부정해야 했던게 ‘사무라이’들이었죠. 속도와 효율성, 물질이 중시되는 근대체제에는 비생산적이며 정신과 양식미로 상징되는 봉건제의 특권적 사무라이체제는 설 땅이 없으니까요.
이에 메이지유신의 최대 공신이자 인기높던 사이고 다카모리(영화상 가츠모토의 모델)를 중심한 사무라이들의 반란이 일어났던 것이고(서남전쟁), 그들은 봉건제도의 존속을 그리워하는 일체의 소망을 대표하였지만 전근대와 근대의 싸움에서는 당연히 근대가 승리하게 마련이죠. 이렇게 비극적으로 종말된 사무라이와 무사문화에 대한 노스탤지어의 재현, 그것이 사무라이영화요, 그걸 다시 헐리우드식으로 장엄하게 영화화한 이 영화겠지요.

2. 벚꽃과 칼의 허실
아마 이 영화에서 가장 장쾌하면서 대비되는 장면은 총과 대포들로 무장한 토벌군과 활과 칼로 무장한 사무라이군들의 들판에서의 격전일 겁니다. 근대와 전근대를 대표하는 모든 물질과 정신, 군복과 갑옷들이 총출동하여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마침내 말탄 사무라이들의 비장한 돌격과 전멸로 이어지는 이 역동적 장면 직후, 흐드러지게 핀 벚꽃과 그 아래의 할복 죽음이 마무리로 등장하면서, 무사도 찬양의 노래는 절정에 이릅니다. 특히 이는 알그렌대위가 잡히는 첫 번째 전투장면에서 느껴지는 죽음의 처참함과 공포와 대비되면서 가츠모토 스스로 ‘완벽한 죽음’이라고 뇌까리듯, 짧은 기간 동안 화려하게 확 피었다 우수수 떨어지는 벚꽃과, 무사의 또다른 분신인 검으로 스스로의 몸을 벤다는 조합이란 죽음의 미학으로 표현되죠. 그것이야말로 이 영화가 드러내고자 하는 무사도의 최상의 황홀경이겠죠.
알그렌이 남북전쟁과 인디언토벌을 거쳐, 자학의 상처를 안은채 일본으로 왔다는 자체부터 이미 무사도에의 매혹은 예정된 거죠. 백인 동족끼리, 그것도 산업화되고 인종해방이 된 북부와 농업지대이며 인종차별인 남부와의 싸움이었던 남북전쟁이란 것은 바로 사무라이들의 반란과 같은 구도이며, 백인기병대의 인디언토벌-학살은 서구-근대에 의한 전통일본-무사도의 학살이란 점과 일치하니까요. 미국에선 전자의 편에 서서 상처를 입은 알그렌이 일본에선 후자의 편에 서서 그 상처를 치유하고, 진정한 ‘무사의 길’을 깨닫는다? 일단 보기 좋죠.
그런데 전투장면 이전으로 돌려보면, 마을에서 출전하는 사무라이들에 대해 논밭에서 일하던 이들이 모두 나와 절을 하죠. 영화에서 표현되지 않았지만 이건 마음에서 우러나와선가요? 아니죠, 절을 하지 않으면 사무라이들이 목베어 죽이니까죠, 또 사무라이는 결코 농사 등 생산적 일을 하지않는, 놀고먹는 기생적 계층이죠. 그들 뒷바라지는 다 여자와 농부들이 헉헉대며 해야죠. 가츠모토나 사무라이의 ‘기품있는 대사’들엔 이런게 하나도 들어있질 않죠.
또하나, 가츠모토의 아들이 강제로 상투 잘리는 장면에서 왜 병사들이 그렇게 적대적이었을까요? 세습적 사무라이 때문에 허리가 휘게 일만 하고 희망이 없던 농부네 자식들도 계층제도가 없어지면서 군인이 되고 적어도 법률적으론 ‘평등하다고’ 큰소리칠 수 있는 세상이 왔기 때문이죠. 근대란 건 그래서 어떤 계층엔 몰락이요 어떤 계층엔 상승의 기회가 되는거죠.
영화에서 라스트 사무라이인 가츠모토는 참 완벽한 무사요, 영웅으로 표현됩니다. 적이지만 끝까지 용감한 알그렌에게 강한 인상을 받아 그를 사무라이로 받아들이고, 말 한마디 한마디가 무게요, 죽음을 각오하지만 무서워하진 않는 무사도의 체현이죠. 그런데 영화에서 역시 그가 천황에게 말하는 ‘백성을 생각하는’게 어떤 건지 모호하기 짝이 없죠. 포장은 그럴싸하지만 결국 사무라이의 특권을 그대로 보장하라는 것 아닙니까. 주군의 명령엔 이유없이 무조건 복종하는 사무라이, 포로를 경멸하고 전장에서 죽음을 최고로 여겨 결국 ‘가미가제’니 ‘옥쇄’니 하는 ‘전부 죽자’는 죽음찬양의 논리를 미화하는 마조히즘, 그것이 백성들의 행복과 도대체 무슨 상관일까요? 머리를 빡빡 민 것까지 사이고를 그대로 연상시키는 가츠모토, 그리고 라이벌이자 대표적 관료정치가였던 오쿠보 도시미치를 연상시키는 오무라의 대립 역시 의리와 불의로 포장하지만, 본질은 근대화를 지향하는 새로운 지배층과 농업봉건제를 옹호하는 구지배층과의 권력싸움 아닙니까.
더욱이 영화는 맥을 살리려 일부러(?) 외면했겠지만, 우리는 역사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대신에서 사임한 결정적 이유가 그의 ‘한국침략론(정한론)’이 당시 정부에서 좌절된 데 있다는 걸 알죠. 제2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되고 싶다는 것, 그것이 사이고의 바램이었죠. 물론 그의 욕망은 30년 후 그의 반대편에 섰던 이토 등에 의해 실현되었습니다. ‘무사도정신’의 재현? 그것 역시 현실에선 사이고가 죽은지 20년후 실현되죠. ‘애국적 사무라이’들이 이웃나라 조선의 왕궁에 침입하여 비무장한 여인들인 명성황후와 궁녀들을 무참하게 칼로 도륙했으니까요. 그날도 벚꽃이 후두둑 떨어지는 완벽한 죽음이었을까요?
벚꽃과 칼로 상징되는 무사도는 사무라이 그네들에겐 이상적 진리이자 미학이었겠지만, 무사 아닌 서민들이나 일본에 침략당한 이웃나라 사람들에겐 이유없는 살해논리이자 죽음과 광기의 상징이 아니었을까요? 벚꽃과 칼은 활짝 피거나 번쩍거릴 순간엔 폼나게 좋아보이지만, 지거나 피묻어 녹슬고 난 후엔 그처럼 지저분한 것도 없죠. 알맹이 없는 공갈빵처럼 허무하구요.

