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해요,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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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슈퍼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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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요,슈퍼맨”크리스토퍼 리브와 각별한 사이였던 친구가 이야기하는 리브 부부의 아름다운 사랑.




켄 리건이 앨래나 내시에게 구술, 사진: 켄 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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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크리스토퍼 리브를 만난 것은 그가 총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달리고 기관차보다 더 힘이 세며 단번에 고층빌딩들을 뛰어넘는 능력을 갖기 직전이었다.


 1977년, 25세의 그는 영화 “슈퍼맨”으로 미국의 우상이 되었다. 나는 잡지에 실리는 저명인사 사진과 영화 스틸사진을 찍는 사진작가로,  슈퍼맨의 사진촬영을 하는 동안 이 키 크고 건장한 배우를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저녁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을 때에도 나는 그가 내 인생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리란 것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슈퍼맨이 개봉된 다음해 그에 관한 잡지 기사의 사진 촬영을 의뢰받은 나는 5일 동안 그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그는 유쾌하고 겸손한 성격이어서 함께 일하기 편했다. 그가 나중에 우리집 바비큐 파티에 나타났을 때 그 자리에 있었던 친구들은 그가 슈퍼맨 역을 한 크리스토퍼 리브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포츠와 문학, 영화, 연극, TV 등 관심사가 비슷했다. 나는 영화 스틸사진 촬영 외에 여러 사건 및 전쟁, 세계적인 인물들을 취재했기 때문에 그는 내가 하는 일에 관심이 많았다. 그러나 우리 두 사람을 실제로 친하게 만든 것은 나에 대한 리브의 신뢰였다. 그는 내가 허락없이 그의 사진을 절대로 보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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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슈퍼맨 2”가 개봉되었을 때 나는 또 다시 리브의 사진을 촬영했다. 그때 리브는 모델회사 경영자인 게이 엑스턴과의 사이에서 아들 매슈를 낳았으며 2년 뒤 딸 알렉산드라가 태어났다. 나는 휴일이나 휴가 때 함께 지내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에 리브의 가족과 아주 친해졌다.


워너브라더스사는 “슈퍼맨 3” 촬영을 위해 나를 서부 캐나다에 파견했다. 나는 촬영지 물색차 리브와 함께 배를 탔고 급류에서 래프팅도 했다. 멋진 촬영 아이디어가 떠올라 리브에게 열기구를 타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그가 대답했다. “항상 타고 싶었지요. 그런데 내 계약서에 슈퍼맨을 제작하는 동안 자가용 비행기를 탈 수 없다는 조항이 있어요.” 그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고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열기구에 관한 언급은 없어요!”



다음날 오후 늦게 우리는 열기구를 탔다. 우리가 들판의 나무 그루터기 위에 착륙했을 때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리브와 나는 열기구 밖으로 내동댕이쳐졌다.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일어나 리브의 이름을 불렀다.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내가 슈퍼맨을 죽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리브의 처절한 신음소리가 들렸다. “오, 하느님, 만신창이가 된 것 같아요.”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어갔다. 희미한 달빛 속에서 그가 누워 있었다. 나는 그를 부축하기 위해 무릎을 꿇었다. 리브가 나를 올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한 대 칠 뻔했다. 그는 생채기 하나 없이 말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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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에 리브와 게이가 갈라선 것은 슬픈 일이었다. 두 사람은 10여 년을 함께 살았다. 리브는 상심했고 아이들을 걱정했다. 그와 게이는 양육권을 공동으로 갖기로 합의했다. 그해 여름 리브는 데이나 모로시니를 만났다.


가수로 활동하던 데이나를 처음 만난 후 리브는 그녀가 바로 자신이 평생 찾고 있던 바로 그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고 나에게 말했다. 두 사람은 1992년에 결혼했고 아들 윌이 태어난 후 뉴욕으로 이사했다. 나는 여름별장으로 가는 길에 두 사람의 집을 종종 방문했다. 두 사람의 생활은 완벽해 보였다. 그러나 1995년 5월 두 사람의 세계는 무너졌다. 아찔했던 단 한순간에 리브는 승마사고로 척추 부상을 입으면서 목에서 발끝까지 전신이 마비되었다.



몇 달 뒤 리브가 재활센터로 옮겨진 다음 데이나가 내게 전화했다. “리브가 당신이 와줬으면 해요. 카메라를 가져 오세요.”전신이 마비된 친구 앞에서 감정을 억제하기가 너무 힘들었다. 당시 리브는 말하는 것조차 어려웠지만 자신이 기획하고 있던 책에 사용할 자기 사진을 찍어 달라는 뜻을 분명히 밝혔다.



리브는 자신의 처지가 데이나를 힘들게 할까봐 걱정했다. “당신에게 부담을 줄 수는 없어요.” 그말에 데이나는 이렇게 답했다.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나도 당신을 사랑해요. 당신은 영원히 나의 남편이에요.”


리브가 생명유지장치를 벗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데이나의 사랑과 두 사람의 힘으로도 충분히 생활해 나갈 수 있다는 데이나의 믿음 때문이었다. 리브가 집에 돌아왔을 때 데이나는 아내와 연인 그리고 아이들의 어머니 이상의 역할을 했다. 그녀는 리브의 간호사이자 운전기사, 트레이너였으며 그의 모든 것이었다. 매일 24시간 내내 남편을 돌보며 음식을 먹이고 코를 닦아주는 등 모든 수발을 기꺼이 들었다. 또한 유머감각을 잃지 않았다. 어느 날 밤 리브의 집에서 바비큐 파티를 할 때 데이나는 옥수수 한 자루를 집어들고 모두에게 말했다.