3. 변형된 오리엔탈리즘
이 영화는 일본문화 매니아라는 감독과 톰 크루즈 등이 자신들이 ‘보려고만 하는’ 상상속의 무사도, 또 헐리우드에 뿌리내리려는 일본측에선 ‘보여주고픈 부분만’인 기품있는 양식의 일본미를 접목시켜 누이좋고 매부좋게 포장시켜 놓은 고가 상품임에는 분명합니다.
문명의 서양과 ‘신비한 야만’인 동양의 대비 만을 보여주던 이전의 영화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예전 케빈 코스트너의 [늑대와 춤을]에서 보았던 인디언 전사의 길의 일본판 확대버전이요, 형식적으로는 구로자와감독의 [가게무샤]나 [난] 등의 영향이 너무 뚜렷합니다. 헐리우드 스케일과 일본인의 내적 논리로 일본문화와 무사도의 장점을 보여주는게 감독과 제작자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과적으로 역시 잘 포장된 겉껍질만 보여주고는 ‘이것이 실체다’라고 얘기하는 ‘장님 코끼리 만지기’로 떨어져 버렸다고 보여지구요. ‘편견의’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선다고 하면서 들어간 영화가 나올땐 ‘찬송가’로 범벅된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으로 변형된 것에 대해, 그래도 같은 동양문화이니 축하한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사무라이영화의 아류일 뿐이라 욕해야할지, 착잡한 기분이 드는군요.
영 개운치 않고 꺼림직한 느낌, 물론 이건 한국인이기 때문에 더 깊이 느끼기 때문이기도 하겠지요. 일본문화가 전면적으로 개방된다는 2004년에 본 첫 영화는 앞으로 일본문화를 계속적으로 접하면서 더 느낄 찝찝함과 모호함들을 예감하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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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Comments
1 이수성  
  오오 길어서 다 안읽으시면 다행이겟지만
안보신분이 이 글을 다 읽으시면
상당히 기분 나쁘시겟네요,
스포일러 주의 (괜찮게 읽었습니다 저는 ^^)
1 박용권  
  영화는 모든것을 다 보여주는 것이 아닌 어느 일부분만을 보여주고 각인시켜주는 것이라고 생각되어집니다. 위의 펀 글처럼 영화를 만들려면 차라리 다큐를 찍지 누가 영화를 만들겠습니까? 영화는 사실이 아닙니다. 역사영화든 심지어는 다큐멘타리든. 그리고 원래 역사자체도 사실을 포함하고 있지 않습니다.. 위의 글처럼 보는 시각은 영화를 오히려 왜곡시킵니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영화일뿐입니다..
1 The End  
  너무 깊게 빠저 들었네요 이렇게 보면...

좋은 영화가 ㅇ ㅓ디 있겠습니까...

사무라이를 찬양하는건 아닙니다...

단지 사무라이 들의 충, 신념, 의지, 지조 등을 높게 사고 싶죠...

계급 사회를 옹호하진 않지만 어떻게 보면... 더 평온해 보이지 않습니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