“‘조스’가 날뛰는 것을 지켜보세요!” 그러고 나서 리브 앞에 옥수수를 갖다주니 리브가 2초 만에 옥수수의 한쪽을 모두 먹어치웠다! 한 번은 어느 여성잡지의 사진을 촬영할 때 데이나가 자기 다리를 리브 위에 얹고는 이렇게 말했다. “약간 에로틱하게 가자고요.”



나는 두 살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 리브와 데이나가 윌을 극진히 사랑하는 모습에 나도 그런 부모가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리브는 종종 윌의 아이스하키 경기를 보러 갔는데 그 일은 그에게는 고역이었다.



여러 가지 기계를 연결하고 특수장비를 장착한 밴을 타야 했으며 체온이 일정 수준 이하로 내려가면 안 되기 때문에 몸을 완전히 감싸야만 했다. 그것은 리브가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었다. 윌이 득점을 했을 때 리브의 얼굴은 미소짓는 여느 관객들과 다를 바 없었으며 평소보다 10배는 더 밝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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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브는 척추장애 치료법을 찾고자 크리스토퍼 리브 재단을 창설해 6500만 달러 이상을 모금했다. 그는 전신마비를 딛고 일어서겠다는 희망을 가지고 줄기세포 연구를 촉진하는 정치적 투쟁을 시작했다. 그는 치료기술 현황을 알아보기 위해 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는 여러 차례 좌절을 겪었으나 다시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2004년 뉴올리언스에서 10대 사지마비 장애인 소녀가 주인공인 TV 영화를 감독하던 도중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 욕창 때문에 세균에 감염되어 그의 면역체계가 손상되었다. 퇴원한 그는 나를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가 말했다. “정말로 아름다운 밤이군요. 산책이나 하지요.”



데이나가 리브의 휠체어를 밀고 거리를 지나갈 때 사람들은 그를 위해 차를 멈추었다. 사람들은 차에서 내려 외쳤다. “뉴올리언스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나는 리브와 데이나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이 그때가 마지막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2004년 9월 25일 리브는 52세 생일을 맞았다. 그러나 보름 뒤 욕창으로 인한 감염증세가 전신으로 퍼지면서 심장발작으로 숨을 거두었다. 극도로 상심한 나는 데이나를 만나 오랫동안 껴안은 채 울었다.



데이나는 크리스토퍼 리브 재단의 회장으로 줄기세포 연구를 위한 투쟁을 계속했다. 또한 연기와 가수 일을 다시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잘 지내는지 살피기 위해 종종 그녀의 집에 들렀다. 2005년 6월 그녀가 흥분한 목소리로 나에게 전화를 걸어 뉴욕의 한 카바레로부터 출연 제의를 받았다면서 선전용 포스터에 사용할 사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내 스튜디오로 찾아온 그녀는 매우 밝아 보였다. 우리는 하루 종일 촬영을 했다. 그녀는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찌나 열정적이었던지 주변 사람들까지 흥이 났다. 그녀는 계속 기침을 하며 “이번 감기는 좀처럼 떨어지질 않는군요”라고 말했다.



그녀는 몇 주 뒤에도 여전히 기침을 했다. “데이나, 의사의 진찰을 받아봐요.” 그녀는 진찰 예약을 잡아 놓았다고 했다.



그녀가 폐암에 걸렸다고 말한 것은 그 다음 달이었다. 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걱정마세요. 나는 평생 담배를 피운 적이 없어요. 조기에 발견했으니 아마 6~7개월 뒤면 완치될 거예요.”



데이나는 자기 몫보다 훨씬 더 많은 역경을 겪었다. 불운이 맹렬한 산사태처럼 그녀를 덮치는 것 같았다. 남편 리브를 잃고 4개월이 지난 2005년 2월 그녀의 어머니가 난소암 수술을 받고 사망했다. 그해 11월 추수감사절 때는 그녀의 집을 방문했던 아버지가 뇌졸중으로 쓰러졌다. 데이나처럼 베풀기를 좋아하는 아름다운 사람에게 끔찍한 일이 생길 때마다 나는 세상이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데이나는 은퇴하는 하키선수 마크 메시어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1월 초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TV로 그녀의 공연을 지켜보며 그녀가 분명히 암을 이겨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리브의 장남 매슈가 나에게 전화로 알려주었다. “켄, 이번에는 회복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2006년 3월 6일 데이나는 44세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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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하늘이 원망스럽기도 했다. 그러나 데이나가 리브와 함께 지내러 갔다는 생각도 들었다. 아마도 그녀 역시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데이나는 남편의 추모행사에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리브, 언젠가는 당신과 그곳에 함께 있을게요.”



죽기 몇 달 전 데이나는 “새로운 의학”이란 제목의 다큐멘터리 프로를 녹화했다. “여러 해 동안 남편과 내가 삶을 계속해 나갈 수 있었던 것은 희망 때문이었습니다. 희망은 나에게 계속 살아갈 힘을 주고 있습니다.” 그녀가 시청자들에게 한 말이다.



희망은 나에게도 힘을 준다. 나는 사진 기자로 세계를 누비며 남다른 인생을 살았다. 그러나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체험은 리브와 친구가 되고 데이나를 만나 그 우정이 두 배로 커진 것이다.


 


2006년 12월호 리더스 다이제스트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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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Comments
3 류승엽  
참 멋지고도 슬픈 스토리입니다. 이 글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눈가에 눈물이....